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건우 형!”
건우의 출현에 렌은 반색하며 이름을 불렀다.
척!
케이론 역시 건우로 인해 가까스로 숨통을 틀 수 있게 되자 즉각 예를 갖췄다.
평소라면, 그들을 반겼겠지만.
건우는 대답 대신 주변을 계속 경계하고 주시했다.
초감각 스킬을 통해서 인지할 수 있게 된 더티 플라이의 개체수가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건우의 출현에 더티 플라이들은 황급히 자리를 이탈해 기척을 숨기기 급했다.
반응으로 보아 바알제붑 역시 건우의 존재를 식별한 게 틀림없었다.
기척이 멀어지자, 건우는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렌에게 물었다.
“라페아와 니파는 어디 있는 거야?”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
빠득!
수심이 가득한 표정에 건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사정은 모르지만, 분명 안 좋은 꼴을 겪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기 때문이다.
세이비어는 그런 건우의 이성을 달래 주었다.
-초조해 하지 말거라. 너의 반려는 어디 가서 쉽게 당할 처자가 아니다.
“…….”
그 말에 건우는 차분해진 표정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위험한 꼴을 겪은 것은 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케이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렌은 자신보다 어린 소년, 소녀를 돌보기 위해 제 몸을 불사르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 렌을 두고 마냥 분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윽.
그 때문에 렌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쓰다듬었다.
“안 보는 사이에 많이 든든해졌네.”
울컥.
건우의 한마디에 렌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난 너무 약해.”
“약하지 않아.”
건우는 피식 웃으며 그대로 렌을 껴안아 주었다.
***
더티 플라이 소동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건우는 곧장 폐허가 된 마을을 살폈다.
27층의 중심부라고 불리는 멜빈토스.
그곳은 한때 정령의 성지로 각광받으며, 탑에서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라페아를 보기 위해 많은 플레이어들이 한 번은 거쳐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옛 도시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더티 플라이의 더러운 체액과 바글바글거리는 거대한 구더기로 인해 구린내 나는 유령도시로 전락했다.
피해자도 상당해 현 시점, 도시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천 명 내외.
남은 인원들 대다수는 가까스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피할 수 있게 공헌한 것은 다름 아닌 라페아였다.
처음, 자신의 영지였던 곳에 발을 디딘 라페아는 적잖이 분노했다.
본인 스스로 현명한 군주라고 칭하는 일은 안 했지만, 적어도 떳떳한 방식으로 운영해 왔기에 27층에는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물론, 그 애정을 포기하고 교란자에게로 향하는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으나.
플로어 마스터 자리를 내려올 때.
그녀는 멜빈토스의 통치가 문제없게끔 인계를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왔었다.
하지만.
모처럼 온 멜빈토스는 한 침략자에 의해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모해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라페아는 즉각 바알제붑 무리와 격전을 벌였다.
7일간 이어진 사투.
건우가 없는 7일 동안은 라페아는 단신으로 바알제붑 무리를 격퇴해 나갔다.
그로인해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대다수의 주민들이 피난을 갈 수 있게 됐다. 이곳에 남은 주민들은 라페아의 승리를 호언장담했다.
십존.
랭킹 7위, 정령군주 라페아.
플로어 마스터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그녀는 아직까지 전성기 상태 그대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녀에게 불행한 일이 있다면?
상대가 7대 마왕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플레이어 랭킹에서는 신과 그에 준하는 악마는 포함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규격 외의 존재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십존.
통상적으로 전력을 비교하자면, 바알제붑은 제약의 법칙에 전력이 크게 감퇴돼 라페아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알제붑 역시 과거, 뱀과 함께 인류멸망에 공헌한 마왕.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숙주를 찾아 제약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지상부활을 꾀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바알제붑은 라페아와 결전에서 승리했다.
패자인 라페아는 성 지하에 강제로 구금됐다.
그리고 그녀를 구출하려 했던 니파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라페아와 같이 구금돼 있는 상태였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야.”
이야기를 마친 렌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눅 들 것 없다. 상대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니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세이비어는 유령의 모습을 드러내며 렌을 위로해 주었다.
이럴 때 보면, 귀여운 손자를 다독여 주는 다정한 할아버지 같았다.
반면, 건우는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사건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납득이 안 가는 점도 있어.”
“뭔데?”
“라페아의 패배가 납득이 되지 않아.”
신계나 마계, 정령들이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곳에서 라페아가 패배를 했다면, 어느 정도 수긍은 됐지만.
이곳 멜빈토스는 바로 얼마 전까지 라페아가 직접 운영하던 영지였다.
바알제붑에 의해 퇴색되기는 했어도 궁지에 몰릴 만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건우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
왜애애애앵!
라페아가 거주하던 옛 궁전.
그곳은 현재 오물과 구더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왕좌는 깔고 뭉개져 원래의 형체를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위로는 3미터의 거대한 신체를 가진 남자가 미친 듯이 성안에 있는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파르르르르.
그를 모시고 있던 시녀들은 혹여 자신이 먹잇감이 될까 싶어 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바알제붑.
숙주의 몸에 완전히 기생에 성공한 그는 온전한 마왕의 힘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는 30cm는 될 것 같은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아아아아 구마니 같은 놈의 몸보다는 훨씬 적합한 몸이야. 타르타로스보다 훨씬 살만하고 쾌적하지 않은가. 크크크크크.”
식사를 멈춘 바알제붑은 더티 플라이처럼 겹쳐진 곤충의 눈으로 정면을 살폈다.
