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웅성웅성.
엘프들 사이로 동요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어떤 수상한 현상에 대한 의문과 당혹감 때문이었다.
죽기 일보 직전.
중상을 입은 엘프들이 금빛의 마력에 휘감겨 점차 몸이 회복되고 있다.
“……이건.”
라폰은 즉각 고개를 돌려 힘의 진원지를 바라봤다.
저벅.
두 갈래로 갈라진 엘프들 사이로는 건우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엑!
위화감을 느낀 키메라들이 단숨에 건우를 덮치려고 했지만.
서걱!
어느새 빼든 두 자루의 검이 키메라들을 무참히 썰어 버렸다.
츠츠츠츳.
검신을 타고 흐르는 검은 오러가 상당히 치명적인지 살점이 베인 키메라들은 비명만 내질렀다.
저벅. 탁.
라폰과 니파의 사이에서 발을 멈춘 건우는 라폰을 올려다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생긴 게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네. 살찐 키메라.”
“호오 이 라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네놈은 정말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너, 너. 어째서?”
니파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건우를 지켜봤다.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익히 봐 와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무력은 라폰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건우는 슬쩍 니파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와주러 온 거 아니다. 오히려 선언하려고 온 거지.”
“선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가! 아무리 너라도 라폰은 무리야?”
콰직! 쏴아아아아아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궤적이 라폰의 오른쪽 팔을 도려냈다.
검붉은 피가 정신없이 분사되며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팔을 앗아 간 자는 물론 건우였다.
건우는 싱긋 웃으며 입을 뗐다.
“……우선 첫 번째 선언. 진화가 최강이라는 잡종한테 한 남자가 이룩한 검술의 위대함을 보여 줄 거야. 라폰. 난 너에게 마법을 제하고 검으로만 도전해서 승리한다. 네가 주구장창 늘어놓는 진화냐? 아니면 한 남자의 진보된 검술이냐? 그것이 강함의 척도를 결정짓게 될 거야.”
“분수도 모르는 놈이 가소롭기 짝이 없군!”
분노한 라폰은 즉각 삼지창으로 건우에게 찔러 넣었다.
콰앙!
하지만 건우가 즉각 두 자루의 검으로 창을 막아 내며 힘겨루기가 펼쳐졌다.
콰드드드득.
발끝이 지면에 밀리는 쪽은 건우였다.
체격과 그리고 포식으로 인한 힘 스탯은 마나기관을 발동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콰앙!
하지만 건우는 재주 좋게 라폰의 힘을 역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라폰의 목을 노렸다.
0.1초의 순간.
라폰은 보았다.
무심결 닿은 검은 오러가 그의 비늘을 산산조각 내는 기이한 광경을…….
콰앙!
그와 동시에 목이 반쯤 베였지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힘을 주니 곧장 상처가 재생됐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엘프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세상에 저 라폰을 마치 장난감처럼…….”
“검으로 저 라폰을 제압할 수 있는 게 사실이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풍경에 모두가 경악했다.
뚜벅.
건우는 걸음을 옮기며 하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두 번째는 니파, 너에게 하는 선언이야. 너는 엘프로드의 자격이 없어.”
울컥!
니파는 곧장 반박하기 위해 입을 떼려고 했지만.
“으아아아아아악!”
콰앙! 콰앙! 콰앙!
라폰과 정신없이 격전을 벌이는 그 모습을 보고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여유를 가지고 라폰을 대하는 것 같지만.
라폰도 열불이 날대로 난 상태라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꿈틀, 꿈틀, 꿈틀.
라폰의 등에서 마치 새싹이 돋는 것처럼 바인 스네이크 무리가 튀어나와 일제히 건우를 노려왔다.
서걱! 서걱! 서걱!
초감각 스킬을 발해 그것들을 모두 썰어나가며 대처했지만.
콰앙!
뒤이어 날아온 라폰의 꼬리에 복부를 강타했다.
“쿨럭!”
일순간, 건우는 입에 토혈을 내뿜으며 그대로 지면에 나뒹굴었다.
“최건우!”
깜짝 놀란 니파가 달려가려고 하는 찰나.
라폰의 등에 달려 있던 촉수가 건우를 향해 작살처럼 쇄도했다.
