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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모든 건 믿음과 거짓에 달려 있어. 진실이 아닌 걸 믿게 하는 거지. 환상도 환청도,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그러려면 우선은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돼.”
재욱은 효재의 등장으로 그 모든 불편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바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효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죠? 저를 빨리 사라지게 만들려면 저한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세요. 필요한 것들을 다 배우기 전까지는 갈 수가 없어요.”
효재가 당돌하게 말했다. 재욱은 그게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효재는 그 집안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불편해하건 말건 그곳에서 버텼다. 결국 먼저 폭발해버린 것은 효재의 큰어머니였다. 저 아이가 나가지 않으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더니 정말로 나가버렸다. 재욱은 자기 아내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라도 효재를 가르쳐야 했다.
재욱이 가르치는 것들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효재는 그가 그려주는 난해한 그림들을 보고 재욱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비밀들을 깨달아갔다.
믿음과 거짓.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게하는 것.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믿게 하는 것.
효재는 점점 재욱이 하는 말들에 빠져들었다.
재욱은 효재를 가르칠때마다 자신의 차크라가 엄청나게 소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효재는 탐욕스러웠다. 재욱의 모든 것을 발라먹어 버릴 것처럼 몰입하고 그의 지식과 경험, 모든 것을 가져갔다.
효재는 재욱이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보다 경욱이 레이드 도중에 시전했던 기술들을 말해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떻게 적용하면 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은 먼 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영영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지도 않았다.
클랜 A에서 효재를 불러, 주말에 있을 레이드를 준비하라는 말을 전했을 때 효재는 갑자기 조급해졌다.
재욱은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조카가 클랜 A에게 불려 다니면서 그들과 같이 레이드를 한다는 사실이 고깝기는 했지만 효재가 그렇게라도 떠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크라를 회복할 틈도 없이 효재에게 모든 것을 뺏기는 중이었다.
효재가 떠나기 하루 전, 재욱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쫓기듯이 가르쳤다. 효재는 큰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혈육이라고, 자기가 이제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픈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달라진 것은 태도만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내용도 달랐다. 그동안 그가 사용했던 언어와도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은 남의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르쳐 준 것 같았다면 그날은 효재가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한 가지만 기억해라. 네 말에 귀기울이게 하고 믿게 하는 거다. 이익헌 사장님이 잘 하는 것들이기도 하지. 사실 이익헌 사장님이 이걸 했으면 잘 했을 거다. 대신 다른 재능을 계발하셨지만.”
재욱이 웃으며 말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가, 하면서도 효재는 큰아버지에 대해서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떠날 때는 부드러운 얼굴로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슨 변덕인지 큰아버지의 표정이 또 놀부처럼 변해 있어서 효재도 애써 고쳐잡은 마음을 뒤집어버리기는 했지만.
***
시아는, 저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도 남을 가르치는 재주는 타고난 것 같았다. 사실 제이를 보면서 시아도 놀라고 있었다.
'여길 맞추면 이 각도로 튈 테니까 여길 맞춰서 저것들을 쓰러뜨려라.' 라고 주문을 내 놓으면 제이는 그것을 귀신같이 수행했다. 시아는 입만 살았다뿐이지 화살을 날리지도 못하고 검을 들지도 못하지만, 제이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시아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면 알아듣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은데 왜 시아는 항상 말로만 설명을 해 주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기만 할 뿐이었다.
시아는 이익헌의 딸이고 사기 기질이 피를 타고 정직하게 내려와서 제이를 속이는 것쯤은 시아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아는 제이가 얼굴 변형에 차크라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가 제이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젖살은 완전히 빠졌고 윤곽에 날이 서고, 살에 파묻혀 있던 코가 살아나오면서 제법 날렵한 인상을 풍겼다. 딱히 제이가 노려서 만들어진 산물은 아니었다.
효재란 놈이 제이의 원래 얼굴을 워낙 좋아하는 바람에 제이도 딱히 얼굴을 고치겠다는 마음은 갖지 않았다. 그러나 강도 높은 훈련이 반복되면서 코를 비롯한 안면의 뼈들이 여러번 주저 앉았고 그때마다 뼈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조금씩 예뻐지는 걸 무슨 수로 막겠는가. 제이는 얼굴이 그렇게 될 때마다 효재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효재가 계속해서 처음 얼굴이 제일 예뻤다고 말하는 것을 듣자니 나중에는 제이도 속이 뒤집어질 판이었다.
제이는 힘을 써서 레이드를 하는 타입이었고 훈련을 하다보면 얼굴을 다치니까 예뻐질 수도 있는 거지, 왜 매번 신경 쓰이게 그러는 거냐고 한 번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기도 했다.
마침 무영과 시현이 지나가면서 둘이 싸우는 내용을 듣고 저것들은 미친 게 틀림없다고 둘이 단정지어버렸다.
“지 여자친구가 예뻐져도 지랄이야, 저 새끼는!”
무영이 소리를 질렀다.
“저거도 효재 자존감이랑 직결되는 문제인 건지도 몰라. 효재는 자존감이 없어서 제이가 조금이라도 예뻐지면 다른 녀석들이 제이한테 대시를 할 거라고 생각하나봐.”
시현은 나름대로 분석적인 접근을 하려고 했지만 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 쟤들은 그냥 미친 거야.”
그렇다는데 뭐. 그럼 그런 걸로 하자고 하고 지들끼리 합의를 보았다.
