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검처럼 벼려진 호박색의 동공.
그 동공에서 발출된 살기에 라폰의 전신이 떨려왔다.
‘뭐, 뭐지? 이 감정은…….’
생전 처음 느껴 본 감성에 라폰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정확히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옛날, 드래곤마저 학살했던 자신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하지만 다시 한번.
건우와 눈빛을 마주하고는 그제야 그 안에 내포한 영혼의 정체를 짐작했다.
-그렇군. 네 녀석이 니제르군.
자신의 입으로 그 정체를 실토한 라폰은 콸콸 흐르는 자신의 상처를 매만졌다.
‘……상처가 낫지 않아. 이게 엘프들의 전설이자 영웅.’
저벅.
니제르가 한 걸음을 내딛자…….
움찔! 콰콰쾅!
라폰은 거대한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무 등을 부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성한 엘더리아 땅을 더럽히지 마라.”
콰앙! 서걱! 콰앙! 서걱!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휘두른 라폰의 몸집만 한 검은 오러가 몸 곳곳을 갉아먹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육신 그 자체가 소멸되는 일격.
건우가 휘두른 니제르의 7식과는 위력도 크기도 비교가 불가능했다.
“죽어!!”
그 순간 위기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둔 5성급 키메라 수백 마리가 니제르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앙! 서걱!
“몇 번을 하든 마찬가지다.”
니제르가 휘두른 검은 오러가 순식간에 키메라들을 증발시켰다.
마치 지우개로 낙서를 지우는 것만 같았다.
이게 검술로 가능한 건가? 마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라폰의 착각이었다.
키메라들은 가루 단위로 분해 당해 사라진 것뿐이니 말이다.
그 증거로 허공에는 키메라의 뼛가루와 피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스스스.
안개가 된 피는 마치 흩날리는 꽃잎처럼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고고고고고.
니제르는 분노 어린 감정을 눈빛으로 드러내며 발을 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짖어 봐라. 날 멈추려면 뭐든 해야 할 게다.”
“사, 살려 줘.”
콰앙! 서걱!
어림없다는 듯 니제르의 일격이 다시 한번 라폰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네놈은 그런 간절한 외침을 무시당하는 절망을 느껴 본 적이 없겠지. 그렇다면, 내가 가르쳐 주마.”
꿈틀꿈틀.
라폰의 몸은 어느새 2미터의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살점은 모두 건우와 니제르에 의해 분해되는 바람에 힘은 점차 고갈되고 있었다.
니제르의 눈빛에는 자비가 결여돼 있었다.
“이 분노가 꺼질 때까지 네놈은 숨을 쉴 생각도 하지 마라.”
“히, 히익!”
결국 그 눈빛에 굴복한 라폰은 등을 돌려 날갯죽지에 피막의 날개를 꺼내 들었다.
콰앙! 서걱!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니제르의 검격은 망설임 없이 라폰의 날갯죽지를 검으로 찢어발겼다.
콰아아앙 데구루루르.
라폰은 지면에 몸을 구르며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지면을 디디며 도망치려 했지만.
서걱!
두 자루의 사인참사검이 사이좋게 라폰의 양쪽 손등을 찍어 눌렀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오러는 라폰의 기력을 빼앗아 갔다.
“크아아아악! 난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단 말이다. 지상 최강의 생명체는 바로…….”
“말이 많군.”
니제르는 그대로 라폰의 입에 손을 넣어 혀를 말아 쥐어 꺼냈다.
독이 깃든 숨결과 침은 곧장 오른손을 녹이려고 했지만.
콰직! 콰앙!
손에 품은 검은 오러는 그대로 라폰의 혀를 터뜨렸다.
“크아아아아악!”
생전 처음 느껴 본 고통에 라폰은 경악했다.
지금까지 분신을 통해 고통을 분산시킨 그였지만, 분신이 없는 지금은 고통을 온전히 그 자신이 받아들여야 했다.
니제르는 혐오 어린 시선으로 라폰을 노려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추하기 짝이 없는 놈.”
콰직! 콰직! 콰직!
이후 니제르의 무자비한 폭행은 밤새 끊임없이 이어졌다.
엘더리아 곳곳.
라폰이 어디로 도망가든 곧장 찾아내 예외 없이 육신을 절반으로 베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분열할 수 있는 힘조차 잃었을 때의 라폰은 사람의 엄지만한 크기로 전락했다.
“이것 놔!”
라폰의 가녀린 음성으로 니제르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니제르는 조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네놈이 최초로 탄생한 모습이군. 추하기 그지없어.”
“네놈!!”
라폰은 급격히 분노했지만 곧 묘안을 떠올린 듯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어왔다.
“크크크크, 날 죽였다가는 분명 뱀께서 너희에게 응징을 가할 거다. 거래를 하자. 날 살리면 이 모든 건 없던 것으로…….”
콰직!
더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니제르는 손아귀에 힘을 줘 라폰의 본체를 터뜨려 버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0층 엘더리아의 포식자, 라폰을 퇴치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스킬북, 키메라 바이퍼를 획득하셨습니다.]
시스템 문구는 모든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쏴아아아아아.
어두워진 하늘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와 세찬 비바람이 불어왔다.
“엉망진창이 돼버렸군.”
건우의 눈을 통해 라폰에 의해 쑥대밭이 된 엘더리아의 모습을 살펴본 니제르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만약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가정이다. 니제르.
홀로 내뱉은 그의 질문에 답해 주는 것은 세이비어였다.
“오랜만이군.”
니제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유령의 모습으로 현신한 세이비어를 마주 봤다.
