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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그러나 지금은 그 문제보다도 콜로니의 연못에서 들었던 경고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괴수들이 시현을 노린다면. 그래서 한국에서 1급 늪이 성장하고 1급 늪의 괴수들이 시현을 노리고 콜로니가 생겨난다면, 괴수의 차크라가 폭주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위험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문제를 임정과 상의하는 것은 어려웠다. 임정은 시현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했다.
지우는 자신이 생각한대로 일단 밀어붙이기로 했다. 꼭 독단적인 결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규태와 이익헌을 불러놓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알려주고 두 사람의 의견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두 사람도, 어떤 위험이 더 시급한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거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시현의 괴수 차크라가 폭주한다고 하더라도 시현에게는 용하가 있으니 용하가 시현의 차크라를 컨트롤해줄 수도 있을 거라는 말도 나왔다. 용하가 크게 미더운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시현을 빠르게 성장시키는데 주력을 해야 할 거라고 결론이 났고, 그 결정을 발표할 기회만 노리던 지우가 지금 터뜨린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임정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마침 기회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정원이라는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고, 임정이 잘 알지도 못하는 하정원 앞에서 지우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을 거고 강현이라는 절대적인 지지자가 있으니 그냥 이 참에 공표를 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임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했다. 지금은 10년 후의 일을 대비할 때가 아니라 옷에 붙은 불을 바로 꺼야 할 상황인 거라는 것을 임정도 모르지 않았다.
“경험치를 쌓고 등급을 올린다는 게…….”
효재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강현이 효재를 보고 웃었다.
“너희들을 데리고 레이드를 하면서 경험치 몰아주기를 할 거야. 그 과정을 죽지 않고 버티기만 한다면 너희들은 적어도 여섯 달 후엔 모두 A급 헌터들이 돼 있을 거다.”
강현이 호언장담을 했고, 신입 헌터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입을 꼭 다물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
현신 헌터 아카데미의 과정이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릴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급해진 사람은 서문열이었다. 서문열은 애제자가 아카데미를 떠난다는 말을 듣고 아예 사흘동안 숙식을 같이 하면서 무영에게 개인 교습을 해 주었다.
서문열은 무영에게 자기가 아는 모든 종류의 독과, 독을 사용하는 괴수에 대해서 알려주었고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메커니즘과 이론, 가설을 전부 무영에게 쏟아 부었다. 서문열은 독을 사용하는 괴수뿐만 아니라 흡혈을 하는 괴수, 체외에서 소화를 하는 괴수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무영은 서문열 교수가 왜 그런 것들에 대해서까지 알려주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문열 교수는 무영이 결국 그 모든 것들을 같이 해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많았다면 느긋하게 무영이 성장하는 것을 바라봐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서문열 교수도 이해했다.
“이건 아수라는 괴순데 크기는 작습니다. 4미터 50센티에서 8미터 정도의 개체들이 발견됐죠. 지금까지 늪에서는 한 개체만 나왔지만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려는 건 콜로니에서 여러 개체가 한꺼번에 나왔을 때 공략이 까다로울 종들입니다. 그런 녀석들을 처음 만나면 헌터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일단 콜로니가 발생한다면 정말 많은 헌터들이 죽게 될 겁니다. 전체 헌터의 반 이상이 죽게 될 수도 있어요.”
서문열 교수가 말했다. 무영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없어졌다. 갑자기 인류의 운명이 자기 어깨에 지워진 것 같은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무영이 원했던 것은 적당히, 사람들이 우러러볼만한 지위에서 적당히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어서 적당히 우아하게 살아가는 거였지 인류의 안위를 책임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직종이 헌터였고, 괴수들 때문에 헌터가 각광받았고 그 시대의 가장 뜨거운 아이콘이 클랜 A여서 헌터에 관심을 가지고 꿈을 키워왔던 것 뿐이지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서문열 교수는 무영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그거야말로 피곤한 상황이었다.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게 있으면 여쭤보러 올게요. 여기에서 머릿속에 다른 게 더 들어가면 레이드를 하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릴 것 같아요.”
무영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서무열에게 말했다. 서무열은, 정말로 그러면 된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 것처럼 무영을 놔주었다.
무영이 독성학 마스터에 열을 올리는 동안 효재도 분발했다. 효재는 아르마딜로에게 농락을 당한 후에 자기도 그 방면의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서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영에게는 서무열 교수가 있었지만 효재에게는 그렇게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효재는 할머니를 통해서 깨달았다.
“세 녀석 중에 네 아빠가 제일 낫기는 했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으니 네 큰아버지랑 작은아버지도 이제 실력이 어느 정도는 늘었겠지. 큰아버지를 찾아가봐라.”
레이드를 망쳤다면서 징징거리던 효재가, 자기한테는 기술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리자 효재의 할머니가 한 말이었다.
“큰아버지를요? 하지만.”
효재는 큰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이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효재가 그런 말을 하려고 하자 할머니가 무섭게 효재를 노려 보았다.
“네 자존심 때문에 그것만은 하기 싫다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미리 말을 좀 해 주면 좋겠구나. 내 손자놈한테 실망을 하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싶다.”
