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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사실. 피를 많이 흘렸어요.”
혹시라도 동정심을 살 수 있을까 해서 주비가 헛수작을 부렸지만 시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수는 공격을 당해도 금방 재생이 되는 줄 알았는데?”
“헌터에게 받은 공격이나 그렇죠.”
“괴수한테 당한 상처는 낫지 않는다는 건가?”
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녀석들은? 같이 있던 녀석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비에게도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주군께서는 그런 일에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그보다는 보빗이 건방지게 여기까지 쫓아왔을 때 보빗을 상대할 수 있을만큼 강해지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는 마음쓰지 않아."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있지만 저희를 걱정하고 계신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지쳐버려서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대로만 생각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이제 시현도 알만큼은 알았다.
"네가 정말로 나를 생각해준다면 나를 위해서 해 줄 일은 따로 있어. 정원이를 찾아줘. 정원이를 돌려주면 좋겠어. 나한테 돌려주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원이가 돌아올 수 있게 해 줘.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정원이가 미로에 갇혀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보빗은 언제라도 이 섬으로 찾아올 겁니다. 지금 보빗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 건 겁이 나서 그런 게 아니예요. 헌터들의 전력을 알아보려는 거죠."
주비는 시현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이 제가 할 소리만 했다.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는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이죠. 그런 걸 물으시다니 주군도 좀……. 아무튼. 지금의 주군은 보빗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한테도 아무 것도 아닌 걸요.”
“…….”
어째 주비가 하는 말에는 신용이 가지 않았지만 시현은 일단 주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군. 주군께서는 재생 능력을 가진 다른 생명체의 능력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비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레이더를 가동시켰다.
시현에게는 아직 그렇게 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주비에게는 그런 것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듯 보였다.
주비가 시현에게 다가와 시현의 눈을 감게 했다.
“있어요. 마침.”
시현은 주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녀석 중에 심해에 살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시현의 머릿속에 그 생명체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사냥을 당하고 몸이 찢겼지만 서서히 그 부분이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늪 아래에서 숱하게 봐 왔던 괴수들의 회복력과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괴수의 왕이라면 나도 이걸 기본적으로 할 수 있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시현이 물었다.
이로써 자기가 괴수의 왕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진 것이 아니냐는 투였다. 그러나 주비는 그런 말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늦게 배울 수도 있죠.”
주비가 시현의 눈에서 손을 뗐다.
말하자면 능력의 이식이 끝난 모양이었다.
"어때요? 기분이. 막 힘이 솟는 것 같은가요?"
주비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전혀."
"그래요?"
“그럼 나는 이제 무적인 건가?”
시현이 물었다.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숨결을 얼굴에 내뿜으면서 시현의 얼굴 앞에 있었지만 시현은 주비의 어떤 감동도 받지 못했다. 그림 속의 미녀를 보는 것만큼이나, 그것보다도 더 흥미가 없었다. 시현이 주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절대로 무적이 아니죠. 괴수가 무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별 것 아닌 거군.”
“아!”
주비가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주비의 레이더에 뭔가가 잡힌 듯했다.
“저게 있었네. 운이 좋은데요?”
시현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은 비대칭의 집게 다리를 가지고 있는 갑각류였다. 그 녀석은 한 쪽 집게 다리가 유난히 컸는데 지나가던 커다란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광선을 쏘아내고 있었다.
시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괴수도 아니고 실제로 그냥 바닷속에 저런 게 산다는 거냐고 묻자 주비는 이렇게 하나 하나 준비를 해 두면 되겠다고 말했다. 시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저기에서 나가는 열이 태양의 표면 온도랑 맞먹을 정도예요. 주군은 지속시간을 훨씬 더 길게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되는 건 아니지만 주군에게는 훈련하라는 말은 따로 필요가 없잖아요?”
“구워진 건가?”
주비는 대답할 틈이 없이 다시 시현의 눈을 가렸다.
어떤 능력을 가진 동물이 나타나서 그러는 건지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시현의 눈을 가렸다.
시현의 눈에 나타난 것은 주비가 말했다가 시현이 거절했던 그 곤충 같았다.
갈고리가 달린 생식기를 암컷의 등짝에 찔러넣고 있는 곤충의 모습이 보였다.
시현은 기겁을 하고서 주비의 손을 떼내려고 했고 주비는 그 능력이야말로 주군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시현의 눈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버둥대다 시현과 함께 넘어졌다.
“어쩌라고! 페니스에 저걸 달고 있으라고?! 당장 손 못 치워?”
“안 돼요. 주군은 주군의 개체를 번식시켜야 한다고요. 인간의 번식 능력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거예요!”
“나는 괴수의 왕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제발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좀 들어!”
주비는 시현의 위에 올라탄 채로 눈을 가렸다.
시현은 선뜩한 느낌을 받으면서 주비의 손을 잡았다.
“주비. 딴 생각 하지 마.”
