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320화 (320/331)

0320 / 0331 ----------------------------------------------

13부. 괴수의 왕

***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꼬리에 달고 배가 들어왔을 때 시현은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시현은 갑자기 일어선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현의 곁에는 주비가 있었다.

주비는 시현이 줬던 옷을 입고 있었고 보빗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가 새롭게 세력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 일이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시현은 그 얘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귓등으로만 듣고 있었다. 제발 다른 데로 가라고 해도, 그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주비는 자기가 할 말만 주구장창 해댔다.

고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섬으로 들어오는 배를 보고 있는데 갑판 위로 한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현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원이었다.

시현은 나는 듯이 달려내려갔다.

정원이 배에서 내렸다.

시현은 내려가면서 소리쳤다.

정원이 돌아왔다고.

그 말을 들었을 텐데 사람들은 반응이 느렸다.

그러나 시현은 그게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시현은 정원을 향해 달려갔고 격하게 정원을 안았다.

정원이 품 안에서 움찔하면서 어색해 하는 것 같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미안해지기도 했다.

어색한 분위기는 곧장 전염이 되었고 시현도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에 있었던 거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콜로니에서는. 어떻게 돌아왔어?”

시현은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어댈 기세였다.

그러나 정원은 나가는 배에 다시 오르려는 것처럼 서둘렀다.

시현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껏 돌아왔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정원은 다시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시현은 정원이 제 입술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정…원아…….”

시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원을 기다렸던 마음이 너무 간절했기에 그 의심을 오래 남겨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안 될 것 같아.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겁이나. 미안해. 시현씨 잘못은 아니야. 단지. 겁이나. 나는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현씨가 가야 하는 길. 행복해질 수 있게 빌어줘. 나도 그럴게.”

시현은 정원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현이 정원의 손을 잡았지만 정원은 가만히 제 손을 빼냈다.

배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정원은 서둘러 배에 올랐다.

시현은 정원이 떠나는 것을, 움직이지도 않고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한참만에 돌아서면서 시현은 그래도 다행인 거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돌아왔으니까.

된 거라고.

그 모습을 언덕 위에서 주비가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가 자신을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왔을 때 주비는 제이가 하려는 말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건방진 헌터들이 겁도 없이 자기한테 말을 걸어오고 다가오고 하는데도 주군의 동료라는 것 때문에 죽일 수도 없어서 점점 열이 뻗치는 중이었는데 제이는 한 술을 더 떴다.

“정원이 언니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거야, 살아있는 거야?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거야? 네가 시현이한테 그렇게 말했다며. 시현이가 괴수의 왕이 되면 그 힘으로 정원이 언니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며? 그거 사실이야? 너 괜히 시현이 마음을 흔들려고 헛수작 부린 거 아니야?”

제이는 아예 맡겨놓은 물건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고 하자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이는 쉽게 포기할 기색이 아니었다. 꼭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 제이의 사정이지 주비는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이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사라진 콜로니랑 같이 사라져버린 헌터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너는 알잖아.”

제이가 다시 물었다.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같은 말을 몇 번이라도 할 기세였다.

“죽었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공간이 사라지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계속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겠어?”

주비가 말했다.

“죽었…다고?”

제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시현이한테는…….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 거 아니야?”

주비는 그 후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제이는 주비를 떠보면서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지만 주비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일이 벌어졌다.

정원이 돌아온 것이다.

꽤 그럴싸했다고 주비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안시현의 심장은 한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심장이라고,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라면 잊을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제이는 주비를 떠나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게 그 뜻인줄은 알지 못했는데.

제이가 정원이 되어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차크라로 제 얼굴이나 바꿀 수 있는 줄 알았더니 제이는 어느새 목소리까지 교묘하게 흉내내고 어쩌면 라이어 버드만큼이나 정교하게 사람을 속였다.

주비는 한숨을 쉬었다.

주비 역시, 시현이 그렇게 해서 정원을 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제 그의 마음 속에서 죄책감이 조금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주비의 마음 속에 생겨났다.

