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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그렇다고 욕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이익헌에게 넘겨준 사람이 아키라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레이카의 목숨 값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레이카도 더 이상은 쫑알거리지 않고 아키라의 손을 잡고 조용히 걸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레이카는 자기가 아키라에게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레이카뿐만이 아니었다. 아키라도 알지 못했다. 만약 레이카가 사라진다면 자신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런 면에서 이익헌의 공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클랜 마스터의 아들이라는 그 애. 어떻게 되는 걸까요?”
레이카가 물었다.
“나도 모르지.”
“아키라. 만약에 아키라가 그런 제안을 들었다면 어떨 것 같아요? 괴수의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말이예요. 당신은 괴수의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
“괴수의 왕이 돼서 뭐하게?”
아키라가 물었다.
정말로 모르겠어서 묻는 거였다.
“최상위 포식자의 왕인 거잖아요. 괴수의 왕은 괴수만의 왕인 게 아닌 거고. 인간도 다스리게 되는 거예요.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들을요. 상상해 보면 그것도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는 거라고요. 맨 위에 군림하는 한 사람.”
“레이카. 나는 카르마 클랜의 클랜 마스터였어. 괴수도 내 발 밑에 두었었고 헌터들도 부렸지. 하지만 나는 너 하나만을 남겨두고 전부 버렸어. 그게 나한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야.”
“치.”
“레이카. 혹시 그런 삶을 원해서 그러는 거야? 이렇게 다니는 게 싫어진 건가? 혹시 고달프거나 그래?”
아키라가 물었다.
“솔직히 가끔은 그래요. 하지만 아키라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알아요. 그리고 아키라 없이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는 아키라랑 같이 다니는 게 더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내가 카르마 클랜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 좋겠어?”
“솔직하게 말하라고요?”
“아니. 이미 뭐라고 할 생각인지 알겠다. 안 물어볼 거야.”
“그래도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레이카는 아키라의 팔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만 했을 뿐, 카르마 클랜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중독되는 것처럼 그 자리를 열망하겠지만 아키라와 레이카는 그 자리를 누려본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공허하고 고독하고 외로운지.
얼마나 허무하고 무료한지.
아키라는 알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조장과 헌터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존경은 전혀 감격적이지도, 고맙지도 않았다. 그는 카르마 클랜을 떠난 지금, 오히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을 느꼈다.
“괴수들이 그 애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만약에 자기들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말이예요. 그리고 지금의 왕도.”
레이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거야.”
“괴수의 왕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지금 나한테 물었어?”
“아니예요.”
레이카도 자기가 멍청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레이카는 아키라의 손에 깍지를 끼고 그의 손을 잡았고 아키라는 레이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클랜 A에 가기 전에 흡수하고 싶은 괴수가 있어.”
아키라가 말했다.
“그럼 어떤 걸 포기할 건데요?”
레이카가 물었다.
레이카와 아키라는 괴수의 차크라를 흡수해서 괴수의 힘을 마음껏 쓸 수가 있었다.
지우에게서 경고를 듣기는 했다. 그렇게 괴수의 차크라를 남용했다가는 차크라를 영구적으로 잃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키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클랜 A에 가서 지연이라는 여자의 감응기로 검사를 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키라가 생각하기로 지우가 말했던 것은 몸 안에 한 종류의 괴수 차크라만을 가지고 있는 헌터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많은 괴수를 몸 안에 흡수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아키라도 조심하려고 했다.
자기 몸 안에 둘 수 있는 괴수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는 했다. 처음에는 하나만을 두었지만 그 후에 하나를 더 두었다가 몇 년이 지나서 하나를 더 흡수했다.
몸에 불균형이 일어나는 것 같으면 클랜 A를 찾아갔다. 그들은 아키라가 원하는 괴수를 추출해 주었다.
퇴마의 능력을 가진 사제들처럼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키라는 좀 어리둥절해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능력을 쓰지도 못하고 오직 레이카와 아키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괴수를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거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긴 해.”
아키라가 말했다.
“클랜 A를 보면 나도 몇 개 정리 좀 해 달라고 해야지. 몇 개, 새로 흡수하고 싶은 괴수들이 있거든요.”
레이카가 말했다.
마치 옷장 정리를 하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이 몸 안에 들어있는 괴수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
우리의 길무영님은 독야청청 모태솔로의 길을 걸으셨다.
꼭 그 길을 걷겠다는 대단한 의지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음에 차는 여자들이 대시를 해 오지 않아서 어쩌는 수가 없었다.
누구는 오줌싸러 화장실에 가서도 괜찮은 여자를 주워오고, 누구는 못 생긴 애가 훈련의 폐해로 저절로 예뻐지는 일을 참아(?)가면서 잘들 연애질을 하고 있건만 무영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질 않았다.
시현이 잘 좀 해 보라고 하면서 너한테 사귀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무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한결 같았다.
“아, 몰라. 어디서 꼭 나같은 것들만 와서 나한테 들이대서 문제잖아.”
