265화
싸아아아.
급격한 한파에 뤼제는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이 떨림은 그저 냉랭한 기온 때문인 걸까?
‘……뭐야? 저 몬스터는’
만약 그 질문을 받는다면, 뤼제는 단연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이 떨림의 주체는 블러드 서킷 지형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미친 빙속성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울이며 만든 아라크네의 허물로 빗은 구울은 그녀의 손에 처참히 가루가 돼버렸다.
까드드드득.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가 직시한 것만으로 거미 몬스터들은 모조리 동상이 돼버렸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늑대 수인, 렌이 멀쩡하다는 것을 인지한 뒤로 그는 무심코 깨달았다.
전세역전.
스팟!!
그 사실을 직감한 뤼제는 거미줄에 뛰어내려 부유 마법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이탈했다.
팔짱을 끼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세피아.
까드드득.
그녀의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얼음 덩어리가 생성됐는데, 뾰족하게 다듬어진 그것은 뤼제를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빗발처럼 퍼부어지려는 찰나.
뚜벅.
“멈춰. 세피아.”
뒤늦게 나타난 건우의 명령에 증발된 것처럼 사라졌다.
“혀, 형.”
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세피아의 등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건우를 쳐다봤다.
건우는 눈썹을 삐죽 올리며 렌을 쏘아봤다.
“너 누구 마음대로 깝죽거리고 다니래. 아주 컸다고 기고만장하지.”
발설직후.
렌의 머리에 손을 올린 건우는 그대로 힘을 주었다.
까드드득.
“끄아아아아아악! 자, 잘못했어.”
탑에서 번외라고 불리는 최강자의 악력에 렌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래도 잘 싸웠어.”
아주 잠깐 목격한 것뿐이지만, 렌이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압도한 것을 지켜본 건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우는 맛이 있네.”
“형이 키운 게 아니고 스승님이 키운 거거든.”
렌의 반박에 그것 또한 인정한다는 듯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너스 3계층, 보스 케이론.
백병전의 분야에서만큼은 세피아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케이론은 교육에도 소양이 있었다.
덕분에 렌도 착실하게 랭커를 목표로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건우는 피식 웃으며 쀼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 엘리시움은 내가 개량해서 너한테 줬다는 건 잊으면 안 된다.”
“으윽.”
거기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는지, 렌은 입을 꼭 다물었다.
레브리카를 웨폰마스터로 발돋움시켜 준 아티팩트, 엘리시움.
그는 이것을 상황에 맞는 무기로 변형시켜 활용해 왔다.
등급은 레전드였지만 렌에게 안성맞춤인 무기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랭크는 두 단계나 떨어져 레어로 급변했다.
그 덕분에 엘리시움이 변형할 시, 중량도 그 무기에 맞게끔 증가해 버리는 부작용도 생겼지만.
늑대 수인인 렌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단점이었다.
잠시 고요한 분위기가 주변에 감돌자, 렌은 차분한 표정으로 건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라페아 누님이랑 니파 누나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건우는 풋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니파가 잘 돌봐주고 있어.”
“뭐가 그렇게 웃겨?”
“귀엽잖아. 십존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겨우 거미를 무서워하는 게…….”
“확실히 의외성은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게 뭐가 귀여운 거야. 나는 아직까지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다고.”
라페아가 만든 참상을 떠올린 렌은 안색이 금세 새파랗게 변했다.
“방금 만난 적보다 라페아가 더 무섭나보네.”
“말이라고. 내가 우리 엄마보다 더 무서운 여자가 둘이 있다고 한다면, 한 명은 라페아 누님이고 또 한 명은…….”
말을 이으려고 하는 찰나.
렌은 저도 모르게 세피아를 힐끔 쳐다봤다.
찌릿!
푸른 안광과 마주친 렌은 횡격막이 급격히 수축했는지…….
“히끅!”
딸국질을 하며 세피아의 시선을 회피했다.
“……알았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또 한 명의 여인이 누군지는 알겠다. 그럼 그만 가 볼까?”
