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어설픈 촌극이었나.’
아델하이트의 눈을 주시하며 럼은 즉각 입을 뗐다.
“물론 당신과 소피를 데리러 오기 위해 온 거야.”
파르르르.
그의 선포에 아델하이트의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기쁨과 환희의 감정이 언뜻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냉철한 눈빛으로 말했다.
“소피는 걱정하지 마. 내가 지킬 테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
울컥!
럼은 발끈하며 말했다.
“난 절대 포기 못해! 이렇게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고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그 순간.
아델하이트는 무척이나 씁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은 그 벽을 절대 넘을 수 없어.”
사내의 굳센 다짐을 그녀는 무참히 꺾었다.
“힘든 일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절레절레.
럼의 진심 어린 호소에도 그녀를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왜 당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줄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라와 줘.”
뚜벅뚜벅.
럼은 힘없이 걷는 그녀를 그대로 따라갔다.
잠시 후.
아델하이트의 발걸음은 외곽에 있는 어느 테라스에 멈췄다.
해안의 풍경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경치 좋은 전망대였다.
쏴아아아.
굽이굽이 치는 파도는 해안의 절벽을 철썩 치며 기분 좋은 리듬을 자아냈다.
“…….”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럼은 다리를 떨었다.
가장 먼저 그의 오감을 정복한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전함이었다.
대다수의 전함이 바다에 머물러 있었지만.
우우우웅.
그중 일부는 하늘을 횡단하다 바다를 철썩 때리며 착지하고 있었다.
럼은 어렵지 않게 전함의 정체를 간파했다.
“……비마나(vimana)”
비마나, 그것은 하늘을 횡단할 수 있는 신의 수레라고 일컬어지며.
바다와 하늘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는 이동수단이었다.
그 전설의 전함이 바다와 하늘을 까마득히 메우는 풍경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아델하이트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전함 5027척, 해병 1억 2천. 육군 3억, 장착된 대형화기는 60만. 아바마마가 오랜 세월을 들여 만든 무적함대야. 어떤 층에 도달해도 저거에 대항할 수단은 없어. 필드는 그저 저 막강한 화력에 불바다가 되겠지.”
“…….”
탑의 모든 재화를 끌어들여 만들었으니, 그 스케일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델하이트는 구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데려간다는 것은 죽음 그 이상을 보겠다는 거랑 다름없어. 난 당신이 그런 꼴을 겪는 게 싫어.”
“아, 아델. 나는…….”
럼은 떨리는 마음으로 겨우 입을 뗐으나.
아델하이트는 곧장 그의 말을 끊으며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사흘 뒤, 이 무적함대는 40계층의 플로어 마스터와 격돌을 펼칠 거야. 나는 혹여 모를 교섭을 위한 대상으로 소피와 같이 끌려갈 예정이고.”
“그, 그게 무슨?!”
충격이 꽤 심했는지 럼은 대화를 잇지 못했다.
여기서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가는 도피한 층에는 지옥이 펼쳐진다.
꺼지지 않는 불바다.
애꿎은 탑의 주민들이 시체가 되어 산처럼 쌓일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아델하이트는 그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평범한 아내를 만나 잘 살았을 텐데.”
그녀는 흐느끼듯 럼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파르르 떨었다.
럼은 힘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원래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팔은 앙상한 가지 같았으며……
목부터 시작해 팔 곳곳에 멍 같은 흔적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었다.
스윽.
그때, 눈시울이 적셔 있는 아델하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구속하게 만드는 눈빛.
럼은 무덤덤하게 서 있었고 아델하이트는 그대로 그를 껴안아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기쁨과 재회.
그리고 다시 이별해야 된다는 의미가 담긴 키스.
그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을 마친 건지, 아델하이트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난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할 거야.”
잊지 말라는 듯 던진 한마디.
“……미안, 그냥 잊어 줘.”
그러고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며 말을 남겼다.
“돌아가. 당신은 절대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그녀는 다시 한번 경계를 지으며 럼의 몸을 툭 밀며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럼은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
연회의 끝을 알리는 듯 연주는 무척이나 잠잠해졌다.
라페아에게서 뜻밖의 말을 들은 건우는 투기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건들거린 그 눈빛보다 지금 눈빛이 훨씬 마음에 드는데.”
라페아는 검지로 건우의 턱 끝을 꼭 누르며 말했다.
“어떻게 정체를 알았냐고 묻고 싶은 눈치인 것 같은데, 사실 순전히 감이야. 난 교란자를 만나러 왔거든. 근데, 생각보다 금방 만났어. 아무래도 이건 인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하하하, 농담이 참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네요.”
“후후, 아직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되는 때인가.”
그러나 그녀는 이미 건우가 교란자라고 단정 지은 듯 보였다.
“목적은 모르겠지만, 필리프와 싸울 생각이지? 그렇다면, 나는 관전자로 그저 관망만 할 거야.”
홰액!
건우는 거칠게 그녀의 등을 붙들며 회전을 했다.
거친 춤동작이지만, 라페아는 의연하게 건우의 리드에 맞추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패배한다면, 난 널 그대로 잊어버리겠지만, 승리한다면, 내 장난감으로 삼아주지.”
-휘말리지 마라.
세이비어는 건우가 성급한 행동을 할까 만류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듯…….
씨익.
건우의 입꼬리는 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음에 보죠. 라페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발설 직후.
거짓말처럼 궁정음악단이 연주를 끝냈다.
라페아는 건우의 손을 놓으며 무척이나 상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후, 그 약속 꼭 지켜야 된다.”
홰액.
