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생전 처음이었다.
별것도 아닌 이유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평소 때라면, 화근이 되는 자를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그녀의 화를 돋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최건우였기 때문이다.
둘의 대치를 보다 못한 엘퀴네스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피 진정해. 왜 무섭게 화를 내는 거야?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라페아는 엘퀴네스에게 의념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외박을 하고 오질 않나!’
‘갑자기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나!’
그녀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를 것만 같았다.
-이, 이그니스 말려 봐.
-아직 시름시름 앓고 있어서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
기껏 기력을 회복해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던, 이그니스는 모른 척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바람피우지 말랬지!!
‘안 피웠어!!’
엘퀴네스의 타박에 건우는 전력으로 부인했다.
옥신각신 다투는 그 모습에 세이비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역시 막장은 보는 맛이 있어.
어색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보다 못한 니파가 나섰다.
“내 이름은 니파, 어젯밤, 우리는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고 이 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일도 없었다.”
라페아는 팔짱을 끼며 니파에게 질문을 건넸다.
“출신은?”
“……20층, 엘더리아.”
대답을 마친 라페아는 로브를 벗어 넘겼다.
엘프를 상징하는 뾰족한 귀, 그리고 에메랄드를 품은 것만 같은 눈동자.
풍성한 금발은 마치 금싸라기를 모아 만든 실 같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용건은 뭐지?”
“……20층의 주민은 전멸 직전이야. 뻔뻔한 것은 알지만 우리는 저 남자의 힘이 필요해.”
이미 건우를 믿기로 했는지, 니파는 건우 쪽을 쳐다봤다.
라페아는 왼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찬가지로 건우를 쳐다봤다.
“그렇게 됐어. 난 20층, 엘더리아에서 그곳의 플로어 마스터랑 결착을 지을 거야. 라피.”
“흐음.”
라피란 호칭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라페아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홱!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반대 안 해?”
“엘퀴네스한테 맹세했거든. 내 남자의 사명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되지 말자고.”
노골적으로 내 남자란 표현을 쓰니 건우는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라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니파를 쳐다봤다.
라페아의 키는 대략 170cm정도, 그리고 니파는 164cm 밖에 안 되었기에 라페아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한테 딱 한 가지 충고만 해 두지.”
“……뭔데?”
니파는 조금 긴장했다.
정체까지 간파할 수 없지만 라페아의 아우라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라페아는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건우에게 팔짱을 꼈다.
“……?!”
예상치 못한 행동에 건우는 크게 당황했고.
“어떤 경우에도 탐하지 마라.”
라페아는 니파에게 단단히 엄포를 주었다.
“…….”
그게 상당히 어이가 없었는지 니파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인기 많은 것 같은데, 왜 불쌍해 보이지?”
근처에서 건우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렌은 피식 웃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있는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렌이야. 너는?”
“칼.”
대답은 하되, 칼은 팔짱을 끼며 렌의 악수를 거부했다.
“친근감이 좀 부족하구먼.”
슬쩍.
칼은 렌의 밑에 있는 세피아와 케이론을 쳐다봤다.
마리오네트로 있는 그들은 쿨하게 팔짱을 끼며 서 있었지만, 칼은 그저 한심하다는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그딴 거 바라지 말고 인형이나 가지고 놀아.”
빠직!
인형이 자신들을 언급한 것을 간파한 세피아와 케이론의 이마 언저리에 핏대 같은 것이 솟았다.
싸아아아.
렌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
칼은 이해가 되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이라면, 모욕을 받았다며 기분 나빠할 법도 한데.
저 반응은 마치 절대 마주하면 안 되는 공포와 마주친 느낌이었다.
그때 렌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칼에게 경고를 날렸다.
“도망가!!”
갑자기 웬 도망?
다급한 렌의 반응에 칼은 크게 당황했고.
쇄액!!
칼의 귓가와 몸 곳곳에 화살과 빙괴가 스쳐 지나갔다.
***
탑의 20층, 엘더리아.
탑에 널려 있는 초목은 모두 이곳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그만큼 엘더리아는 초목이 풍성한 곳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엘더리아에서 갑자기 난입한 한 침략자 때문이었다.
그의 정체는 키메라의 왕, 라폰.
그는 어떤 이유로 인해 이곳에 66년 동안 모습을 감춘 채, 엘프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엘더리아를 수호하고 지켜온 원주민, 엘프.
그들은 단 한 명의 침략자를 쫓아내기 위해 고군분투 싸워 왔다.
형국만 보면 1대 다수의 싸움으로 전력으로는 엘프 진영이 압도적인 우위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엘프는 지금 라폰에게 유린되어 그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66년간의 싸움으로 엘더리아는 점차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숲은 라폰의 독에 의해 점차 죽음의 땅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고 엘프들의 터전 중 가장 신성하다고 일컬어지는 세계수 지대는 이미 라폰의 영역이 되었다.
아름드리 뻗은 세계수의 줄기는 독에 중독돼 언제 괴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것은 탑에 있어서도 결코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없었다.
세계수는 탑의 균형을 유지해 주고 있는 필수요소 중 하나.
만약 세계수가 이대로 괴사를 맞이한다면, 탑의 마나는 혼탁하게 변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관리자가 나서지 않는가?
그것은 이 침략자가 무력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지성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계수 지대에 위치한 신전.
이곳은 엘프들의 터전을 쓸어버리고 침략자가 세운 거주지였다.
그 신전의 안으로 관리자 복장을 갖춰 입은 고블린, 리발이 들어섰다.
저벅, 저벅.
웅장한 규모와 맞지 않게 신전에는 의외로 아무것도 없었다.
