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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정원을 흉내내고 있던 여자의 본모습을 본 시현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흉내내듯이 형체도 흉내낼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가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단순히 얼굴 모양을 변할 수 있는 것을 떠나서 형체 전체, 종 자체를 바꾸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 언제부터? 내가 알았던 정원은 사라졌다는 건가? 어디로? 대체 어디로? 언제?’
시현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현을 돌아보던 개체는 완전히 몸을 돌려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과 다른 부분을 찾아내기도 어려웠다.
빛나는 나신을 드러내면서 수치감도 느끼지 않는 여자는 과감하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안시현!”
목소리가 시현을 끌어냈다.
“시현아. 일어나봐. 정신차려.”
효재의 목소리였다.
“안시현. 눈을 뜨고 나를 봐.”
효재의 목소리를 듣자, 그대로 하기만 하면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효재가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온통 어둡게 막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효재의 목소리가 시현의 두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시현을 바라보던 여자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갑자기 들려온 효재의 목소리를 그 존재가 불쾌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시현아. 눈 떠. 여기에 모두 있어. 우리가 전부.”
시현의 어깨와 팔에 손길이 와서 닿았다.
시현은 눈을 떴다.
눈 앞에 무영과 효재, 제이가 서 있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무영이 물었다.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 가 버린 것이 미안한 표정이었다.
“어.”
시현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대답을 했다.
“땀 좀 봐. 열은 뭐가 이렇게 높아? 병원에 갈래? 아니면 어머님한테 연락드릴까?”
효재가 말했지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선. 아니야. 그냥 놔둬.”
“무슨 일이야. 너 계속 왜 그러는데?”
무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불편하면 나는 나갈까?”
제이가 물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제이야. 혹시 너. 차크라로 얼굴을 바꾸는 거. 그걸 계속하면. 다른 개체로도 바뀔 수 있어?”
시현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건 생각을 못해봤는데? 그건 시아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아니면 미하일 교수님이나. 꼭 알아야 되는 거면 내가 지금 알아봐줄까?”
제이가 말했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런 게. 가능하겠어? 그건 애초에 차크라로 윤곽이랑 융기를 조종하는 정도의 기술인 건데.”
효재가 말했다.
“나. 그런 사람을 본 것 같아.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사람 모양이기는 했어. 그런데 사람 같지는 않았어.”
“무슨 말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천천히 말해봐. 어디에서 누굴 본 건데?”
효재가 물었다.
시현은 머뭇거렸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아빠를 불러줘. 아키라 아저씨도. 나.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아. 그리고 정원이……. 정원이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현이 말했다.
“누나를 보고 싶어? 안 그래도 누나가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보고 싶다고. 그런데 네가 이 모양이라서 안 될 것 같다고 했어. 지금 내려가면 있을지 모르는데 누나한테 올라오시라고 할까?”
무영이 물었다.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정원이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열이 많이 나는데.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어?”
무영이 말했다. 열이 나더니 시현이가 이제는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정원을 두고 그건 정원이 아니라고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무영아. 아빠를 불러줘. 엄마는 부르지 말고. 그리고 아키라 아저씨.”
시현이 말했다. 그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무영은 더 이상 시현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무영이 말했다.
시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다 했다는 듯이 힘없이 고개를 베개에 떨구었다.
무영은 효재를 바라보았고 효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무영은 곧바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스터님. 무영인데요. 시현이가 이상해요. 마스터님이랑 아키라 아저씨를 불러달라고 하고 정신을 잃었어요. 정원이 누나가 사라진 것 같다고 했고요. 정원이 누나를 불러주겠다고 했더니 그건 정원이 누나가 아니래요. 시현이가…….”
무영은 그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주저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미친 것 같아요.”
***
야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야나도 지금 일이 잘못 돼 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 같았다.
지우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아키라의 표정이 더 좋지 않았다.
“그때 말했어야 했습니다.”
아키라가 말했다.
“뭘요?”
지우가 물었다.
“콜로니를 공략하고 나왔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콜로니에서 나오기 전부터도. 그때 말을 했어야 했는데. 말을 해 봤자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시선을 받는 건 싫어서. 그래서 입을 다물었던 건데.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확신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아키라가 말했지만 지우는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키라는 콜로니를 공략했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콜로니에서 레이카를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정원을 살펴보러 갔었을 때 아키라는 정원을 보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시간이 충분치도 않았고 정원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곧 레이카에게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 의문은 아키라에게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콜로니에서 나왔을 때 아키라는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서 레이카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키라의 시선은 계속해서 정원을 향해 있었다.