***

시현이 어떤 마음으로 버티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현은, 말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다가가면 웃음을 지어 줬고 제 친구들이 말을 걸면 그 말을 조용히 들어주기도 했다.

제 얘기를 하기도 했다.

단지 정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무영은 싱글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고 말했고 시현은 고맙다고 말했다. 남의 상처를 잘도 후벼파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무영을 발로 찬 다음에 한 말이었다.

“평화로운 시절을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긴. 우리도 그런 시대를 안 산 건 아니었는데. 괴수들이 늪 아래에 처박혀 있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평화로웠잖아. 그렇지?”

무영이 말했다.

“그랬지. 그때는 그거야말로 큰일인 줄 알았는데.”

시현이 말했다.

고양이 섬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셸터가 더 지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오픈된 늪에서 튀어나오는 괴수를 막을 헌터들은 점점 부족해졌고 괴수들은 지치지도 않고 고양이 섬으로 향했지만 일단 고양이 섬에 오기만 하면 그곳은 괴수의 무덤이 되었다.

괴수가 지나가는 골목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재산과 생명을 잃었다.

클랜 A에게 책임을 묻는 거야말로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그때는 사람들도 깨달았다.

그것은 구름이나 바람에게 화를 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고양이 섬으로 들어와서 클랜 A의 보호를 받는 게 훨씬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고양이 섬으로 계속해서 들어왔다.

러프 스톤으로 얻는 이익과 바디 펌과 익스트림 헌터, 두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일본 정부의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자기 나라의 영토를 점유하며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이익을 얻고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데 이럴 때 숟가락을 꽂지 않는 건 바보같은 짓일 거라고 내부의 의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중이었다.

일본은 폐허가 된 자기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데 클랜 A와 바디 펌, 익스트림 헌터가 벌어들이는 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야무지게 한 것 같았지만 그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장 아키라가 나섰다.

아키라는 여전히 카르마 클랜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카르마 클랜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섬을 무상으로 영구 임대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클랜 A는 다시 짐을 싸들고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자 일본 정부는 제안을 철회했다.

그동안 섬의 주인 노릇을 해 왔던 고양이들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더니 이제 와서 착하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들한테 괜히 지랄들이라고 당장 강현이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렇게 무식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강현 뿐이라면서 다른 클랜원들도 비슷한 마음들을 품었다.

일본 정부는, 자기들이 일단 말을 해 보면 혹시 그래줄 뜻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지 정말로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면서 곧바로 저자세를 취하고 나왔다.

고양이 섬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본에 들어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수익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빗은 지치지 않고 괴수들을 보냈고 고양이 섬에 눌러앉은 헌터들은 괴수들을 환영했다.

좋은 의미의 환영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온 사람은 없었지만 어느날 문득 계산해보니 고양이 섬에서 보낸 시간이 7년이었다.

보빗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헌터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주비를 통해 들었다.

보빗이 땅을 파고들어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흔적이 몇 차례 발견됐던 것이다.

언젠가는 보빗과의 정면 승부가 불가피할 거라는 것을 헌터들도 깨달았다.

시현이 괴수의 왕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제 시현이 괴수의 왕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존재는 딱 하나 뿐인 것 같았다.

말할 것도 없이 주비였다.

어느날. 주비가 시현에게 물었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나야말로. 주비.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된 것 같지 않아? 내가 괴수의 왕이 되는 일은 없어. 늪이 더 생겨나고 콜로니가 생겨나고 거기에서 괴수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게 나한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알았잖아.”

그래도 주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주군을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주군을 이미 봤는데 다른 이를 왕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요.”

“보빗이랑은 왜 그렇게 사이가 틀어진 건데?”

묻기는 했지만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런 조그만 섬에 갇혀서 사는 건 주군에게 어울리는 삶이 아닙니다. 제발 주군의 삶을 찾으세요."

그럴 때는 무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안가의 모래가 일순간 벽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고 시현은 고개를 저으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 짓이군. 나는 구경이나 가야겠다.”