그곳에는 격전에 옷가지 곳곳이 찢어지고 상처를 입은 라페아가 니파의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이쯤 되면 바알제붑의 완벽한 승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게, 라페아와 니파 주변으로는 이그니스와 미네르바가 풍염 결계를 형성하여 바알제붑을 견제하고 있었다.
라페아의 정령친화력에 의해 소환되고 그것을 유지해 주는 것은 니파의 마력이었다.
스스스스.
현재 니파는 루바아이를 치켜뜨며 마력을 최대치로 개방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 시간이 어언 하루가 넘어가고 있었다.
라폰과의 전쟁 중에서도 반나절 넘게 사용한 경우가 드물었는데.
지금처럼 쉬지 않고 마력을 전개하니 니파의 정신력도 점차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알제붑에게는 지금 당장 저 결계를 뚫을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굴욕이군.”
라페아는 숨을 헐떡이며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저 녀석이 인질을 써서 그렇게 협박을 한데다가 뱀의 힘까지 쓰는데.”
패배를 떠올리던 니파는 아직까지 분통이 터져 몸이 떨렸다.
라페아와 바알제붑의 대결은 그야말로 천지가 격동할 만큼 요란스러웠다.
미세한 차이기는 하지만 라페아는 확실히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격전 중 바알제붑은 자신의 힘을 숙주에게 완전히 정착시키기 위해 뱀의 힘을 빌렸다.
그 결과는 바알제붑의 승리.
치명상은 피했지만 라페아는 부상을 입고 체력을 회복할 길도 막힌 상태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니파가 늦게 등장했다면, 이미 저 세상에 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면, 바알제붑은 라페아에 의해 크게 힘을 잃기는 했지만.
그것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발산한 마력의 공급은 인간들에게서 착취하면 그만.
앞으로 반나절만 있으면 그는 원래의 힘을 회복하고도 남을 것이다.
바알제붑은 피식 웃으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크크크크, 내 미적인 관점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너희를 탑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를 갖춘 여인들이라고 칭송하더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니파는 말조차 하기 힘든 라페아를 대신해 눈살을 찌푸리며 바알제붑을 노려보았다.
“크크크크 그 기고만장한 자세를 보니 제법 탐이 나는구먼. 아아, 한데 어쩌나. 이미 정보통을 통해서 너희들이 교란자의 연인이라는 건 진작 깨닫고 있는데.”
“……?!”
예상치 못한 바알제붑의 말에 라페아와 니파는 눈을 부릅떴다.
바알제붑이 이미 건우가 교란자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죽.
그는 잇몸을 드러내며 간사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너무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나와 그는 단편적으로 만나 진솔한 이야기한 적이 있거든. 크크크 아아, 여기서 교란자의 연인을 건드리면 녀석은 날 어떻게 할까나.”
콰아아아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알제붑은 등에 있는 파리의 날개를 휘저으며 라페아와 니파를 급습했다.
화르르르륵!
가까스로 이그니스와 미네르바가 형성한 풍염결계가 그를 제지했지만.
몸이 불에 타오르면서도 바알제붑은 흉측한 눈동자로 라페아와 니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기대되지 않은가.”
주륵.
광기가 깃든 그 모습에 니파는 무의식중에 겁에 질려 식은땀을 흘렸다.
희번득.
반면 라페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바알제붑을 노려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남자를 깔봤다가는 큰코다칠 거야.”
“크하하하, 아직도 기세가 죽지 않았군. 하긴 그래야 십존이라는 역사에 걸맞지.”
바알제붑은 다시금 자리로 돌아갔다.
이그니스의 화염과 미네르바의 풍압에 갈기갈기 찢겨지고 불탄 부위는 모조리 재생됐다.
‘라폰보다 재생이 빨라.’
그 경이적인 회복속도에 니파는 전율을 느꼈다.
“아아, 빨리 왔으면 좋겠군. 최건우.”
건우와의 재회가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지 바알제붑은 피식 웃다가 무너진 성벽 부근에서 반짝이는 금빛을 발견하고는 슬며시 눈매를 좁혔다.
‘뭐지? 방금 그 빛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 그것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던 그는 혹여 건우가 온 게 아닐까 싶어 감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그 순간.
[침입자가 성내에 쳐들어왔습니다.]
느닷없는 시스템의 경고에 바알제붑은 재빨리 눈앞에서 영상을 띄웠다.
예상대로 북쪽 문 부근에서 건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외에 다소 특이한 광경도 목격됐다.
‘이 녀석들은 또 뭐야?’
화면에는 예기치 못한 남자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적발의 남성은 남쪽 문을 통해…….
잿빛머리의 남성은 서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바알제붑이 있는 곳은 중앙으로 그들은 약 반경 5km로 그들은 겁도 없이 마왕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불시에 쳐들어온 것이다.
“흐음, 유흥을 즐기기 위해 지원군을 부른 건가. 썩 강해 보이는 않는군. 너희들이 해치우도록.”
바알제붑은 자신을 뒤에서 호위하고 있는 세 그림자에게 명을 내렸다.
그들은 27층에서 바알제붑이 가장 먼저 부활시킨 충직한 심복으로 6성급 중에서도 중상급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7성급의 몬스터를 빚어내는 뱀의 힘도 획득해 실제 힘은 6성급 최상급에 속할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바알제붑은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이 녀석들의 힘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나. 크크크크크크크”
248.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