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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아키라가 없었다면 날아다니는 괴수를 상대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에게는 아키라가 있었다.
날개의 퀄리티 면에서는 아키라의 것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바닥에서 도약을 해서 올라가 조류 괴수의 주둥아리를 잡아 바닥으로 끌어내려 오는데 필요한 것은 날개의 퀄리티가 아니라 결단력과 스피드였다.
괴수는 저를 향해 날아오는 헌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제 몸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쳐지는 것을 경험했다.
아키라에 의해서 끌어내려진 괴수는 수십년간 방치된 폐가를 뚫고 지나온 듯, 온 몸에 거미줄을 둘러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엉킨 실 같은 것이 괴수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날개가 달려있다뿐이지 실제로는 조류보다 양서류나 어류쪽의 특징을 가진 괴수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 괴수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바다를 건너온 것으로 날개의 쓸모는 다 했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어차피 날아올라봐야 다시 아키라에게 굴욕적으로 내동댕이쳐질 거라고 생각했는지 괴수는 더이상 날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나 둘씩 해안가로 모여든 클랜원들이 괴수를 향해 공격을 준비했다.
“거참. 엄청 심란하게 생겼다.”
이익헌이 말했다.
“프로그 피쉬 같이 생겼네요.”
미하일이 말했다.
“그래? 나는 미하일같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익헌이 말하자 미하일이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조심들 하자고요. 저 실타래 같은 걸로 공격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지연은 여러 방향에서 괴수의 사진을 찍어 관련된 데이터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개체를 공략한 경험이 있는 헌터가 정보를 올려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괴수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뭐가 어떻더라도 상관은 없잖아요.”
강현이 괴수를 향해 날아오르며 말했다.
“조심해, 김강현!”
태인이 강현의 앞으로 달려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은사가 그대로 강현의 몸을 갈랐을 것이다.
괴수의 몸에 거미줄처럼 덮여있던 가느다란 은사는 태인 때문에 강현을 놓치고 강현의 갑옷 끝자락만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 가느다란 은사에 갑옷이 베어졌다.
태인은 강현에게 사납게 소리를 쳤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강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크게 당황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은사의 성질을 이해하고 방패를 챙겨들었다.
“저 줄이 전부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굉장히 까다롭겠는데?”
서규태가 말했다.
괴수는, 이번에는 훨씬 더 길게 줄을 늘어 뜨렸다.
은사는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지만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의 길이의 실이 날아오는 거라면 움직임을 눈으로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됐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희들. 할 수 있겠어?”
임정이 효재와 무영에게 물었다.
신입 헌터들은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괴수는 한꺼번에 여러 겹의 은사를 날렸다.
헌터들은 이제 그것을 막아내기에 바빴고 괴수에게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그때 효재가 제이와 무영에게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이 효재에게 다가갔다.
날아오는 은사를 피해서 잔뜩 엎드린 채였다.
“제이야. 나무를 세워줄 수 있겠어? 사람 크기로. 잠깐 동안이라도 돼. 무영이 너는 나무에 독을 바를 수 있어?”
하라면 해야지 왜 그러냐고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작전에서 자기가 소외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멍 때리다가 실수를 하는 일이 거듭되는 바람에 독자적인 포지션을 믿고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들이 은사에 당하지 않도록 애들을 지켜줘.”
효재가 시현에게 말하자 시현은 저한테도 할 일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두 녀석을 엄호했다.
제이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눈 여겨 보고 그대로 달려가서 단 번에 조각을 냈다.
효재가 요구하는 것이 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효재가 만들어내는 환상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나아가서, 이제는 원래 있던 것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지금 효재가 제이에게 원하는 것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나무라는 것을 이해하고 제이는 빠르게 움직였다.
무영은 아직 의구심이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었다.
효재가 저에게 원한 것은, 피부에 닿으면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독인 것 같은데 은사는 괴수의 신체 일부도 아닌데 은사에 독이 닿게 해서 뭘 하려는 건가 했다.
그러면서도 무영은 제이가 쪼개서 세워 놓은 나무에 독을 뿜어댔다.
나무가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땅에 때려박아주는 것은 시현의 몫이었다.
“길무영. 끝났으면 말해.”
효재가 소리쳤다.
클랜원들도 어느새 신입 헌터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다 됐어!”
무영이 소리쳤다.
“모두들 잠깐 피해주세요.”
효재가 말했다.
클랜원들은 어려운 부탁도 아니어서 일제히 몸을 숨겼다.
괴수는 갑자기 헌터들이 사라지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나타난 것인지, 보이지 않던 녀석들이 한 곳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괴수는 주저하지도 않고 그것들을 향해서 은사를 날렸다.
날리는 김에 인심좋게 푸짐하게 뒤집어 씌울 정도로 날려주었다.
한 곳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아예 그물을 뒤집어 씌우듯이 뒤덮어서 난도질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은사에 닿는 것이 이상했다.