콰앙! 콰앙! 콰앙! 서걱! 서걱!
생과 사.
아슬아슬한 교차점 사이에서 건우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검을 휘둘러 그것들에게 대항했다.
그 와중에 라폰은 꼬리를 살랑 흔들며 니파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게 당연한 결과다. 계집. 의지하고 싶은 강한 녀석이 나타나니 희망을 품었겠지만, 너희들이 지금에 와서 하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지?”
움찔!
라폰의 말에 니파는 크게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지금 엘프들을 이끄는 리더는 너인 것 같군.”
“……그렇다면?”
니파는 눈빛을 굳히며 반박했다.
“그렇다면, 닉이란 녀석이 느꼈던 것 이상의 절망을 선사해 주마. 크크크크크. 오랫동안 네년과 생사의 고비를 같이 넘겨 온 네년의 동료를 차근차근 짓밟는다. 너희들의 살결은 이 라폰의 생육에 큰 도움이 되거든. 크크크크, 나는 너희들의 절망을 먹고 자라는 절대자다.”
“……닥쳐.”
니파의 눈 밑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적이 내뱉는 간사한 말이라는 것쯤은 이미 훤히 알고 있다.
무척이나 분한 것은 그의 말에 마음이 극심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아, 이것 참 너희들의 교태 어린 눈물을 보면 참 식욕이 돋는단 말이지. 한 가지 말해 주지. 너희들이 새로 둔 거점에 머무는 아이와 여자들은 내가 지금 막 섭취할 참이야.”
“……?!”
니파는 눈을 부릅떴다.
공포가 가득 깃든 눈동자.
그것은 라폰에 대한 두려움보다 소중한 이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더 할 나위 없는 절망에 니파는 눈물과 증오 어린 눈으로 소리쳤다.
“죽여 버리겠어! 라폰!!”
‘크크크크. 아아, 짜릿하구나. 이 년은 가장 마지막에 먹는 게 좋겠군.’
교활하게 웃으며 식사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순간.
-추하기 짝이 없구나. 네놈은.
분신의 귀를 통해 한 여인의 목소리가 라폰의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팔에 거품이 낀 것처럼 심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콰아아아아앙!
그대로 팔이 터져 나갔다.
그것은 분신에 대한 극심한 데미지로부터 전가된 것이었다.
몸의 반이 붕괴된 타격에 라폰은 재빨리 수복에 들어가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를 향한 분노를 터뜨렸다.
“크아아아아아악! 라페아 네년!!”
***
크르르르르.
라폰이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라폰의 분신들은 허기에 굶주린 몬스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한 개체도 우습게 볼 수 없다.
쇄애애애액!
특히 엘프들의 거주지 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특별한 키메라였다.
그것은 뱀의 꼬리, 사자의 몸에 노인의 얼굴을 한 만티코어로…….
그들 모두가 4성급, 그 숫자는 무려 500마리에 이르렀다.
그것들은 마치 라폰의 키메라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안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크아아아앙!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 만티코어는 5성급으로 라폰이 특별히 즐거운 사냥을 위해 만들어 둔 가장 강력한 개체였다.
크르르르르.
그들은 냄새만으로 엘프들의 자취를 뒤쫓고 있었다.
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지상에 박혀 있어야 할 엘프들이 증발된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를 뒤쫓으니 그곳에는 자신들을 모두 뒤덮고도 남을 그늘이 존재했다.
후우우웅.
그늘의 정체는 스키드블라드니르.
필리프 4세가 자랑하는 거대 이동요새이자, ‘갓’이라는 최고 등급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부유하고 있는 스키드블라드니르에 엘프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크아아아앙!
엘프들을 발견한 만티코어는 게걸스럽게 침을 흘리며 습격을 가하려고 했다.
“꺄아아아아악!”
지레 겁을 먹은 엘프들은 몸을 웅크렸으나…….
서걱!
그 이빨이 채 닿기도 전에 고압으로 분사된 물줄기가 사정없이 만티코어를 썰어 버렸다.
크르르르르.
그 압도적인 위력에 만티코어는 파르르 몸을 떨며 물줄기를 생성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배의 머리, 그곳에는 라페아가 적금발을 흩날리며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기품 있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상태였다.