건우가 성큼 발을 옮기자, 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료가 있는 쪽이 아니라 적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쫓아가게?”
“응. 너를 죽이려고 한 단죄는 내려 줘야지.”
“……그것 말고 왠지 또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있지. 내 기분을 너무 더럽게 들쑤셔놨거든.”
건우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오싹!
일순간, 살기를 품은 건우의 안광과 마주친 렌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쭈뼛쭈뼛 솟았다.
지금까지 많은 적과 싸워 왔지만.
건우가 이렇게까지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는 건,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난 적을 손꼽아도 이런 눈빛을 만들게 한 적은 키메라의 왕, 라폰 밖에 없었다.
“형이랑 아는 사이야?”
“아니.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근데 왜?”
물론 상대방이 악질적인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건우는 아직 적의 정체도 배경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렌이 하고 싶은 말을 깨달은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어붙어 깨진 구울의 파편, 얼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과거의 이그너스 가문을 멸망시킨 존재.
7성급 대재앙의 몬스터, 아라크네의 허물로 빗어진 구울이었다.
“그냥 내 트라우마를 자극했거든.”
-극복한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도 심마에 사로잡히다니. 쯧쯧.
세이비어는 질색하면서도 안타까운 듯 혀를 찼고 건우는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지금부터 극복하려고 할 참이에요.”
휘리릭.
말하는 것과 동시에 건우는 팬텀 스피릿 소드를 손에 쥐며 빙그르 돌리며 발길을 옮겼다.
***
“하아, 하아.”
알이 있는 곳에 도착한 뤼제는 새파란 안색으로 석장을 휘저었다.
끼기기기긱!
그러자 미리 조제됐던 다수의 아라크네의 구울들이 튀어나와 일제히 알을 옮기려고 했지만.
꽈아아아아악.
거미줄에 단단히 붙들린 알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빠득!
뤼제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소나기가 불어 닥쳤을 때, 어미 새는 어떻게든 새끼를 구출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버리고 간다.
지금 뤼제의 입장도 그와 무척이나 유사했다.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 블러드 서킷을 엄동설한의 추위로 뒤덮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 블러드 서킷의 핵심중추를 담당하는 알도 당연히 데미지를 입을 것이며 끝끝내 부화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젠장!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할 수 없다고!! 이건, 이건!!”
“아라크네의 알이니까.”
바로 그때, 누군가 서슴없이 걸어왔다.
오싹!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뤼제는 빳빳하게 고개를 돌려 뒤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건우가 세피아를 거느리며 렌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뚝.
그 태연한 태도에 뤼제의 이마에서부터 식은땀이 주륵 흐르며 땅에 떨어졌다.
“이, 이곳까지는 어떻게 분명 구울들을 심어 놨는데.”
피식.
건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세피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7성급 몬스터, 아라크네는 알고 있지만 동격인 세피아는 모르나 보네. 그건 참 의외야.”
“세, 세피아?!”
그녀의 실명을 들은 뤼제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탑 내에서 이럽셥 웨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취를 감춘 7성급 몬스터.
그중 하나가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니, 당연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거, 거짓말. 가, 강한 것 알겠다만, 7성급 힘은…….”
“더 엄청나지. 그건 너보다 내가 훨씬 잘 알고 있어.”
전생에서는 이그너스의 총체 전력으로 7성급의 온전한 전력, 아라크네와 겨뤘고.
최근에는 단신으로 브렌넨을 상대하기까지 했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브렌넨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1대1 결투나 전쟁이 아닌 준비가 철저한 사냥이라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이곳까지 들어온 거야. 너희들 같은 거 상대할 생각 없다고. 꺼져!!”
뤼제는 질색하며 전의를 상실한 표정으로 윽박을 내질렀지만.
건우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검지로 아라크네의 고치, 아니 알을 가리켰다.
“저게 태어나게 할 생각은 없거든. 앞으로 부화하려면 얼마나 많은 식인을 해야 할지 장담 못 하잖아.”