-잘도 내 후손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군.
세이비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건우의 몸 상태를 살폈다.
빙의하기 전까지 멀쩡했던 몸은 근육이 찢어지고 터져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뼈까지 타격이 가지는 않았다.
세이비어는 무척이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6성급까지 이길 정도로 강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건우에게 남은 길이 멀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 때문이다.
전성기에 가까운 니제르의 검술.
놀랍게도 S급 헌터인 건우 몸으로는 검술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을 뿐,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체력도 근력도 한계가 명백했다.
-내 후손은 아직 약하나?
“마음 같아서는 아직 단련시키고 싶은 심정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니제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후에 만난 첫 제자에게 더한 가르침을 전수하고 싶었지만.
세이비어와 달리 지박령이 아닌 니제르가 이 세상에 현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 몸은 이제 넘겨주겠다. 난 이만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벌써 가려고? 겨우 라폰 따위를 쓰러뜨리라고 내 후손이 너한테 몸을 양보한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이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닷!
빗길 사이로 니파가 니제르를 쫓아오고 있었다.
“…….”
비에 홀딱 젖은 그 모습에 니제르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 목소리가 너의 딸에게 닿을 때까지 내 후손은 너를 계속 자신의 몸에 옭아맬 거다.
그제야 건우의 목적을 깨달은 니제르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그너스! 너희들은 정말 성가시고 오지랖이 넓은 놈들이야.”
-얼씨구야. 그 말은 나에게 칭찬이다. 요놈아.
세이비어는 니제르의 비난을 흘려들으며 조롱했고.
타악.
니제르는 이그너스의 반지를 냅다 지면에 던져 버렸다.
-야 이 새끼야. 뭐하는 짓이야!
깜짝 놀란 세이비어가 욕두문자를 한껏 쏟아 냈지만 니제르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지금 그가 가장 도망치고 싶은 상대는 어떤 무서운 외적도 아닌 자신의 딸이었다.
“기다려! 할 말이, 할 말이 있어!”
타닷.
니파의 부름에도 니제르는 도망치는 것 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계수에 남겨 두고 와야만 했던 딸.
무고한 시간의 흐름에 갇혀 있다 다시 세상에 나온 딸.
이제 와서 그녀를 마주할 용기는 니제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니제르와 거리를 좁힐 수 없었던 니파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그 자리에서 소리쳤다.
“가지 마!”
움찔!
그 절박한 외침에 니제르는 몸을 떨며 발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비와 눈물에 젖은 니파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날 두고 가지 마. 아빠.”
“…….”
그 얼굴을 지켜본 니제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스스스.
문득 정신을 차릴 때는 손에는 펜던트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과거, 니파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한 펜던트로 건우의 의식이 인벤토리에서 끄집어낸 듯 보였다.
“하아, 정말 오지랖이 넓은 제자군.”
니제르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천천히 니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니파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
니파는 훌쩍이며 원망 섞인 시선으로 니제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니파.”
사연은 많았지만 그것을 변명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과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왈칵.
정작 니제르에게 원망을 터뜨릴 것만 같았던 니파는 그대로 눈물을 터뜨렸다.
자신들을 끝끝내 괴롭히던 라폰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길고 긴 인연이 닿아 마침내 니제르가 눈앞에 나타나는 기적까지 펼쳐졌다.
마음속에 벅차오른 감정 때문에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왜,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왜! 계속, 계속 기다렸는데!”
라폰 앞에서 강인했던 니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제하니, 그 자리에는 어린 시절의 니파만이 남아 있었다.
니제르는 그녀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 주고선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살아 있어 줘서…….”
말을 하던 도중 목이 잠겼다.
눈에 맺힌 눈물은 뺨을 타고 그대로 흘러내렸다.
데몬소드.
검의 악마라고 불리는 니제르의 냉철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다시 만난 딸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야만 하는 아버지였을 뿐이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는 니제르의 가슴에 니파는 말없이 안겨 왔다.
***
비가 갠 하늘.
문득 고개를 올려 바로 본 하늘은 무척이나 푸르고 맑았다.
오늘은 여러모로 뜻 깊은 날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엘프들을 괴롭혀 온 숙적, 라폰이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공석이던 엘프로드가 탄생했다.
사상 최초로 인간이 엘프로드가 된 사태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오랫동안 지켜온 엘더리아를 인간에게 넘겨줘도 되는 걸까?
의견은 분분했고 어느 누구도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부서진 신전, 홀로 남은 권좌.
그곳에 앉은 건우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우선 인간에게 로드의 자리가 넘어갔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라는 걸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엘프들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엘프에게 로드의 자리를 넘기라고 하고 싶지만.
지배자에 걸맞은 그릇은 애석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싱긋.
건우는 그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전력으로 로드의 자리를 찬탈해 주십시오. 조건은 하나, 니제르의 검술을 익혀 저를 이기는 것입니다.”
…….
건우의 말에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를 어떻게 이겨?
세이비어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그렇게 말했지만.
‘알아서 하겠죠.’
칼을 포함해 몇몇 호전적인 성향을 띤 엘프들은 굳게 심기를 다지고 있었다.
스윽.
뒤이어 건우는 엘프들을 한 명씩 둘러보며 다시 입을 뗐다.
“66년 동안 지배자의 횡포와 폭거에 맞서 싸운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끝을 맺는 건우의 말에 엘프들은 울음과 함성을 동시에 터뜨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이 끝이 났다.
엘더리아에는 다시금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푸른빛을 되찾을 것이다.
235.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