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쿠구구구구.
리안테 북부 요새로 거대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늘의 실체는 엄청난 크기의 얼음 덩어리들.
그 수는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았다.
탁.
그 광경에 병사들은 무기 등을 떨어뜨리며 절망에 빠졌다.
“뭐, 뭐야? 저건”
“스, 스케일이 다르잖아.”
“정보랑 전혀 달라! 저 녀석 저런 소환수까지 부리고. 완전 하이랭커잖아!”
병사들은 어느새 전의를 상실한 채, 넋을 놓으며 건우를 쳐다봤다.
건우는 고개를 추켜세우며 그들에게 말했다.
“전쟁을 원한다며? 의기 충만한 채로 죽어라. 미친놈들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선언과 함께 얼음 덩어리가 일제히 요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일부는 무참하게 짓눌려 머리와 뼈 등이 으깨졌다.
푸욱!
또 일부는 달아나 다려다가 그대로 얼음으로 된 창에 가슴이 꽂혀 죽음을 맞이했다.
“저리 나와!”
“비켜! 제발!”
혼비백산, 도망치기에는 서로의 존재가 방해가 됐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몸을 밀고 젖히며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저벅, 저벅.
건우는 세피아와 나란히 걸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완전 당나라 병사네.”
“죽어!”
바로 그 순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건우를 급습하는 이도 있었지만.
푸욱! 쩌저저적!
세피아가 글라체스를 꺼내 들어 그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혹독한 한기에 병사는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건우는 세피아가 손에 쥐고 있는 글라체스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것은 제약의 법칙으로 인해 소실되었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손에는 새로운 글라체스가 쥐어져 있었다.
‘……하긴 글라체스 자체가 세피아의 빙정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새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때 세이비어가 건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걸로 세 개 층계는 복원이 됐구나. 시련계곡을 복원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의 말에 건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포메트는 5성급이어서 4성급인 녀석들에 비해서 복원하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려요.”
-흐음. 경위야 어찌 됐든 결국 네 말대로 됐구나.
탑에 진입하기 전.
건우는 보스들을 5성급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마정석을 확보했지만.
탑에 진입하는 그 순간조차도 바포메트를 제하고 등급상승을 하지 않았다.
이는 혹시나 싶은 우려스런 상황 때문이었는데.
결과는 역시 건우의 예상대로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깽판 쳐도 되겠냐? 완전 교란자라고 소문내고 다니는 꼴인데.
“박살 내버리면 되지 않겠어요?”
싱긋.
미소와 함께 건우는 세피아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세피아. 여기 있는 요새 사령관은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척!
주인의 말에 세피아는 예를 갖추며 성내로 진입했다.
***
스륵.
케이론이 시전한 인비저블 마법이 풀리며 렌과 럼이 성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
그들은 건우가 보여 준 경악스런 풍경에 넋을 잃은 상태였다.
“아, 아저씨. 원래 2층에 등반하는 플레이어가 이렇게 강한 거예요?”
렌의 질문에 럼은 인상을 홱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완전 규격 외잖아.”
럼은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을 꼭 꼬집었다.
“자, 어쨌든 정신 차리고 사람들을 구하자고.”
둘의 임무는 노예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구출이었다.
하지만 발을 떼기 전.
렌은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잇었다.
“왜 그러냐? 늑대 꼬맹이.”
“……만약, 이 사람들을 구출한다고 해도 필리프 4세가 끝까지 괴롭힌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
렌의 말에 공감이 됐는지 럼은 잠시 답을 주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인질의 구출은 임시방편일 수도 있다.
1층부터 10층까지 필리프 4세는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구출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후 이들의 행복은 보장받을 수 없다.
타악.
그때 묵묵히 있던 케이론이 우악스럽게 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와아아아악! 아파요! 스승님!”
렌은 즉각 케이론의 손아귀에 벗어나며 그를 지켜봤다.
케이론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렌을 응시할 뿐이다.
말은 못하지만 생각이 전해진 걸까?
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만 신경 쓸게요.”
“어떻게 알아듣는 거야?”
럼은 그들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렌은 케이론의 눈치를 힐끔 보다가 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맞다 보면, 눈치밖에 못 보거든요.”