괴수는 움찔하면서 은사를 거두어 들였다.
거두어 들인 은사는 처음의 상태대로 괴수의 몸에 둘러 씌워졌다.
거기에 무지막지한 독이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괴수는 알 수가 없었다.
괴수의 은사가 이제는 역으로 괴수를 공격했다.
은사가 닿은 부분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랜원들은 신입 헌터들에게 엄지를 올려주고 공략에 나섰다.
깡패같은 공격력을 가진 클랜원들이 나서서 연신 공격을 해대자 괴수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신입 헌터들도 마냥 놀고 있지는 않았고 거기에 자신들의 공격력을 보탰다.
사람들이 셸터에서 나왔고 이제 슬슬 정리가 돼 가는 레이드를 구경하다가 사체 수습을 위해서 다가왔다.
“이 은사는 꽤 쓸만하겠는데?”
이익헌은 일찍부터 들떠서 말했다.
이익헌은 사체 운반 헌터들에게 손이 베지 않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고 무리 속에 있던 채준형을 향해 다가가 은사로 어떤 무기를 만들어줄 건지 물었다.
클랜원들은 신입 헌터들을 칭찬해 주었다.
“너희들은 정말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다. 시현이 빼고는 정말 다들 대단했어.”
태인이 말하자 시현이 끙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효재는 많이 발전했구나. 무영이도 그렇고. 제이도 그렇고.”
서규태도 시현이를 특별히 따돌리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량에 발전을 보인 녀석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 칭찬을 하다보니 어떻게 시현이만 따돌리게 되는 결과가 발생해버렸다.
지우가 웃으면서 어린 헌터들의 어깨와 팔을 톡톡 두들겨 줬는데 시현은 그때도 저만 빠지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잽싸게 제 팔을 지우에게 내밀었다.
“저도 쳐주세요. 저도 열심히 했다고요.”
시현이 징징거리자 임정이 놀란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진짜? 설마. 그게 열심히 한 거라고? 장난하냐? 열심히 한 게 그거면 안 되는 거지. 그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인 거지.”
시현은 본전도 못 찾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녀석들은 칭찬을 받으면서도 좋은 기분을 그대로 누리지 못했다.
시현이 정원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계속 이런 식의 패턴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에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늪이나 콜로니와 함께 사라진 헌터가 어떻게 되는 건지,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알아내기 위해서 클랜 A는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가동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키 위도 역시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것에 대해서 취재를 하고 다녔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현만 빠진 채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임정이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정원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라도 이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모두가 그때부터 임정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시현은 모래바닥에 앉은 채 멀리있는 섬을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시력이었다.
시현은 제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소리도 들었다.
그게 레오니드의 발소리라는 것도 알았다.
시현이 고개를 들어 레오니드를 바라보자 레오니드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시현은 재빨리 일어서서 레오니드에게 인사했다.
“괜찮아. 앉아있어. 나도 같이 앉아도 되나?”
“당연하죠, 교수님.”
시현은 레오니드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요즘 유행처럼 퍼진, 안시현 위로하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윤해민 교수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내?”
레오니드가 물었다.
“네?아뇨.”
시현은 갑자기 그 이름을 듣게 된 것이 반갑지 않았다.
해민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질 않았다.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기 때문에 떠나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모든 이별의 원인이 자기 탓이었다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어서 웬만하면 해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정원이가 돌아오게 될지. 윤해민 교수한테 물어보는 건 어떨까?”
레오니드가 물었다.
“네?”
시현이 레오니드를 바라보았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면서 시현은 레오니드를 두고 일어섰다.
“교수님. 잠시만요. 정말로 그래야겠어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달려가는 시현을 보는 레오니드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레오니드는 해민이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었다.
시현에게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해민에게 물어봤던 것이다.
해민은 정원이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돌아오지만 시현을 떠날 거라는 말도 했다.
해민은 자기가 하는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프레딕터의 말을 믿는다고 했다.
레오니드는 해민이 프레딕터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그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이루어지겠지만 진실이 아닐 거라는 것을 레오니드는 알고 있었다.
시현은 해민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색한 인사말을 나눈 후에 정원에 대해서 물었다.
정원이 콜로니를 공략하러 갔다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고나서 시현은 정원이 돌아올 수 있을지 물었다.
해민은 레오니드에게 해 주었던 말을 해 주었다.
시현은 한층 기분이 좋아진 채로 몇 번이나 해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정원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있을 때보다는 정원이 돌아올 거라고 믿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훨씬 좋았다.
시현은 자기에게 해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해민이 그렇게 말해준 이상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가 들어왔다.
헬기가 뜨는 일도 많았다.
시현은 이제 섬으로 들어오는 배와 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괴수들이 공격을 해 왔고, 그럴 때마다 레이드를 해야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정원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현은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