레이카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로니에 들어가기 전에 봤을 때 정원은 도무지 고개를 가만히 놔두지를 못하고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놓치지 않고 보려고, 입을 움직이는 사람의 입술을 읽느라고 새끼 새처럼 쉬지 않고 고개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뭔 것 같아?”
아키라가 물었다.
레이카에게만 겨우 들릴 듯 말듯한 소리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이 아닌데요?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흡수하고 싶어요.”
레이카가 말했다.
아키라도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해 줄 거예요? 저 사람들한테?”
“해줘야지. 누구한테 해 줘야 되는 거지?”
“말을 해 줄 거면 서둘러야 되는 거 아니예요? 콜로니가 사라지면 그 애도 사라질 텐데. 같이.”
“그렇군.”
아키라가 지우를 향해 다가갈 때였다.
콜로니가 사라졌다.
아키라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레이카를 바라보았다.
레이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함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정원을 납치하고 정원을 바꿔치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콜로니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가 이렇게 빨라? 콜로니에는 규칙 같은 건 없다는 건가? 러프 스톤에 욕심내서 그 안에 있었다가는 다 사라졌겠네!”
야로슬라프가 소리쳤다.
헌터들은 자기들이 콜로니 안에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거고 지금은 콜로니도 공략이 됐고 엄청난 러프 스톤을 얻었으니 다 잘 된 일이라고 결론을 내 가고 있었다.
그때 시현의 옆에 서 있던 정원이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정원은 꿰뚫는 눈으로 아키라를 바라보더니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정원의 시선은 아키라를 지나가 이제 레이카를 향했다.
레이카는 다른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레이카가 갑자기 배를 손으로 만지면서 한 무더기의 무거운 숨을 뱉어냈다.
갑작스런 통증에 놀란 것 같았다.
레이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아키라가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알아들었기를 바란다는 표정으로 아키라를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아키라는 걸음을 멈췄다.
아키라를 바라보고 웃는 정원의 눈이 러프 스톤처럼 푸르게 빛났다.
콜로니는 이미 사라진 후였고, 레이카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아키라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카는 아키라가 지우와 얘기도 나누지 않고 돌아오자 말 하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
“이미 콜로니도 사라졌고.”
아키라가 말했다.
“그보다 아까 그건 뭐였어? 아팠어?”
아키라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통증이 와서 놀라기는 했는데.”
“몸 안에 있는 괴수가 움직인 거였어?”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동안 잘 통제되고 있었어요.”
아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 해야 돼요. 저 애랑 같이 있으면 시현이가 위험해질 거예요.”
레이카가 말했다.
“아니. 왕이 되게 하려는 거야. 그런 놈이 시현이를 해칠 리가 없어. 나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설득할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되는 동안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아키라가 말했다. 레이카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을 하더라도 레이카의 안에 있는 괴수를 전부 다 없애버린 다음에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카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괴수의 힘을 순순히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아서 그의 시름이 깊어졌다. 레이카는, 레이드에서 도움이 될 수 없는 자신은 아키라에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않을 거였다.
지우가 아키라를 찾았을 때 아키라는 드디어 문제가 생긴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우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은 채 시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했다.
아키라는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어느 것 하나도 결정을 내리기가 쉬운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최후에 이길 가능성이 누구에게 더 많은가.
그렇게 생각을 하자 지우에게 모든 것을 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이라는 아이. 콜로니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콜로니에서 사라졌어요. 콜로니에서 시현이랑 같이 나온 아이는 정원이가 아니었던 겁니다. 콜로니는 군데 군데가 어두웠죠. 입술을 보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읽는 정원이한테 그 환경이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보세요. 빛과 소리를 전부 뺏긴 채로 사라진 겁니다.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 차지한 거고요.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일 가능성이 더 크겠죠.”
아키라가 말했다.
지우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했다.
“정원이라는 여자애는 괴수 차크라를 가진 애가 아니죠?”
아키라가 물었다.
“특이한 차크라를 가지긴 했지만 괴수 차크라를 가진 애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왜…….”
지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맞을 겁니다. 그 애는 사라졌어요. 콜로니하고 함께요.”
아키라가 말했다. 지우가 믿어주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키라는 더이상 자신의 말을 증명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