시현이 몸을 날려 사라지자 주비는 뚤레뚤레 아래로 내려갔다.

야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주비는 야나에게 다가갔다.

야나가 어떤 처지라는 것은 주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야나가 주비의 눈에 한심하게 보였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헌터에게 공략당하고 헌터의 차크라를 주입 받아서 헌터들을 태우고 늪이며 콜로니를 돌아다니면서 괴수들을 공략하도록 돕는 괴수라니.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존재였고 천박했고 더러워 보였다.

주비는 자기가 야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야나 역시 주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건방진 것이 제 몸에 손만 대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잔뜩 벼르는 중이었다.

둘 간에 한동안 대치가 이루어졌다.

“흥!”

주비가 돌아서자 그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야나가 주비를 향해 돌격했다.

쓰러뜨린 것에서 멈춘 것도 아니고 주비를 깔아버린 채 그 위를 지나갔다.

주비가 괴수가 아니었다면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의미한 짓이었을 것이다.

주비는 벌떡 일어나서 야나를 노려보았다.

세기의 대결이 펼쳐지려는 찰나였다.

주비가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제 실력을 드러내려는 순간 광풍처럼 시현이 달려왔다.

시현은 주비의 두 팔을 뒤에서 결박한 채 야나를 바라보았다.

야나의 몸에 상한 곳이 없는지 눈으로 열심히 스캔을 하는 중이었다.

야나는 주비를 한 번 더 깔아버리려다가 시현이 나타나는 바람에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와이퍼까지 흔들어대면서 자기가 제대로 열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어필하고 있었다.

“주비. 네가 주군, 주군 해서 이번에는 너를 도와준 거지만 다음에도 내가 이럴 거라고 기대하지 마. 다음에 또 야나를 건들면 그때는 정말. 나도 가만히 안 있는다.”

시현의 말에 주비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여러 말을 할 것도 없이, 옷에 타이어 자국까지 나 있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이건 보통 서운한 게 아니었다.

주비는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서러운 표정으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씩씩대더니 절벽으로 사라져버리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야나는 자기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확신이 없는 듯이, 가끔 시현이 혼자 앉아있는 해변으로 와서 문을 열어 시현을 툭툭 건들었다.

“잘 한 거야. 내가 괴수의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그건 진짜 멍청한 소리고 말도 안 되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야나?”

헤드라이트가 반짝였다.

고개를 끄덕일 일이 있으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고개를 저을 일이 있으면 와이퍼를 저으면 되겠다고 시현이 말한 이후로 야나는 그렇게 제 생각을 표시하고 있었다.

“야나.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것처럼 괴수랑 인간들이 공존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와이퍼가 아주 아주 천천히 쭈우우욱 움직였다.

'저어어어얼대로 없을 걸?' 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면서 시현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야나는 자기가 시현을 웃겼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네 문짝을 전부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방정을 떨었다.

멀리에서 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야나는 제 지붕에 올라가서 보라고 성화였다.

그럴 것도 없었다.

갑판에서 팔이 떨어져나갈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사람은 분명히 시아였다.

“헐. 이시아다. 땅꼬마가 어느새? 맞지, 야나? 시아 맞지?”

야나는 그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제가 맡고 싶어서 이익헌에게 달려갔고 시현은 시아와 똑같이 팔이 떨어져나가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야나의 경적 소리가 섬에 가득 울려퍼졌다.

누가 저 미친 야나를 어떻게든 해 보라고 구시렁거리면서 사람들이 나왔을 때는 이미 배가 도착한 후였다.

“세상에. 저게 누구야? 시아 아니야?”

임정이 소리쳤다.

“그 어리기만 했던 시아가? 벌써 저렇게 컸다고?”

태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볼 때만큼, 흘러간 시간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아짐 딸이 저렇게 크는 동안 우리는 뭐하고 있었던 거냐?”

미하일이 레오니드와 야로슬라프의 사이에서 양팔을 두 사람의 어깨에 올린 채로 말했다.

한 사람이 왔을 뿐이었는데 섬에는 활기가 넘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