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끼기기기긱!
부딪친 검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적발남성의 검을 밀어낸 건우는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멧돼지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앱솔루트 실드를 시전했습니다.]
콰직!
-뀌에에에에엑!
지면에 한 획을 그리며 펼쳐진 앱솔루트 실드에 멧돼지의 얼굴은 풍선마냥 터졌다.
위이이이이잉!
터져 나간 멧돼지 얼굴 속에는 간만에 보는 더티 플라이의 면상이 튀어나왔다.
-더럽고 역겹게 생긴 건 여전하구나.
세이비어는 나름 무덤덤한 반응이었지만 건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의 플레이어들에게 말했다.
“녀석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대피해. 함부로 터뜨리다가는 더티 플라이 체액을 통해 질병이 옮을 수 있으니까.”
오싹!
건우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그제야 건우가 자신들을 위해 적발남성의 검을 가로막은 것을 눈치채고는 중얼거렸다.
“이, 일단 도망가야지.”
“어, 어쩔 수 없지.”
마음을 다진 플레이어들은 즉각 안전지대로 추정되는 곳으로 발을 굴렸다.
자리에 남은 이는 건우를 비롯해 두 명.
바로 적발의 남성과 잿빛의 머리칼을 가진 남성이었다.
“참견을 좋아하는 녀석이었군.”
적발의 남성은 쯧 혀를 차며 검을 거두었다.
“알아줘서 고맙다.”
처음 본 것임에도 건우는 넉살좋게 답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잿빛의 남성이 입을 뗐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그럴 리가 있겠어?”
적발 남성의 반문에 잿빛 머리의 남성은 실눈으로 웃으며 입을 뗐다.
“그럼 서로 통성명을 하지. 내 이름은 젠제만 뮤던트. 이름을 부를 때는 젠이라고 불러줘.”
마이페이스한 그 모습에 적발 남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뗐다.
“칼리언트 슈타크. 주제도 모르고 칼이라고 불렀다가는 죽는다. 슈타크라고 부르도록.”
“최건우야.”
서로 자기소개를 마친 그들은 이윽고 자신들을 향해 벌떼처럼 몰려오는 짐승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 지대에 이탈하고 나서 이야기해 볼까.”
“좋아.”
“그러도록 하지.”
젠의 제안에 건우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남성은 동시에 발을 박차 비탈길에 발을 굴리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녀석들.’
건우는 어렵지 않게 자신과 발을 맞추는 그들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
깊은 저녁.
“크아아아아악!”
더티 플라이에 기생한 동물들의 습격으로 대다수 플레이어들은 죽음을 맞이한 듯 산 곳곳에서는 비명이 가득했다.
‘운이 없네.’
귀 따갑게 들리는 비명 소리에 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평상시라면 저 정도 동물들은 가볍게 쓸어버릴 수 있을 테지만.
더티 플라이들을 죽이면 질병이 대기로 퍼져 나간다.
그렇게 되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갈 판국이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더티 플라이의 잔해를 해치우면, 새로운 바알제붑의 숙주가 건우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욱더 많은 더티 플라이들이 몰려들 테고.
건우는 결국 끝없는 격전이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현재.
급하게 하산한 그는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오두막을 발견하고는 자신과 같이 도피한 젠제만과 슈타크를 바라보았다.
슈타크는 외견 그대로 굳건하고 강한 인상을 가졌으며, 성격도 마초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뭇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종종 저 성격 때문에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반면 젠제만은 나름 온순한 인상과 매너를 갖춘 인물이었다.
건우와 슈타크 사이에서 생긴 작은 불화를 중재한 것도 다름 아닌 그였다.
거기에 상당히 능글맞기도 했다.
‘그래도 둘 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
-그건 아닐걸.
그때 줄곧 상황을 살피고 있던 세이비어가 진지한 어조로 건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건우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자, 세이비어는 살짝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놈은 딱 봐도 성격이 단순한 것 같지만. 젠제만은 실눈캐잖냐. 실눈캐를 얕보면 안 돼. 겉과 속이 다른 놈이 바로 저런 부류야.
“…….”
건우는 잠시 어이가 없어 말문을 잃었다가 곧 젠제만과 슈타크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는 왜 27층에 올라온 거야?”
젠제만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멜빈토스에서 꼭 찾고 싶은 게 있어서. 슈타크는 내가 동행을 부탁했고.”
‘뭐를 찾는 거냐고 물어보면 실례겠지.’
건우는 호기심을 잠시 접어 두며 말했다.
“우연이네. 나도 멜빈토스에 가는 중인데, 같이 가지 않을래?”
“난 좋지만, 우리 까칠이가 쉽게 승낙해 줄 것 같지가 않네.”
빠직!