“……그, 그러냐? 그래서 뭐 더 뭐라고 전하는 바는 없든.”
슬쩍.
럼은 케이론을 슬쩍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께서는…….”
건우가 보면 실로 어이가 없는 풍경이었지만, 케이론이 막강한 강자다 보니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건우 형을 믿으라는데요.”
렌은 그대로 피식 웃으며 수용소를 향해 발을 박찼다.
***
리안테 북부 요새에 쏟아진 급습.
하룻밤 만에 전력이 순식간에 반 토막, 아니 아예 산산이 와해가 됐다.
빠득!
사령관, 이자벨라는 이를 갈며 분개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그동안 온전히 지켜온 전력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망가질 줄은 생각이라도 해 봤으랴.
하지만 더 이상 고심은 필요 없다.
타닥.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훗날을 도모하며 도주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피난처로 발길을 향하는 순간.
“…….”
그녀는 말문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나쟈들도 숨을 집어삼켰다.
“왜 이렇게 늦어?”
미리 확보해 두었던 피난처로에는 이미 건우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이 어마어마한 재난을 일으킨 의문의 소환수도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길…….”
이자벨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뒷걸음질 쳤다.
건우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냥 우연이야. 우연. 피난로를 만들 거면 지상보다는 지하일 테니까. 피난로는 여러 개 만들어 두기는 했지만 뭐랄까? 내 감으로는 여기가 제일 적당할 것 같았거든.”
이자벨라는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며 말했다.
“네놈이 상대하고 있는 탑을 지배하고 있는 플로어 마스터, 필리프 4세다. 이 뒤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건우는 씨익 웃으며 앞머리를 이마 뒤로 넘기며 말했다.
“감당할 수 있지. 왜냐하면, 난 교란자니까.”
오싹!
그 한마디에 이자벨라를 비롯해 나쟈들의 표정이 경직됐다.
지금 뭐라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의심해 보기까지 했다.
탑을 떠들썩하게 만든 최강자 중 한 명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진입한단 말인가.
이자벨라는 즉시 나쟈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폐하에게 이 사실을 고해라!”
쇄액!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쟈들이 신출귀몰한 속도로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다.
하지만.
쩌저저저적.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지면에 심어 둔 세피아의 빙결마법이 나쟈들 전체를 얼음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
그 순간, 이자벨라는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고.
건우는 나른하게 말을 남겼다.
“나는 너희 같은 녀석들을 잘 알아. 자기들이 잘나서 남을 핍박해도 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근데 예나 지금이나 어디서나 통용되는 한 가지 진실을 알려 줄까?”
“뭐, 뭐냐? 가까이 오지 마!”
이자벨라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야 한다.
어떻게든 이 괴물한테 도망가서 필리프 4세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전쟁을 벌여야 한다.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어. 그리고 너에게는 가장 처참한 죽음을 안겨 주지.”
저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피아가 이자벨라에게 향했다.
고혹한 자태,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빙결을 품은 여왕.
“오지 마!”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자벨라는 투기를 불어넣어 핏빛 도끼를 휘둘렀다.
서걱!
세피아는 이자벨라의 팔을 통째로 도려냈다.
타앙!
핏빛 도끼와 그녀의 팔은 지면에 널브러졌고.
“꺄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고통에 이자벨라는 비명을 내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과연 괜히 무장이 아닌 건지, 그녀는 이내 고통을 참아 내며 건우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교란자. 네놈! 반드시 폐하께서 네놈을 단두대에 앉혀 목을 잘라낼 것이다. 네놈의 몸통은 갈가리 찢어 돼지 사료를 만들어 낼 것이며 또한 네놈의 머리는 쇠꼬챙이에 꽂아 절망의 탑에 걸어 주마. 하하하하하”
스윽.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이자벨라의 턱을 세피아는 조용히 들어 올렸다.
“…….”
파르르르.
이자벨라는 웃음을 멈추고 그대로 경직됐다.
죽음이 찾아온다.
단지 터치를 한 것뿐인데.
피부의 혈관이 제멋대로 수축, 이완을 반복하며 창백해졌다.