건우는 대답 대신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전신에 가시가 빼곡히 박힌 것처럼 불쾌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
정체가 발각된 뒤.
건우는 하급 불의 정령, 셀라임을 소환해 그 인도에 따라 럼을 찾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던 도중.
건우는 아직도 오한이 풀리지 않는 듯 세이비어에게 물었다.
‘그 여자 상당히 위험해요.’
손을 마주 잡을 때,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건우는 전신이 절로 떨렸다.
서로 전력을 펼친다면 어떤 승부가 될지 묘한 기대감이 일렁이기도 했고.
뜻밖의 강자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돼 불안하기도 했다.
이에 세이비어는 어처구니가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곳저곳 들쑤시며 나 누구게? 라고 홍보한 놈이 누군데? 그러게 왜 깝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들키지 않더라도 네가 하는 짓은 ‘나 좀 죽여주세요.’였어.
세이비어는 건우의 무모한 도발에 잔뜩 삐쳐 있는 상태였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웃기고 있네.
세이비어는 믿기지 않는 듯 단호박처럼 건우의 말을 잘랐다.
‘뭐 여러모로 감정이 북받친 것도 있었죠.’
필리프 4세와 마주쳤을 때.
건우는 격분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왜 이런 녀석을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되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탐색이 길어지자, 건우는 버럭 화를 냈다.
화륵.
때마침 수색이 끝났는지 셀라임은 그 자리에서 불꽃과 함께 증발했고.
구석진 벽 쪽에서 웅크리고 있는 럼을 찾았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면서 뭐 이렇게 고민 많은 표정을 짓고 있어?”
“아, 오셨습니까? 아까는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럼은 건우를 돌아보며 힘없이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건우의 눈빛은 절로 표독스러워졌다.
“조금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 그만. 하하하”
“…….”
그 표정이 거슬린다는 듯 건우가 눈썹을 꿈틀거린 순간.
타닷!
어느새 성내에서 군인들이 군화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라오스 황자마마를 친 그 무뢰한들은 어디 있는 거지?”
“권세가들이란.”
건우는 쯧 이를 차며 럼의 목깃을 붙든 뒤, 벽에 뛰어들었다.
[팬텀케이프 전용스킬, 영체화를 시전했습니다.]
스윽.
유령처럼 벽을 통과하던 중.
“흐윽.”
뒤에서 들리는 한 남자의 통곡소리에 건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얼어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시간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야심한 저녁.
타앗.
건우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불꽃은 양초를 태우며 방 안을 잠잠히 밝혔다.
건우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침대에 앉아 있었고.
럼은 테이블에 손을 얹으며 아델하이트와 겪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비마나로 이루어진 무적함대라.”
그 이야기는 건우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와 닿았다.
탑에 분명히 존재할 거라 당연시 여겼지만.
그것이 무려 5000척이라니.
‘이그너스 층계 전력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아. 그 정도 전력이면 7성급 몬스터도 제압할 수 있어.’
필리프 4세.
직접 그와 조우했을 때는 안하무인에 내로남불.
전쟁에 미친 미친광이, 그리고 무능한 군주라고 내심 여겨 왔다.
물론 여기서 대다수는 맞는 말이지만.
딱 한 가지 정정해야 했다.
그는 백성의 평안에 관심이 없을 뿐.
전쟁과 군략에 있어서는 희대의 천재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인내심을 갖고 그만한 규모의 전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두려운 거냐?
‘두렵다기보다는…….’
세이비어에게 대답을 하려는 찰나.
건우는 럼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정말 그게 끝이야? 뭐 감추는 건 없고.”
“……네.”
“그래서 포기할 거야?”
“…….”
생각이 많았던 건지, 럼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멱살을 쥐고 주먹을 휘둘렀을 법했지만.
건우는 묵묵히 있었다.
건우 자신에게조차 황당무게한 일인데.
일개 농부 출신이자, 튜토리얼을 막 클리어하고 온 럼에게는 차원 자체가 다른 문제였다.
“……기운 내요. 아저씨.”
렌은 의기소침한 그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렌 자신도 그 위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남은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죠.”
럼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고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른 새벽.
타악, 타악.
케이론과 힘껏 박투수련을 하는 렌은 손톱과 발톱을 단단히 세웠다.
콰앙!
그리고 강력한 각력으로 케이론의 가슴팍을 찍어 누르려고 했다.
스스스.
물론 일격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케이론은 잔상처럼 사라졌다.
“뭐?!”
말도 안 되는 빠르기에 렌은 눈을 부릅떴고.
등 뒤에서 나타난 케이론은 있는 힘껏 일권을 내질렀다.
“……?!”
렌은 재빨리 양손을 교차해 가드했지만.
콰앙!
권압을 못 이기고 저만치 날아가 벽과 충돌했다.
“크헉!”
폐부 깊숙이 헛숨을 들이켠 렌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다그닥.
케이론은 그런 렌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고, 고맙습니다.”
렌은 케이론의 손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스스스스.
그와 동시에 케이론은 인비저블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수련이 끝났을 때면, 매번 벌이는 케이론의 버릇이었다.
땀을 흘려 한껏 기분이 상쾌해진 렌은 자신의 뺨을 두 번 정도 두들기며 럼의 방문 앞에 섰다.
“후우. 나라도 기운을 내야지.”
콰앙!
그리고 노크 없이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히며 힘껏 외쳤다.
“아저씨. 그만 일어나세요. 오늘은 아저씨가 아침 하는 날이잖아요.”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째서?’
렌은 동요한 눈빛으로 방을 살폈다.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방, 깔끔하게 개인 이불.
방 안에 한가득 있었던 짐은 휑하니 사라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08.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