“……어, 어떻게 그걸?!”
“실에 마력을 집어넣으니까 자꾸 비상식적으로 한곳으로 흘러가더라고. 여기까지 추격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건우는 주변에 있는 실을 검지로 퉁 쳤다.
그러자, 검지 끝에 실린 마력은 단숨에 알로 쏠렸다.
‘그걸 무슨 수로 추적해?!’
대수롭지 않게 내뱉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에 제아무리 마력을 싣는다고 해도 그 속도가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다.
더군다나 블러드 서킷을 구성하는 실은 억이나 조 단위가 아닌 경이나 해 단위의 많은 실로 둘둘 말려 있었다.
난잡하게 널린 그 실 사이에서 정확히 마력을 추적하는 것은 하이랭커조차 쉽사리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독고치는 갈라보니까, 미라가 돼버린 플레이어들이 잔뜩 있더라고. 통상 이런 마력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마력을 채집하려면, 플레이어가 아주 안성맞춤인 소재잖아. 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마 그 시체를 이용해 구울을 조제했겠지.”
“그, 그게 뭐 잘못됐어? 난 귀염둥이의 밥을 구해 주고 찌꺼기 좀 이용한 것뿐이라고.”
싸아.
건우는 극도로 혐오스런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
[중력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발설직후, 건우는 즉시 마법을 시전했고.
우지끈!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아아악!”
뤼제는 미처 반항해 보기도 전에 압도적인 중력에 짓뭉개졌다.
꽈아아아아악.
그를 지탱하고 있는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 내구성은 실로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휘릭.
건우는 그대로 팬텀 스피릿 소드를 들고 알 쪽으로 다가갔다.
“그만둬! 뭐하는 짓이야!! 네가 하려는 짓이 뭔지 알기나 해!!”
내장까지 짜부라져 토혈을 하고 있던 뤼제는 절박한 표정으로 건우를 만류했다.
씨익.
건우는 얄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내보였다.
“알지. 쓰레기 소각.”
“…….”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잠잠히 있던 뤼제는 곧 자포자기한 듯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푸훗.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원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이 블러드 서킷의 중심은 아라크네의 알이야. 세피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저 실만큼 응결시켜서 깨뜨릴 수도 없어. 왜냐하면 저건 탑에서 제일 단단하다는 광물, 명계석보다 훨씬 강도가 높으니까.”
거만스런 그의 말투에 건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아, 그래?”
울컥!
마치 ‘그게 전부야?’라는 반응에 뤼제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반면, 건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팬텀 스피릿 소드를 주변에 널린 실 중 한 가닥에 갖다 대며 비스듬히 휘저었다.
‘뭐 하는 짓이야?’
그것이 마치 칼을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뤼제만의 착각이었다.
실 끝에 실린 검은 오러는 정신없이 거미줄 사이를 휘저으며 알을 손상시켰다.
-끼에에에에에에엑!!
알 속에 있던 존재는 크게 놀랐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뤼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고, 건우는 얄궂게 웃으며 검지로 팬텀 스피릿 소드 검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니제르 십식, 위천(暐踐:Illusion trample), 검격을 흐름에 실어 보낼 수 있는 공간 절단술 중 하나야. 아 그렇다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 나도 몸으로 깨달은 것뿐이지. 이치를 이해한 건 아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쇄액! 쇄액! 쇄액!
아라크네의 알 주변에 널린 실로 검은 오러가 정신없이 배회했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검은빛이 난잡하게 튕기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불길한 징조를 느낀 뤼제가 질문을 던지자, 건우는 싱긋 웃으며 친절히 답해 줬다.
“방금 실어 보낸 검격은 72개. 놀기 딱 적합한 숫자지.”
발언을 기점으로 72개의 검격은 모조리 알에 쏟아졌고.
콰콰콰콰콰콰쾅!
단단하다고 일컬어진 알은 검은 오러에 휘감겨 산산조각이 났다.
266.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