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헌터시험 (8)
시간은 어언 20시.
이상진은 졸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리자드맨의 도 72자루, 마정석 A등급 하나에 B급 이하 5221개, 고블린 단도 33자루, 슬라임 핵, 30개, 다이어 울프 어금니, 102개. 그리고 어디 보자.”
계산기를 두들기던 이상진이 숫자를 까먹고 멍하니 있었다.
미하노프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와? 23억이잖아.”
“엄청 많네요.”
생전 접하기도 어려운 어마어마한 금액에 건우는 혀를 내둘렀다.
미하노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대부분 마정석 값이지. 네가 움직이는 중소형 길드다.”
“대형 길드는 얼마나 버는데요?”
“그 녀석들은 조 단위야.”
건우는 숫자를 헤아리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조는 상상이 잘 안되는 금액이네요.”
“그나저나 왜 네가 가져온 아이템은 질이 이렇게 좋은 거야? 대형 길드도 이렇게까지 관리하지는 못하는데.”
“영업 비밀입니다.”
미하노프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리겠습니다.”
웃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서 이상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설마 또 오는 건 아니겠지.’
***
월요일 이른 아침.
건우는 모처럼 컴퓨터를 뒤적거리며 게이트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르륵.
마우스 휠을 굴리는 속도를 보면 제대로 정보를 읽기는 하는 걸까? 싶었지만, 완전기억능력은 이럴 때 참 요긴하게 쓰였다.
한 번 훑어본 정보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생긴 건지, 세이비어의 음성이 반지에서 흘러나왔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냐? 더 자지 않고?
세이비어의 물음에 건우는 피식 웃었다.
“길드에서 지금 헌터를 소집하고 있거든요.”
-아니 왜? 지들끼리 하면 되잖아.
“대형 길드는 그게 가능하지만 중소형 길드는 공략멤버를 다 채울 수 없거든요. 그래서 용역을 뽑는 거죠.”
-근데 너 라이선스 발급 안 됐는데, 게이트로 가도 되는 거냐?
“임시 면허증 발급받았으니까 걱정 없어요.”
-그래서 또 짐꾼으로 가게.
건우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는 짐꾼 겸 힐러로 참여할 거예요. 그러면 너도 나도 데려가려고 하겠죠.”
-뭣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냐?
“너무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잖아요. 그리고 폐기 직전인 무기를 제가 도로 주워서 훨씬 비싸게 팔 수 있으니 더 좋죠.”
-점점 보면 간사해지는 것 같아.
“그리고 몇 가지 더 실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거든요.”
건우는 피식 웃다가 한 모집 광고를 보고 마우스 휠을 굴리는 것을 멈췄다.
“명성 길드? 처음 보는데?”
건우는 이 바닥에서 나름 4년을 굴러먹었다.
신생 길드는 물론이고 폐업한 길드도 많이 봤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명성 길드의 공문 내용은 다소 특이했다.
[도봉구에 생성된 D급 게이트를 공략하려고 합니다. E급 이하 짐꾼 다섯 분 적극 구합니다. 일당 칠백만 원입니다.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일당이 너무 높은데?”
더러운 이야기지만 짐꾼 일당은 최대치가 삼백으로 정해지는 게 업계 룰이었다.
만약 이 암묵적인 룰을 무시하다가는 다른 길드의 공격에 박살나기도 했다.
헌데, 그 룰을 무시하고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제시하다니.
건우는 자연히 기분이 찝찝했다.
수상해서 검색을 해봤지만 명성 길드에 관한 정보는 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협회에서 인증을 받은 정상적인 길드로 확인됐다.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까 참석해볼까?”
지원을 마치자 문 건너편에서 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왜?”
“이번 달 집세 언제 낼 거냐고 묻던데.”
“아 벌써 납기일이구나. 오늘 낼 거야. 걱정하지 마.”
건우는 외투를 걸치며 중얼거렸다.
“……집이나 알아볼까?”
-그래 이런 좁은 데 말고 이그너스 영지만큼 큰 걸로 집을 바꾸자구나.