“이런 잔챙이나 상대해야 되다니. 내 꼴도 참 우습군.”
가볍게 탄식하던 라페아는 나부끼는 머리를 정리하며 만티코어들을 향해 입을 뗐다.
“추하기 짝이 없구나. 네놈은.”
피식.
하지만 입꼬리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실룩거렸다.
“라폰. 네놈은 어째서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지?”
화륵!
발설 직후.
라페아의 오른손에 이그니스가 검의 형상으로 들렸다.
화르르르륵!
그것은 원초의 불꽃, 스키드블라드니르에는 마치 거대한 태양이 도사린 것처럼 맹렬한 열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결코 해를 주지는 않았다.
키에에에엑!
뭣도 모르고 라페아의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만티코어들만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환한 불꽃에 은은히 비춰오는 라페아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들려주마.”
싱긋 웃은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
‘……라페아 어째서 네년이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나서는 거냐.’
각 분신의 오감으로 자신의 적을 인식하고 있던 라폰은 이해하지 못할 사태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분신의 귀를 통해 라페아의 음성이 그에게 전달됐다.
-최초에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이 탑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사건이었다.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강자. 하지만 탑에서 그를 능가하는 이들이 몇몇 존재하지.
“그만 닥쳐라. 전부 죽이면 그만인 거다.”
쿠구구구구.
슬슬 비위가 거슬렸던지 라폰은 몸을 수복하는 중에 거대한 기운을 뿜었다.
오감을 저리게 만드는 압박.
“으읏!”
니파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저벅, 저벅.
그 순간.
어느새 몸을 회복한 건우가 몸에 두르고 있던 팬텀 케이프를 니파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스스스스.
그러자, 니파의 몸 곳곳에 난 상처가 빗방울이 땅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너, 어, 어떻게…….”
니파는 눈을 부릅뜨며 멍하니 건우를 쳐다봤다.
“쉬고 있어.”
저벅, 저벅.
건우는 뒤돌아보지 않고 니파를 그리고 라폰을 지나쳐 한 곳으로 향했다.
“무슨 속셈이냐? 네놈.”
분노한 라폰의 귓가로 라페아의 말이 연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자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와, 부조리한 것들을 기만하는 담대함이 있지. 그것은 누구도 품을 수 없는 지고의 품격. 그렇기에 나는 확신한다.
어느새 건우의 걸음의 끝에 닿은 곳은 권좌와 그곳에 놓인 엘프로드의 왕관, 엘더리아였다.
엘프로드의 자격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손 댈 수 없는 20층의 상징.
스스스스.
건우에게서 나오는 빛에 엘더리아는 과거의 찬란했던 형태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그러나 엘더리아는 건우의 손길을 거부했다.
[소유권을 부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소유권 부여 스킬에 의해 엘더리아는 더 이상 건우를 거부하지 못했다.
“……?!”
“……?!”
[엘더리아가 플레이어, 최건우를 인정하였습니다.]
[엘더리아 습득으로 ‘엘프로드’ 타이틀을 획득하셨습니다.]
[20층, 엘더리아의 질서는 플레이어, 최건우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엘프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최건우를 엘프로드로 인식합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라폰과 니파의 몸이 경직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우는 스스로 엘더리아를 자신의 머리에 얹으며 거만하게 권좌에 앉아 라폰을 내려다보았고.
라페아는 웃음기 서린 어조로 라폰에게 말했다.
-설령, 서로 다른 종족일지라도 그는 왕의 자질을 가졌음을……. 그것이 내가 반한 남자다.
미미하게 울려 퍼지는 한마디.
라폰은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 듯 반응을 보였고, 건우는 다리를 꼬며 한 팔을 턱에 괸 채, 라폰에게 말했다.
“가지고 싶었던 왕관을 내가 가지게 됐네. 어떻게 하냐? 라폰.”
피식.
그 표정은 상대에 대한 괄시와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놈!!”
콰아아아앙!
급 분노한 라폰은 건우의 앞까지 단숨에 발을 박찼다.
그러고는 눈에 착용한 안대를 벗어 다수의 동공들이 득실거리는 흉측한 눈동자로 건우를 쏘아봤다.
233.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