은연중 비춰오는 빛을 통해 벽에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주인의 신장은 6m.
우드득.
그림자는 죽은 엘프들의 시체를 입에 털어 넣고선 씹었다.
주륵.
턱에는 엘프들의 피가 한가득 흘러내렸다.
꿀꺽.
그로테스크한 그 광경에 리발은 고인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필리프 4세랑 달리 이야기도 통하지 않을 것 같군.’
존재 자체만으로도 흉포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존재.
이미 포식을 통한 결합을 통해 어마어마한 진화를 이뤘음에도 끝없이 진화를 갈구하는 미지의 생물.
몬스터로 취급되지만 이미 시스템을 통해 플로어 마스터로 인정받은 자.
그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키메라의 왕, 라폰이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간이 단단히 부은 고블린이군.”
라폰은 그림자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꿈틀, 꿈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신의 피부가 꿈틀거리며 형체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편한 대화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몸을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근육을 압축시킨다.
외형을 변화시킨다.
거듭해서 변형을 추구한 결과, 3미터 크기의 키메라로 변모했다.
콰앙!
바닥을 강타하며 엄청난 위력을 보이는 꼬리.
드래곤과 흡사한 안면 위로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안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레게머리처럼 보이는 머리칼 속에는 간간이 뱀의 비늘 같은 것이 엿보였다.
꿀꺽!
흉흉한 존재감에 리발은 목구멍에 고인 침을 삼켜 넘겼다.
본능적으로 깨닫고 만 것이다.
이 존재와 어울릴 수 있는 생물은 이 세상에 결단코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라폰은 리발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용건으로 온 거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게 됐습니다.”
저벅, 저벅.
라폰은 의자에 앉은 뒤, 입을 뗐다.
“상당히 겁을 집어먹었구나.”
흠칫!
속내를 들켰는지 리발은 어깨를 들썩였다.
머천트일 때, 드래곤이나 위협적인 하이랭커와 거래를 숱하게 해 왔지만.
라폰은 규격 외의 존재다.
무슨 일을 벌일지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라폰은 긴장하고 있는 리발을 비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고블린 따위를 시식해도 별 의미가 없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뱀께서 보내신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흐음, 그럼 무슨 용무로 온 거지?”
“뱀께서 교란자를 찾고 있는 건 알고 있으실 겁니다.”
라폰은 리자드맨과 흡사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상당히 분노하셨더군. 하지만 20층에 갇혀 있는 내가 찾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만약, 그 교란자가 이 20층에 당도한다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리발은 음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교란자로 추정되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당도할 예정이고요.”
“호오, 구태여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뭐지?”
“얼마 전, 교란자가 필리프 4세의 랭킹을 강탈했습니다. 그것을 당신께서 다시 회수하셨으면 합니다.”
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십존.
이중에 상위 다섯 명은 신들과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며…….
하위 다섯 명은 그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중 ‘똬리를 튼 뱀’ 클랜에 소속된 십존은 세 명.
3위, 아크로드, 플레어
6위, 웨폰 마스터, 레브리카
남은 한 명은 전 랭킹 10위, 철혈의 군주 필리프 4세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랭킹 10위는 교란자에게 강탈당했다.
본래라면 교란자는 번외로 취급돼 10위의 자리는 다른 플레이어가 차지했어야 됐다.
“흐음.”
라폰은 달갑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내가 고작 10위밖에 안 되는 건가?”
플레이어로서 활동이 제약돼 랭킹에 오르지 못할 뿐이지.
그는 그보다 더 높은 순위를 노릴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 점은 리발 역시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십존에 들어선다면, 당신은 뱀에게 더 많은 힘을 하사받을 겁니다.”
탑에서 랭킹은 곧 지배력과 관계가 깊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랭킹에 오르려는 것은 랭킹과 주어지는 보상과 혜택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 세계 진출을 노리는 뱀은 탑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랭커를 수중에 두고 싶어 했다.
“그것 참 흥미롭군.”
리발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라폰은 거대한 양손을 모으며 머릿속에 한 존재를 떠올렸다.
그것은 19층에서 자신의 분신을 순식간에 전멸시킨 건우였다.
분신인 바인 스네이크를 통해 그는 일찌감치 건우의 냄새와 목소리를 파악했다.
‘그 녀석이 교란자인가?’
아마 정확한 정보는 리발이 가르쳐줄 테지만.
라폰은 이미 마음속으로 건우가 교란자임을 확신했다.
정황이나 시기를 보았을 때, 누구보다도 교란자에 가까운 이는 건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밌겠어. 크크크크크크. 제안을 받아들이지. 뱀께 충성의 증거로 녀석의 목을 갖다 바치겠다.”
씨익.
라폰의 확답에 리발은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뱀께서 진심으로 기뻐할 겁니다.
“대신, 너는 내가 저 왕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겠어.”
“와, 왕관이라는 것은…….”
“바로 저거다.”
라폰은 제단에 놓인 한 아티팩트를 굵직하고 날카로운 손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미스릴로 빗어 낸 월계관으로 그 표면에 반사되는 빛은 너무나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파르르르.
라폰의 앞에서 자제하기는 했지만, 리발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뺏겨 월계관에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라폰이 말했다.
“아름답지?”
꿀꺽.
“탑에서 봤던 어떤 왕관보다 가장 아름답습니다. 저건 대체 뭡니까?”
히죽.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라폰은 잇몸을 드러내며 설명해 주었다.
“저건, 엘프 로드에게 주어지는 왕관, 월계관, 엘더리아다. 한때, 가장 증오했지만 이제는 오기와 그동안 들인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써야겠어.”
225.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