“할머니…….”
“왜? 불편할 것 같으냐? 네가 불편하면 네 큰아버지는 안 불편할 것 같으냐? 큰아버지가 싫으면 큰아버지를 불편하게 하지 그러냐? 나라면 그렇게 괴롭혀주겠다.”
“큰아버지는 할머니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뭐? 내 아들이라서 봐주겠다고? 헛소리 집어 치우고. 지금 너한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네 큰아버지니까 쫓아가서 배워. 뭐든 배워. 내가 무영이나 시현이라면, 지금의 네 모습에 엄청 실망했을 것 같다. 친구들을 위해서 뭐라도 다 해 줄 것처럼 그럴듯하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불편해하는 사람을 보기 싫어서 자기가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차 버리는 놈이라는 걸 알면 말이다.”
“할머니…….”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효재는 할머니의 특명을 따랐다.
할머니의 말은 정확히 맞았다. 효재의 큰아버지는 효재가 큰아버지를 불편해하는 것 이상으로 효재를 불편해했다. 효재는 자신의 큰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제대로 알지를 못하고 있었다. 효재의 큰아버지는, 소스라칠 정도로 싫다는 듯이 효재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냐면서 당장 나가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재는, 그곳에서 큰아버지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자기가 시현이나 다른 동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아르마딜로만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버틸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아르마딜로의 늪이 결정적이었다. 게다가 임정의 다리가 괴수의 공격을 받고 잘릴 뻔했다는 사실까지 겹쳐져서 효재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효재의 큰아버지는 자기 집에 들어오는 효재의 모습이 자신의 죽은 동생인 경욱과 너무 닮아서 기절을 할 뻔했다. 자신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과 같은 영역에서 죽을 때까지 겨루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비극을 그는 이제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효재를 보면서 들었다.
효재의 큰아버지인 민재욱은 그런 사람이었다. 헌터였고, 정신계 공격을 하는 괴수에게 특화된 딜러였다. 민재욱은 경욱이 헌터가 될 때까지 그 영역에서 최고였다. 그러나 경욱이 헌터가 된 이후에 민재욱에게 바쳐졌던 모든 헌사가 경욱에게로 이전되는 것을 묵묵히 바라봐야만 했다.
경욱의 능력은 괴수가 사용하는 정신계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공격을 괴수에게 사용하기도 했다. 경욱의 공격을 받고 자기 몸이 마비됐다고 믿으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괴수가 생겨났고, 호흡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공포에 질식돼서 숨을 쉬지 않다가 몇 분 간 기절해 버리는 괴수들도 생겨났다.
경욱은 괴수의 눈 앞에 다른 맵이 보이게 할 수도 있었다. 헌터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괴수들에게만 들리게 만들 수도 있었다. 괴수의 정신을 조종해서 괴수의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었고 괴수의 몸에 수많은 흡혈 괴수들이 붙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괴수가 제 몸을 스스로 공격하게 할 수도 있었다.
경욱이 만들어내는 환시와 환청, 경욱이 괴수의 심리를 조종해서 만들어내는 공격들.
재욱은 자신도 그것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다. 그 능력은 지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베풀어진 은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욱은 헌터로서의 삶을 마감하려고 결심했다.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한 것이다. 경욱이 사고를 당해 죽은 것은 그 즈음이었다. 경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욱은 경욱이 누워있는 영안실이 아니라 늪으로 달려갔다. 경욱이 죽었다면, 경욱에게 내려진 그 능력이 자신에게 베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재욱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경욱이 했던 수준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었지만 재욱은 경욱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의 동생 찬욱은 경욱의 빈자리를 큰 형이 채우는 것을 조용히 지켜봐야 했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경욱이 사라진 세계에서 재욱이 급부상하는 것을 보면서 찬욱의 마음이야말로 불편했다. 하지만 가장 심란한 것은, 그런 재욱을 따라잡는 것도 그에게는 벅찼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었지만 그뿐, 더이상 그 능력이 강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너는 할 수 있지 않느냐고 위로할 사람들은 있겠지만 찬욱 자신은 그 말에 위로받지 못했다.
그런 위로를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제, '그래도'라는 말에 포함된 많은 의미들을 찬욱도 이해했다. 찬욱은 '그래도'라는 말이 붙지 않은 채 제대로 자기 자신의 가치로만 평가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찬욱에게는 언제나 그가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경욱이 있는 동안에는 그 벽이 하늘 끝까지 틈도 없이 쌓아 올려진 것 같았다. 그리고 경욱이 죽은 후에는 재욱이 찬욱의 벽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 때문에 효재는 큰아버지인 재욱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재욱은 눈 앞에 경욱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럴 정도로 효재는 제 아버지를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싸늘했다. 경욱은 그런 식으로 재욱을 본 적이 없었다.
경욱은 자기가 가진 재능을 알았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발견한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형에게 알려주었다. 형도 같이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점점 형제 사이에 말이 없어졌다. 재욱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경욱은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재욱은 경욱이 했던 말을 자주 떠올렸다. 경욱이 싫었으면서도 경욱이 가진 재능이 탐이 나서, 너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