주비의 다른 손이 시현의 버클을 풀고 있었다.
“안시현~~ 안시현~~”
시현을 부르는 무영의 목소리가 아래에서부터 들려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주비는 시현의 정액을 제 안에 받으려고 했던 시도는 포기했지만 시현의 번식 능력을 강화시키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곤충의 능력을 이식시키겠다는 계획을 끝까지 강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영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무영이 주비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영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해서 주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었다.
단지 피부가 매우 창백하고, 사회적인 규범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는 듯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만 다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무영은 무방비상태로 발기가 되어 버렸다.
무영은 그대로 돌아섰다.
어찌나 자극이 강했는지 몇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옷에 슬리는 그 접촉만으로 퐈이아 하고 무영은 고개를 숙였다.
주비는 무영 따위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고 만족스런 얼굴로 제 주군의 몸에서 내려왔다.
주비는 사실 그다지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녀석들이 보빗이 보내온 괴수들에게 두 조각, 세 조각이 나는 것을 보면서 도망쳐온 상태라서 언제 다시 또 제 세력을 구축할지 그 걱정만 해도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제 어린 주군을 보고 있자니 아직 가르칠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세력을 구축하는 건 조금 뒤로 미루고 주군을 가르치는 일에 당분간 전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군의 씨를 조금만 얻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자신과 주군의 알로.
‘알? 새끼인가?’
주비는 알을 낳아 키우는 개체였으니 둘이 수정을 해서 낳으면 그게 알이 될지 새끼가 될지 갑자기 그것도 궁금해졌다.
“저는 여기에 있을까봐요.”
주비가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는 듯이 말했다.
“미쳤어? 왜!”
시현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예요.”
적어도 그 선언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이라는 말 대신에 자신의 종을 가리키는 포필러스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그랬다. 안 그래도 시현은 주비를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는데 자기와 종 자체도 다른 개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시켜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현은 무영이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다가 제 셔츠를 벗어서 주비에게 뒤집어 씌워 주었다.
시현이 입던 티셔츠를 주비에게 입히자 아래는 효과적으로 가려지는데 가슴은 그렇질 못했다.
"으휴!"
시현은 어깨부분을 묶어 조그맣게 매듭을 지어서 가슴이 가려지게 해 놓고 무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길무영. 이게 주비야.”
‘이게 주비야?’
어디서도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주비는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주군이라서 말도 못하고 속만 태웠다.
“어. 어어.”
무영은 주비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려내려갔다.
무영을 멀뚱히 바라보는 시현을 놔두고 주비는 또 좋은 게 없나 해서 레이더망을 가동시키고 있었다.
그 날의 행운은 그것으로 끝이었는지 그 후로는 쓸만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 잊어버릴 뻔 했는데!”
주비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시현의 앞에서 돌아서더니 어깨를 보여주었다.
“화상 자국이 생긴 거 보여요? 클랜 마스터 때문이라고요. 주군의 아버지!”
“우리 아빠가? 아아. 네가 내 몸에서 안 나가려고 해서 아빠가 그런 거라고? 죽이려다가 만 건데 감사하다고나 해.”
“어떻게 이런 흉터를 내 놓을 수가 있는 거예요? 이건 몰상식하잖아요!”
“몰상식이 아니라. 남의 몸을 차지하고 들어앉는 행위에 대한 적절한 대처지.”
흉터는 꽤 넓은 범위에 번져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등판의 6분의 1정도가 그런 자국으로 채워져 있었다.
시현은 아빠의 실력에 새삼스럽게 놀라워했다.
차크라로 공격을 가해서 그런 흉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과, 그런 아빠가 함께 있어준다면 겁먹을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들었다.
“혹시 아까 그걸 시험삼아 해 보고 싶으면 저한테 해보셔도 돼요?”
“뭘?”
“생식기관의 갈고리요.”
“미친! 신경 쓰지마. 나는 그런 식으로 안 할 거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한테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정을 할 거라고. 나도 미쳤나보다. 이런 얘기를 왜 너한테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언제 개체를 불려요? 괴수가 최상위 포식자가 되더라도 각각의 종이 자기 종을 번식시키려고 다시 또 싸움이 날 텐데. 번식 속도에서 뒤처지면 따라잡을 수 없어요. 주군은 왕이니까 순수한 혈통이 계속 보존되고 대를 이어가겠지만.”
“그 얘기는 그만해. 그런 일은 없으니까.”
시현이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주비가 먼저 일어섰다.
시현도 주비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멀리에서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면서 1급 괴수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도망치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주비는 이미 절벽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절벽에 동굴이 난 것도 아닌데 사라질 공간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시현이 언덕 아래로 내려갔을 때 섬에서는 대이동이 시작됐다.
바디 펌과 익스트림 헌터의 직원들은 셀터로 향했다.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서 섬에 들어왔던 헌터들 역시 우선은 셸터로 안내되었다.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시현이 항구쪽으로 다 내려가기도 전에 괴수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