뒤이어 급작스런 피로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견디기 어려워 눈꺼풀이 반쯤 감기며 졸음이 찾아오려는 찰나.
“우웁!”
세피아는 그대로 이자벨라와 입을 포갰다.
움찔!
“?!!”
갑작스런 키스에 당황한 이자벨라는 곧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순간임을 인지했다.
쩌저저적.
얼어붙고 있다.
체내의 피가 얼어붙으며 폐부까지 급격히 도달해 팽창시킨다.
콰직! 콰직!
얼어붙은 피는 혈관을 부수고 피부를 찢고 나왔다.
“우웁!!”
이자벨라는 양팔로 세피아를 떨어뜨리기 위해 지진부진 애썼으나.
콰직! 콰직!
얼어붙은 핏줄기가 등을 꿰뚫고 나왔다.
피부는 금방 부스러져 지면에 흩뿌려졌다.
“……?!”
우악스런 광경에 이자벨라는 절규하고 싶었지만 성대마저 얼어붙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무뚝뚝한 세피아의 눈빛에 그녀는 절망과 공포가 한층 더 깊어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내 숨을 거둔 그녀의 몸에는 싸늘한 성에가 뒤덮여 있었다.
콰앙!
세피아는 별 망설임 없이 이자벨라의 동상을 걷어차며 완전히 부숴 버렸다.
“…….”
-…….
그 광경에 건우와 세이비어는 말문을 잃었다.
-미녀랑 키스할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전 트라우마 생길 것 같은데요.”
건우는 으스스 몸을 떨다가 곧 이자벨라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집어 들었다.
<솔 레굴루스의 워프스톤>
-등급: 유니크
-설명: 필리프 4세의 혈족에게만 허용된 10층까지 단숨에 도달할 수 있는 워프스톤.
-내구도 4/15
씨익.
“지름길이 하나 생겼는데.”
건우는 시크하게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어 권능을 발휘했다.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워프스톤에 소유권 부여를 시전했습니다.]
[소유권 부여에 성공했습니다.]
우웅.
혈족이란 제한은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해제된 것이나 마찬가지.
-제법 만족스런 성과구나.
“피날레를 장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뭐가 또 있어?
세이비어의 질문에 건우는 이자벨라가 떨어뜨린 또 하나의 아티팩트의 정보창을 열람하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
탑의 10층.
휘황찬란한 권좌에서 철혈의 군주는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체스판이 놓여 있었고 그는 연신 말을 움직이고 있었다.
흑의 진영에는 군사가 가득 들어차 있지만.
백의 진영은 킹 하나뿐.
누가 봐도 열세는 백의 진영이 확실하지만, 철혈의 군주, 필리프 4세의 견해는 달랐다.
“너무 강해서 짜증이 치미는군. 20계층에서는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그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아주 막강한 적, 한 명을 두고 군단 전체를 데리고 출격해야 될 정도의 전쟁을.
1층부터 9층까지 재화를 끌어모아 가까스로 전력을 마련했지만.
상위층을 정복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뭐 실패하면 이길 때까지 하면 되지.”
고민하는 것이 귀찮은지 그는 곧 개의치 않기로 했다.
우웅.
바로 그 순간, 방에 있던 수정구에 빛이 방출됐다.
알현의 장.
이는 필리프 4세가 언제든지 전쟁 중에서 통신할 수 있게끔 만들어 둔 마법도구였다.
통신상대는 장군급 이상으로 수정구에 반사된 문양이 리안테 북부 요새임을 알아본 필리프 4세는 즉각 통신에 응했다.
“무슨 일이지? 이자벨라. 짐은 무척이나 바쁘다만.”
-공교롭게도 나는 이자벨라가 아니라서 말이지.
“……?!”
수정구에 비친 이는 이자벨라가 아닌 한 남자였다.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가슴 속에 싸한 느낌이 든 필리프 4세는 살기가 감도는 눈동자로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 거다. 벌레 새끼가 나하고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는 게냐?”
“…….”
갑작스런 그의 엄포에 겁을 먹은 걸까?
상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지막이 한마디를 남겼다.
“……진짜 미친놈이었네.”
“……?!”
노골적인 발언에 필리프 4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203.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