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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주비는 절벽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주비!”
시현이 달려가자 주비가 시현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시현을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이내 그 감정을 지워버렸다.
“또 보빗이야?!”
주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주비라면 자기가 다친 것을 자랑삼아 말하면서 주군을 위해 싸우다가 얻은 영광의 상처라는 둥, 내가 불쌍하지 않냐는 둥, 그런 말들을 해댔을 텐데 그날의 주비는 다른 때와 달랐다.
“주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시현이 주비를 일으키며 말했다.
평소와 다른 주비의 모습에, 정말로 심각한 일이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비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건가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친 주비를 보는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일단 상처를 치료하자. 엄마가 고쳐 주실 수 있을……. 아. 괴수의 상처에는 안 통하려나? 치유 차크라가?”
시현이 말하는 동안 주비는 겨우 일어서기는 했지만 걷지 못했다.
시현은 피로 물들어 있는 셔츠 위로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덮어 주었다.
“주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친 걸 떠나서 네 표정이 왜 이러는 거냐고. 이런 상처야 금방 회복되는 거잖아. 아니야?”
시현이 주비에게 말하며 주비를 안아들었다.
“일단은 내려가서 어른들한테 보여야겠어.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시는 분이 계실 거야.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해도 돼.”
그렇게 말을 하면 입이 근질거려서 주비가 말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주비.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시현은 주비를 데리고 걷다말고 주비가 나왔을 절벽을 바라보았다.
주비가 그곳에서 나왔다면 자기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무영. 주비를 엄마한테 데려다 줘.”
시현이 말하자 주비가 와락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안돼요.”
주비는 시현이 절벽 안의 공간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
주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비의 그런 행동에 놀아날 생각이 없었던 시현이 절벽으로 향하자 무영이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야. 부탁해. 시현이만 보낼 수는 없어.”
그 말을 마쳤을 때 효재와 제이는 이미 절벽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주비도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결국 두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비명을 삼키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살을 뚫고 나온 뼈를 보고 시아는 숨을 훅 들이키고 주비를 안아들었다.
절벽으로 들어간 시현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주비가 막는 것으로 봐서 그곳에서 아직도 수많은 괴수들이 남아서 싸우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그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만큼은 알 수가 있었다.
그곳은 맵과 비슷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맵의 이곳 저곳에 이상한 돌출이 있었다.
“뭐하는 곳이지? 근데 이건……. 주비가 흘린 핀가?”
무영이 한 곳에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핏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저기에 다른 흔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주비만이 알 것 같았다.
그 시간에 주비는 원치 않게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임정은 오히려 주비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레이카가 자신의 차크라를 주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비는 한사코 레이카를 거부했다.
놔둔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주비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었다.
걸어다닐 수 있게 해 놔야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것이 거기에 있던 헌터들의 생각이었다.
지우는 내키지 않았지만 주비에게, 혹시 자신의 차크라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주비는 제대로 대답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지우의 말을 무시했다.
누군가 제 몸에 다른 차크라를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주군의 차크라여야 할 거라고 주비는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으로 그쳤고 그것을 입 밖에 소리를 내서 말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구는 주비를 보고 점점 속이 터졌다.
그냥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헌터들은 주비가 일으킨 짓을 알고 있었다.
보빗만큼 큰 세력을 모은 것은 아니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력의 상당부분을 보빗의 기습으로 잃은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비는 괴수의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괴수였다.
시현이 아니라 주비가 보빗의 자리를 노린다고 하더라도 주비를 지지할 괴수들이 상당할 거라는 것을 주비 역시 모르지 않았다.
헌터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키라 때문이었다.
아키라의 안에 봉인되어 있던 다른 괴수들이 주비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주비가 나타나기만 하면 아키라의 안에 있던 괴수들이 벌벌 떨면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 되는 바람에 그 영향이 아키라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라쿠는 더욱 심했다. 아키라는 문제만 잔뜩 가지고 있는 라쿠를 당장 퇴출시켜 버리려고 했지만 라쿠가 새롭게 습득한 능력, 즉 아키라의 차크라 회오리를 스스로 열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라쿠를 내치려고 해도 라쿠는 계속해서 아키라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키라는 주비가 살기를 거두지 않으면 주비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도 없었는데 그 순간의 주비는 도저히 자신의 기세를 정돈할 정신이 없었다.
결국 헌터들은 주비를 혼자 남겨두고 시현이 들어갔다는 절벽을 향했다.
그들이 언덕으로 올라갔을 때는 시현과 어린 헌터들이 전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뭐가 있었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한 사람은 없었다.
빈 맵이었고 여기저기가 피투성이었고 맵이 찌그러져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어린 헌터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우가 야로슬라프를 데리고 절벽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이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완벽하게 비어있는 어두운 동굴이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언덕에서 내려가려고 했을 때 시아가 조용히 효재에게 다가갔다.
효재의 옷자락을 가만히 잡은 시아를 효재가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효재에게 시아가 조용히 해 달라고 당부를 하고 효재의 손을 끌었다.
효재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시아를 따라갔다.
“오빠가 나하고 같이 들어가 봐 줬으면 해서요. 저 안에.”
“아무 것도 없는데 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가서, 거기가 오빠가 처음에 봤던 곳이랑 같은지 그것만 확인해 주면 돼요.”
시아의 말에 효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절벽안으로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안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도 않았다.
효재는 그 공간이 왜 또 바뀌어 있는 건지 알지는 못했지만 자기들이 들어왔을 때 본 곳이 맞다고 시아에게 알려주었다. 효재가 말하지 않아도 시아도 알 수 있었다. 피가 고인 웅덩이와 형태가 어그러진 맵의 벽들을 보면서 시아도 그럴 거라고 추측했다.
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돌을 주워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는 효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아는 그곳을 나왔다.
시아는 자신에게도 헌터로서의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전투 능력은 특출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것들을 조금씩은 할 줄 알았지만 전에 자기가 제이에게 가르쳤던 것들을 지금은 제이가 그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시아가 제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는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시아가 뭘 안다고 가르쳤다는 거냐고 시아를 놀리곤 했다. 악의없이 놀리는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아는 조급해졌다.
시현의 곁에 있는 헌터들은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고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기도 어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아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은 해민이었다.
해민은 시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해민은 현신 헌터 아카데미와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연결 고리가 없었지만 시아를 보기 위해서 그곳에 일부러 찾아왔다. 그리고 시아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시아는, 공간의 기억을 새긴 물체를 만져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 역시 부단한 노력으로 숙련돼야 했지만 시아는 해민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바로 그 능력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시아의 손에 돌이 들려 있었다.
시아는 의문 투성이인 표정을 하고 있는 효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이 들려주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