“너무 요란해서 살기 힘들걸요.”
이그너스 영지의 규모를 떠올린 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둘이 살기에 그 크기는 너무 큰 데다, 대한민국에는 그런 집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
“속이 후련하구먼.”
은행에서 나온 건우는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오랜 시간 동안 고충을 겪게 한 빚을 전부 탕감했기 때문이다.
집세는 세 달 치를 미리 냈으며 이사 갈 집도 사람을 통해 알아보고 있었다.
모든 게 승승장구 풀리고 있으니, 이제는 도약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Thank you.”
건우의 눈에 특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눈앞에는 금발의 벽안을 갖춘 말끔한 외국인이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건우가 그의 인상을 보고 든 생각은 하나였다.
‘잘 생겼네.’
현재, 그는 길거리를 누비는 헌터들만 골라 무기를 팔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5200만 원 밖에 안 된다고요?”
“Of course!”
헌터들은 그가 내민 무기의 가격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가 내민 아이템을 살펴보던 건우 역시 헌터들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인슬레이프?!’
6성 던전에서 겨우 볼 법한 희귀한 검이었다.
주로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고스트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그 효과가 탁월해서, 시세는 무려 1억이었다.
-구미가 당기면 한 번 사보지 그러냐?
“흐음. 글쎄요.”
평소라면 당연히 샀을 법했지만 건우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인슬레이프>
왜냐하면, 눈앞에 보이는 시스템창이 저 검이 다인슬레이프라고 명시는 해주는데, 정작 상세정보는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올게요.”
헌터는 다급하게 돈을 구하러 갔다.
이 기회를 틈타 건우는 외국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거 진짜 다인슬레이프에요?”
“Hmm?”
아무래도 말귀를 못 알아들은 듯 보였다.
건우는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거 진짜 다인슬레이프 맞냐고요?”
“Yes! Are you interested?(네. 혹시 관심 있습니까?)”
건우는 다인슬레이프 외형을 살펴봤다.
평소 이미지를 통해서 봤던 터라 그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완전 똑같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혹시 판매자 자격은 갖추고 있나요?”
“오오! 한쿡말 서툴러요. 천천히 말해주세요.”
답답했지만 건우는 차분히 말했다.
“판매자 자격 가지고 있냐고요?”
“Our company is equipped with sellers for weapons as well as other items.(저희 회사는 무기 외 다른 아이템 등에 대해서 판매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
-너 뭔 말인지 알아뒀냐?
유창한 영어에 건우는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외국인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건우에게 명함을 건넸다.
“Nice to meet you. My name is Robert Barto(만나서 반갑습니다. 로베르토 바토라고 합니다.)”
명함을 보고 확인하던 건우는 이내 결단했다.
“그 무기 제가 살게요.”
건우는 지갑에서 5200만원을 수표로 빼들었다.
그러자, 로베르토는 눈을 반짝이며 돈을 받아들었다.
“Oh Thank you, nice guy.”
로베르토는 즉각 건우에게 무기를 건네주었다.
“Good luck.”
거래를 마친 로베르토는 연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건우는 그 자리에서 다인슬레이프를 연신 쥐며 휘둘러 봤다.
겉으로 봤을 때나 휘둘렀을 때는 그렇게 큰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다인슬레이프>
하지만 어째서 시스템창이 이렇게 간략하게 뜨는지는 의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이비어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
“뭘요?”
-너도 지금 니가 호구 잡혔다는 거 알고 있지?
건우가 지그시 눈매를 좁혔다.
“역시 가짜인가요?”
-가짜지. 이 바보야.
“하아, 어쩐지 찜찜하더니만. 싸게 샀으니까 내심 대박이다고 생각했었는데.”
건우는 이마를 매만지며 자책했다.
제일 큰 실책은 유창한 영어실력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
두 번째는 완전기억능력만 믿다가 방심하고 말았다.
우웅!
다인슬레이프를 쥐고 있는 건우의 손은 순식간에 금빛 마력으로 뒤덮였다.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카치치치칭!