이제 제이는 ‘무영 같은 것’이라는 카테고리에서는 완전히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런 무영을 보고 클랜원들은 서규태 써전님과 비슷한 행보를 걷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실속없이 오랜 시간 썸만 타다가 늦게야 결실을 맺은 서규태를 아는 무영으로서는 그 말이 무서워서 어떻게든 저도 짝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떻게 걸리는 애들이 하나같이 폭탄들 뿐이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저도 마음을 접어버렸다.
그래도 한가하게 연애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때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영도 그렇게 태평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차크라 훈련을 속성으로 끝낼 때까지만 해도 그 과정이 가장 어려울 줄로 알았던 신입 헌터들은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자기들 입에서 쉽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입 헌터들이 5급 늪부터 차례대로 단계를 밟아 올라오게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우의 생각은 달랐다. 괴수들의 공격까지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입 헌터들은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1급 늪 투어에 나서게 되었다. 클랜 A가 함께 있었기에 죽을 일은 없었다. 게다가 임정이 언제나 함께 해 주었다.
클랜 A가 다 같이 뭉치면 난이도가 높지 않은 1급 늪은 두 시간 안에도 공략이 가능했다. 몇 년 사이에 괴수들의 체력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높아지지만 않았다면 지우 혼자서 몇 분만에 괴수를 공략할 수 있었겠지만 클랜 A에서 괴수 차크라를 가진 클랜원들이 등급을 올리는 것과 거의 비례하는 것처럼 괴수의 체력도 높아졌다. 그렇다고 해도 채준형의 활약으로 헌터들은 그 간극을 계속해서 극복해 오고 있었다. 괴수의 체력이 더 높아지냐, 공격증폭률이나 기본 공격력이 더 높아지냐 하는 싸움이 계속되는 양상이었다.
난이도가 높지 않다는 것은 괴수의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괴수의 체력은 낮은데도 쉽게 공격을 가할 수 없는 괴수들도 있었다. 정신 공격을 가하는 괴수나, 맵과 같이 공격을 해 오는 괴수 같은 경우가 그랬다. 우선은 경험치를 몰아 주는 것이 가장 시급했기에 클랜 A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가능하면 쉬운 1급 괴수들로만 골라서 공략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입 헌터들에게는 벅찬 수준이었다.
효재는 처음부터 이익헌이 눈독을 들인 녀석이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영과 제이는 팔자에도 없는 1급 늪 투어에 끌려다니면서 매일 밤 펑펑 눈물 콧물을 쏟았다.
누가 그렇게 하라는 것도 아닌데 혀가 입 밖으로 몇 센티나 늘어져 나오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 다음날이 되면 누구보다 늦지 않으려고 모두들 서둘러 장소에 나가서 클랜 A를 기다렸다.
한 달이 지났을 때 현신 헌터 아카데미 1학년생이었던 헌터 네 사람과 정원은 B급 헌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옥같은 일정이 반복되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버텨낸 결과 이제 그들은 공격력도 천으로 늘어 있었고 무기를 사용해서 공격 증폭률을 높이면 그들의 공격력도 무시할 수준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차크라가 소진돼서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을 일찍 맞닥뜨리게 될 때였다. 그야말로 경험치를 몰아준 것이었지 아직 그들의 수준으로 1급 늪의 괴수를 공략하는 것은 무리였다.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느꼈지만 그 앞에서 좌절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거리가 얼마라는 것을 알고 더 힘을 내면 되는 거였다. 그것은 개인의 연습과 훈련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신입 헌터들은 더욱 연습에 매진했다.
신입 헌터들이, 그리고 거기에 정원까지 합쳐서 다섯 명의 헌터들이 B급에 이르자 그 후부터는 자신의 차크라와 무기를 믿으면서 자신의 레이드를 하는 훈련이 계속되었다. 1000만 정도의 체력을 가진 5급 늪의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서 다섯 명이 들어가면 어느 공대보다도 더 우수한 실력을 보이게 됐다. 기본공격력이 천에, 천 퍼센트가 넘는 공격 증폭률을 가진 무기를 들고 싸우다보니 당연한 얘기였다.
아직 공격 기회를 제대로 잡아들어가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 그들도 감을 잡기만 하면 한 시간 안에 5급 늪 정도는 끝낼 수 있는 스텟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클랜 A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여유있게 천천히 그들을 격려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상황이 허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면서 예상하고 있던 그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 가공할만한 콜로니가 나타난 것이다. 그 전에도 콜로니가 나타난 적은 있었지만 그 콜로니는 클랜 A에 의해서 공략이 마쳐졌다. 전에 나타났던 콜로니는 베로니카 공격대와 함께 공략했던 콜로니에 비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클랜 A가 콜로니를 공략한 이후에 한동안은 한국에 콜로니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심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 아래에서 사는 것처럼 매순간을 불안에 떨던 클랜 A에게 드디어 그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콜로니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한 사람은 지연이었다. 지연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클랜 A와 함께 콜로니의 탐사에 나섰다. 채준형도 콜로니에 서식하는 개체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알아내고 거기에 맞는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같이 움직였다.
콜로니가 나타난 곳은 서울의 대치동이었다. 콜로니가 현실적으로 차지하는 공간은 넓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콜로니의 입구를 지나쳐 들어가고 나면 그곳에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신세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