슈타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젠제만을 흘깃 놀려 보았다.
“죽고 싶냐? 한 방 거리도 아닌 게 자꾸 까불지 말랬지.”
“에이 농담이야. 농담. 가볍게 흘려들으라고.”
우득, 우득.
슈타크는 몇 번 주먹을 쥐고 피기를 반복하다 곧 젠제만에게 관심을 끄고 건우에게 말했다.
“내 검을 받아칠 정도면, 자기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을 테니 딱히 상관없어.”
까칠한 어조에 건우는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젠제만은 난처한 표정으로 건우에게 말했다.
“이해해 달라고. 저 녀석한테는 결혼한 아내가 있는데, 지금 아내 얼굴을 보지 못한 지 꽤 오래 돼서 한참 예민하거든.”
발끈!
정곡을 찔렸는지 슈타크는 얼굴을 화끈 얼굴을 붉히며 젠제만을 노려보았다.
“너 이 자식!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네 아내한테 너에 대한 오해를 풀어 달라고 부탁받은 내 신세도 생각해 주라고.”
의외의 사실에 건우는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입을 뗐다.
“아아, 유부남이었구나. 굉장히 빨리 결혼했나보네.”
탑을 등반하고 있는 플레이어들 대다수는 나이에 크게 연연치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 온전히 가정을 이루면서 등반을 하고 있는 경우는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상황이 어색해지자, 슈타크는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너는 어떤 목적으로 이 탑을 등반하는 거지?”
슈타크의 질문에 건우는 별 망설임 없이 답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 있어서 말이지.”
“그것 참 딱하게 됐군.”
슈타크는 잇몸을 드러내며 인벤토리에서 호리병을 꺼내 대야만한 술잔에 술을 콸콸 따랐다.
스윽.
그러고는 그것을 건우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이동은 내일 본격적으로 할 테니까. 고주망태처럼 마셔보자고.”
……
건우는 잠시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술잔에 가득 잠긴 술을 보며 말했다.
“이거 마셨다가는 간이 못 버틸 것 같은데.”
“연장자가 주는 술을 거절하지 말라고. 사내답지 않기는.”
빠직!
슈타크의 도발조에 건우는 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만둬라. 그것 먹다가는 간이 썩어나가.
걱정스런 마음에 세이비어는 만류하려고 했지만.
꿀꺽꿀꺽.
질 수 없다는 생각에 건우는 단숨에 그것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도수가 생각보다 높았는지 식도가 화끈거리며 얼굴에는 금세 취기가 달아올랐다.
“푸하.”
그러나 어떻게든 말끔하게 원샷에 성공한 건우는 그대로 잔을 내밀었다.
“지금 와서 도망치는 건 아니겠지?”
건우의 도발조에 슈타크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술자리에서 물러날 리는 없지.”
씨익.
그의 확답을 들은 건우는 싸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인벤토리에서 검은 술병을 꺼내 들었다.
-너, 너 설마 그건…….
술병의 정체를 깨달은 세이비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뽕!
건우는 단단하게 밀봉된 마개를 뽑은 뒤, 그대로 슈타크의 잔에 따랐다.
콸콸콸콸.
맹독 같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심히 자극했다.
“어이쿠.”
젠제만은 귀여운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코를 막았다.
슈타크는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술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독을 주는 건 아니겠지?”
“이건 엄연히 술이야. 설마 무서운 건 아니겠지?”
“흥! 그럼 상관없어.”
슈타크는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듯 양손으로 집어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젠제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건우가 손에 집은 술병을 바라보았다.
검은 라벨이 붙은 고급 술병.
라벨에는 술이 진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명주를 빚는 장인 일가, 바커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커스 가문에서 빚은 검은 라벨의 술은 탑에서 제일 위험한 도수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오죽하면, 바커스 가문이 빚은 술은 신조차 향락을 느끼게 하는 독주라고 불리겠는가.
그 맛에 매료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술이기도 했다.
그리고 술자리가 이어진지 어언 3시간.
풀썩!
그 위험한 독주를 좋다고 마셔 제끼던 슈타크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
젠제만은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지었고 건우는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후훗. 이겼다.”
-이기기는 뭘 이겨! 이 비겁한 놈아! 도수 레벨이 다른 걸로 주량 승부하는 놈이 어디 있어?!
“안 들립니다~”
세이비어의 비난에 건우는 양손을 귀로 막은 채, 흥얼거리다가…….
풀썩!
그대로 정신을 잃고 잠에 빠졌다.
***
짹짹짹짹.
이른 아침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건우는 힘겹게 눈을 떴다.
“끄응. 머리 아파.”
목은 갈증에 허덕여 타들어 갈 것 같고 머리는 자꾸 어질어질해 다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자.”