시현은 세 녀석들이 각자 특훈을 받느라고 바쁜 틈을 타서 정원과 시간을 보냈다. 시현은 자기가 굉장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를 떠나는 여자한테도 오래 마음을 남기지 않고 자기한테 다가오는 여자는 딱히 막지 않는 주의인가보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면서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꼭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언제나 자기 입술을 똑바로 바라보는 정원을 보노라면 가슴 한 가운데가 간질거렸다.
스킨십도 잦았다. 시현이 다른 곳을 보고서 말을 하면 정원은 시현의 입술을 읽으려고 시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팔에 정원의 손이 닿았고 점점 그 손길에서 다른 것을 기대하게 되곤 했다.
시현의 입장에서도, 정원에게 해야 할 말이 생기면 정원을 부르느라고 정원의 팔이나 어깨를 잡게 되는 일이 잦았고 그런 접촉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나중에는 좀 친근해졌다고, 등이나 허리도 살짝 건들다가 결국 삐리리한 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가까이에서 상대의 입술을 오래 들여다보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현이 정원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키스한 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는 했지만 시현은 정원에게 진지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했다. 헤어진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시현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정원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는 원론적인 생각에 해민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정원은 그 얘기를 전부 듣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과 사귀었던 일에 대해서 전부 말해 주어야 하냐고 물었다. 시현은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지만 자꾸만 그 말이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자기를 알기 전의 일이니 상관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게 마음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정원의 과거의 남자들에 대해서 듣기로 작정을 했을 때 정원은 크게 웃으면서 그런 일이 일어날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정원은 칼에 차크라를 흘려넣는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시현도 정원의 차크라가 특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원의 차크라가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은 강현을 통해서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정원의 차크라가 자신의 차크라와 반대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시현은 정원의 몸도 평상시에 뜨거운지 문득 궁금해졌고 정원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정원은 시현이 자기에게 할 말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차크라가 얌전하네요.”
시현이 정원의 몸을 뒤에서부터 감쌌다. 뭘 하려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정원이 시현을 돌아보는 순간 시현의 몸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오슬오슬 떨릴 정도의 한기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여서 정원이 시현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시현은 오히려 팔을 더 꽉 끌어 모았다.정원은 사방이 얼음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갇힌 듯 추위를 느꼈다. 그동안 칼을 통해 흘려넣을 줄만 알았던 차크라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시도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현이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운 차크라였다. 시현이 팔을 풀자 정원도 시현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차크라에 대한 관심을 빙자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관심은 서로의 몸을 향해 있었다.
몸의 열기를 느껴보겠다는 태도로 시현이 정원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시현의 목 언저리를 손등으로 만지는 정원의 손에는 시현의 냉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시현의 손이 정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브래지어를 위로 들어올려 그 아래에 부드럽게 솟아난 가슴을 움켜쥘 때까지도 두 사람은 학자적인 관심일 뿐이라는 듯 뻔뻔한 표정을 유지했다.
시현은 정원을 허리로 밀며 벽으로 몰아세웠다. 정원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입모양으로만 음란한 말들을 쏟아냈다.
정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표정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운 모양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시현이 속삭이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현의 입술이 하는 말을 전부 보고 싶었다.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 네 안에 들어간 나를 보고 싶다는 말, 네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말, 네가 소리지르는 걸 보고 싶다는 말.
그 입술이 만들어내는 모든 말들을 전부 다 읽고 정원은 저도 모르게 시현의 목을 끌어 안고 그 입술에 키스했다.
시현은 정원의 키스를 받으면서 해민을 떠올렸다. 해민을 처음 안았을 때는 비교의 대상이 없었다. 해민은 시현이 알았던 여자였고 새 세상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해민이라는 그림 위에 덧그려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교되었다. 기쁠 때 짓는 표정, 허리의 탄력, 엉덩이에서 둔부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실루엣, 가슴의 크기와 유두의 색깔, 그 부드러움의 정도까지도 전부 다.
정원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솔 향이 코 끝에 감돌았다.
“미치겠다.”
“응?”
정원이 시현에게 물었다.
시현은 정원을 바라보았지만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해 주는 대신 정원의 몸에 그 말을 써 넣었다.
미
치
겠
다
고
쇄골에서 시작한 글씨가, 마지막 말을 마칠 때는 음모를 쓸고 지나갔다.
시현의 손가락이 정원의 음순을 열었다.
그 사이의 부드럽고 탄력있는 곳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정원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시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시현은 정원의 혀를 찾았다. 혀로는 정원의 혀를 더듬으면서 정원의 질을 손가락으로 범하며 들어갔다. 꽉 물려오는 두툼한 살이 시현의 손가락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거기에 제 페니스를 밀어 넣으면 얼마나 황홀한 기분이 들까 해서 시현의 마음이 점점 더 급해졌다.
정원의 입술을 놓아주고 시현은 정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시현이 큼큼거리면서 정원의 가슴에 코를 묻고 있는 동안 정원은 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제 가슴팍에 꽉 끌어안았다.
시현의 페니스가 정원의 아랫배를 밀었다.
“다리 들어줘.”
시현이 급히 말을 했다가 정원을 바라보고 다시 말했다.
“다리 들어줘. 넣고 싶어.”
정원은 얼굴을 붉힌 채로 시현에게 제 몸을 맡겼다. 들어올려진 한쪽 다리를 잡아 시현이 허벅지를 쓸어 올리자 정원의 입에서 더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원은 엉덩이와 허벅지쪽에서 집중적으로 느꼈다. 그곳을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가면 가슴이나 음부를 직접적으로 공략할 때보다 훨씬 더 극적인 반응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