스킬을 시전하기가 무섭게, 다인슬레이프의 외형이 유리처럼 깨지더니 건우의 손에는 일반 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
건우는 어이가 없어 침묵을 지키자, 세이비어가 설명을 해주었다.
-블러핑이다. 대장장이들 중에서는 진품과 유사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거든. 손재주가 어지간히 좋아야 할 텐데.
“어디 보자.”
건우는 거래를 할 때, 슬쩍 훔친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살펴보았다.
「박춘삼
9XXXX……」
신분증에 나와 있는 로베르토의 진짜 이름은 순수 한국어 이름 되시겠다.
“하아”
건우는 크게 한숨을 쉬다가 눈을 번뜩 떴다.
“뒤졌어.”
그는 발끝에 헤이스트를 전개한 다음 단숨에 땅을 박찼다.
후우우웅!
“우와 저 사람 헌터인가 봐.”
“멋있다.”
“간지 폭풍이네.”
단숨에 빌딩 벽을 딛고 달리는 건우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을 표했다.
***
“크하하하하! 멍청한 자식!”
로베르토, 아니 박춘삼은 유쾌하게 웃으며 달렸다.
운수대통이라고 했던가.
그는 방금 전에는 엄청난 호구를 만나 5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행적을 지우고 잠적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 역시 걱정은 없었다.
블러핑 스킬이 시전 된 아이템은 열흘 동안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닷!
단숨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 박춘삼이 히죽 웃었다.
쇄액!
‘어?’
바로 그 순간, 춘삼은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그늘이 드리워지는 걸까?
의문은 눈앞에 한 남자가 몸을 날려 착지하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콰앙!
일순간 골목에 쌓여있던 물건들이 무너져 내리며 먼지가 풍겼다.
털썩!
깜짝 놀란 박춘삼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다, 당신은?”
먼지가 사그라질 때에는 건우가 여유롭게 춘삼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건우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문을 텄다.
“춘삼아. 지갑 떨어뜨리고 가서 주우러 왔는데, 왜 그렇게 놀래? 찔리는 게 있나봐. 영어로 말 안 하는 거 보니까.”
춘삼은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미, 미스터, 한쿡말 너무 어려워요. 춴춴히.”
초지일관 뻔뻔한 그 모습에 건우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돈 필요 없다. 너 다 가져.”
“What?”
“대신 1원에 한 대씩만 맞자. 한 방은 이정도면 되겠냐?”
건우는 바닥에 떨어진 벽돌을 허공에 던진 뒤, 주먹을 내질렀다.
퍼석!
벽돌은 돌가루를 뿌리며 산산조각이 났다.
앞으로 저런 펀치를 1원에 한 대, 즉 5200만대 맞으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박춘삼은 급히 태도를 바꿨다.
“혀, 형님 무, 문명인답게 말로 하시죠.”
“한국말 아주 잘하네.”
“토종 한국인입니다!”
“뭔 소리야? 딱 봐도 외국산이잖아. 또 거짓말을 쳐?”
“…….”
춘삼은 잠깐 말문을 잃었다.
그러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진심이 통한 걸까?
“그래. 때리는 건 너무 야만적이긴 하지.”
건우가 조용히 다가와 몸을 일으켜주었다.
‘사, 살았나?’
안심하려는 찰나, 건우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외국 많이 갔다 왔냐?”
“하, 한국에서만 쭉 머물렀습니다.”
“그럼 미국 여행 한 번 시켜줄까?”
“네?”
[에어 웨이브를 시전했습니다.]
후우우우웅!
춘삼은 바람을 타고 13미터 높이까지 날아올랐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추락 직전에 건우가 역중력 마법을 걸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춘삼은 흰자위만 남긴 채, 덜덜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건우는 빙그레 웃었다.
“왜 이래? 섭섭하게. 다음은 홍콩 가보자고.”
“아, 안 돼!!!”
춘삼은 기겁했지만…….
후우우웅!
이미 그는 에어웨이브에 휘말려 아까보다 더 높은 고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