그런 건우에게 때마침 누군가 물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물병을 받아 든 건우는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켜다 눈을 부릅떴다.
주변을 살펴보니, 어느새 자신은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다.
마부석에는 슈타크가 두통에 시달리며 말을 몰고 있었다.
“아아아, 꼬맹이의 함정이 걸려들 줄이야.”
“천하의 술꾼인 슈타크가 이렇게 굴복할 줄 누가 생각이라도 해 봤을까? 후훗.”
마차 안에서 건우에게 물을 건넨 젠제만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제일 늦게 일어난 건우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벌써 이동 중인 거야?”
“이대로 지체할 수 없으니까. 멜빈토스까지는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어.”
“벌써?”
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도 그럴게.
맵상으로 표기된 멜빈토스까지의 거리는 마차를 타도 삼 일은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한테 제법 빠른 이동수단이 있어서 말이지.”
‘이동수단?’
호기심에 슬쩍 창밖을 봤지만, 슈타크가 몰고 있는 것은 단순한 마차였다.
“물론 이동수단은 가업비밀이라 밝히지는 않을 거야.”
얄궂게 웃는 젠제만의 미소에 건우는 오히려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자신이야 의식을 잃었지만, 분명 세이비어는 보았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건우의 생각을 알아챈 건지, 세이비어가 사전에 답을 했다.
-안 알랴줌.
빠직!
오랜만에 구사하는 얄미운 말투에 건우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다가 곧 이그너스의 반지에서 발출된 빛을 보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현상은 각 층계의 보스가 교신을 걸어올 때, 발현되는 거였다.
현재, 건우에게 교신을 걸어오는 것은 3계층 보스, 케이론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건우는 어린 늑대 수인, 렌을 지키기 위해 케이론을 붙여 두었다.
이제 케이론의 등급은 5성급으로 동급의 레벨 중에서는 세피아를 제하고는 최강의 던전보스였다.
한데, 그런 그가 어째서 도움을 요청하는 교신을 해 오는 거지?
‘서둘러야겠군.’
“미안한데, 여기서 이별하자고.”
“뭐?”
뜬금없는 건우의 작별 인사에 젠제만과 슈타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스키드블라드니를 꺼내 들었다.
우웅!
어느 순간 한 척의 배가 튀어나오더니 마차의 옆을 날기 시작했다.
크기는 마차와 대략 비슷했다.
“……?!”
갑작스런 스키드블라드니르의 등장에 두 사람은 꽤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건우는 그대로 몸을 던져 스키드블라드니르에 올라탔다.
쇄액!
그러자 스키드블라드니르를 놀라운 속도로 멜빈토스를 향해 날아갔다.
“……뭐야? 저 녀석.”
고삐를 쥐고 있던 슈타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아가는 스키드블라드니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멜빈토스의 마을은 더티 플라이 떼로 한가득했다.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대피를 하려다 체액을 빨려 미라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들오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현재 쑥대밭이 된 주점의 테이블 아래에서 렌과 함께 몸을 피신 중이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그들의 체액을 원하던 4성급의 더티 플라이들은 벽과 창문 등을 깨뜨리며 일제히 습격을 가해 왔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물론 그들의 기습을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케이론이 할버드를 든 채, 더티 플라이들을 무자비하게 썰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무적일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좀처럼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5성급 더티 플라이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콰직! 콰직!
그들의 일격에 케이론의 양쪽 어깨가 꿰뚫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정확히는 맞았다기보다 일부러 어깨로 받아쳤다는 표현이 옳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더티 플라이들이 단숨에 렌과 아이들을 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님!”
걱정스런 마음에 렌은 크게 동요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집채만큼 큰 6성급 더티 플라이가 들이닥쳤다.
케이론은 즉각 할버드를 버리고 양손으로 더티 플라이 주둥이를 붙들어 막아섰다.
“꺄아아아악!”
지레 겁을 먹은 아이들은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웅크렸으며.
우웅! 우웅! 우웅!
4성급과 5성급의 더티 플라이들이 일제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빠득!
렌은 분한 마음에 이를 갈며 몸으로 아이들을 감쌌다.
‘여기까진가.’
속으로 좌절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선의 경계를 시전했습니다.]
렌과 아이들의 주변에 낯익은 금빛의 링이 생성됐다.
움찔!
그리고 경계에 부딪친 더티 플라이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쇄액!
그와 동시에 한 줄기의 금빛 섬광이 그대로 더티 플라이들 사이를 지나갔고.
콰직! 콰직! 콰직! 콰직!
한 박자 늦게 더티 플라이들의 몸이 우후죽순 터지며 끔직한 죽음을 맞이했다.
섬광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건우가 싸늘한 표정으로 스키드블라드니에 탑승한 채 서 있었다.
247.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