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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정원의 테이블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그만하라고 말만 하고 있을 뿐 정원을 도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원은 팔을 뺀 채 고개를 돌렸다. 정원은 입을 보지 않으면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정원이 고개를 돌린다는 것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정원의 앞에 있던 남자의 화를 자극한 듯했다.
남자가 다시 정원의 팔을 잡아채려는 순간 시현이 그 앞으로 나섰다.
“뭡니까.”
시현이 말했다. 남자는 말 없이 시현을 노려보았다.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죠? 내부적인 일입니다.”
“내부적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헌터들 아닙니까? 얘기 들어보니까 공대 소속인 것 같은데. 헌터들이 소란을 일으키면 치안대나 익스트림 헌터 길드의 네메시스에 연행될 수 있지 않습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소란스러워지게 만든 건 그쪽 책임인 것 같은데요?”
“내부적인 일이라고 했습니다.”
“공대의 일은 치안대와 네메시스에서 규율하죠. 내부적인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내부적으로 이런 일을 일으킬 권한은 어디에서도 주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시현이 말했다.
“허. 보아하니 현신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 같은데 그냥 조용히 빠지는 게 낫지 않겠어? 어른들 일이야. 어?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배우는 모양이네. 왜? 지금 진도가 딱 거기 나갈 차례냐?”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정원은 두 사람의 입술을 읽느라고 바빴다. 그러더니 시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냥 나가죠.”
정원이 시현에게 말했다.
“나가긴 뭘 그냥 나가. 내가 오늘 너한테 할 말 있다고 한 거 못 들었어? 너 계속 그렇게 공대장 믿고 남의 말을 무시한다 이거야?”
그 후의 말은 영영 나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정원을 향한 더럽고 모욕적인 말이 나오는 동안 시현이 그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원은 그 남자가 한 말을 보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가 앉아있던 의자와 함께 나가 떨어졌다. 나무로 된 의자가 부서지면서 남자의 옆에 굴렀다. 남자는 못이 걸린 나무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시현이 무영을 바라보았다.
“나서지 않아도 되니까 정원씨만 부탁한다.”
“지랄을 해요.”
그러면서도 무영은 정원의 옆으로 다가갔다. 시현은 힘을 들일 것도 없었다. 무영은 객기를 부리는 남자에게 불쌍한 마음을 느꼈다. 시현이 누군지 알아봤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몇 분 후면 뼈를 추리기도 힘들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대로 해 볼 거면 말해. 제대로 상대해 줄 테니까. 뒤에서 입만 놀리는 개새끼면 지금 사과해라. 사과도 받아줄 테니까.”
시현이 말했다.
“너는 오늘 여기에서 죽었어, 개새끼야!”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잘 됐네. 어차피 여기에 있다가는 치안대나 네메시스가 올 테니까 아예 다른 데로 가지. 나도 오늘 별로 기분이 안 좋았거든.”
시현은 그렇게 말하고 의자 다리를 불시에 휘두르려던 남자의 팔목을 걷어찼다. 직후에 무영을 바라보았을 때 시현과 무영의 눈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런 병신!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너! 사람이랑은 안 싸워 본 거지? 그렇게 싸우면 사람이 병신이 되지. 아오, 이 개새끼! 차크라 조절도 못 하냐? 힘 조절도 못해? 사람을 때리면서 괴수한테 하듯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아우!! 빨리 어머님한테 연락해봐. 이건 병원에서도 못 고쳐. 아으으! 진짜 이런 병신! 멍청한 새끼!”
무영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남자의 팔을 보면서 말했다.
“너는 씨발, 아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무영이 시현을 퍼퍼퍼퍽 때리는 동안 시현도 이제 뭘 어째야 하는 건가 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병원에 데려가야되나, 일단?”
시현이 물었다.
“병원에서 이런 건 못 고칠 걸? 그냥 단순히 뼈가 바숴진 게 아니라 네 차크라에 짓눌려서 피부도 다 괴사될 걸? 그러면 팔 전체를 잘라내야 돼. 아우, 그러니까 병신아. 생각 좀 하고 해, 인마! 누구는 힘 자랑 하고 싶지 않아서 감추는 줄 아냐? 근데 민효재 이새끼는 왜 안 와!”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바로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민효재 그 새끼는 문 앞에 있다.”
중후한 여자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임정과 강현이었다.
“어, 어, 엄…마!”
시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엄마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치안대장이라는 말을 들어만 봤지 치안대장이 직접 출동하는 일을 만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사가 다망한 치안대장이 이런 피라미들 싸움에 직접 올 필요도 없었다. 이런 일에는 그냥 치안대원 두 세 명 만 보내면 되는 걸 텐데.
시현의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졌다.
“치…안…대장님….”
무영도 만만치 않게 질려버려서 절도있는 자세로 인사를 했다. 아무리 친구 엄마라고 해도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그대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임정은 눈빛만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처럼 시현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강현은 그 옆에서 나뒹굴고 있는 남자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메시스에서 사건 가져가면 일을 왕창 키워버릴 건데요.”
“네메시스에서 왜 가져가. 놔둬.”
임정이 말했다. 강현은 혼자서 웃음을 참았다. 지금까지 단 하나의 오점도 없이 치안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임정이, 아들이 사고를 쳤다는 얘기를 듣고 사고 뒤처리를 위해서 직접 나선 것이다.
사고 신고를 한 사람은 효재였다. 어머님이 직접 오셔야 할 것 같다고 말한 사람도 효재였다. 아마 도착하실 때쯤엔 이미 끝나 있을 거니까 어머님이 오셔서 고쳐 주셔야 할 거라는 말이었다. 임정은 끙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녀석의 앞에 앉더니 치유 차크라를 쏟아 부었다.
“움직이지마. 소리도 내지 마. 가능하면 숨도 쉬지 마.”
임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바둥거리던 녀석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하급 헌터를 계략에 빠뜨린 레이더의 팔을 치안대장이 그 자리에서 잘라버렸다는 일화는 그도 알고 있었다. 헌터 타투가 새겨진 팔을 자른다는 것은 헌터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였고, 치안대장은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스스로 즉결심판을 하고 처형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치안대장을 눈 앞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했었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그 놈이 치안대장 아들일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버버 거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설명해.”
임정이 의자를 끌어 당겨 앉으며 말했다. 바닥에 뒹굴던 녀석은 제 팔이 말짱해진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일을 설명하는 것은 역시 무영이 제격이었다. 무영은 꼭 필요하지 않은 얘기, 해민과의 실연 얘기부터 시작해서 화장실에서 시현이 정원을 만난 얘기까지 거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얘기를 해 주었다.
“하정원이라고? 김강현. 아는 거 있어?”
임정이 물었다. 강현은 길드에 접속해서 하정원의 관련 기록을 찾아내 임정에게 보여주었다. 임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메시스로 갈 문제는 아니니까 먼저 들어가지?”
임정이 말하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치안대로 갈 문제도 아니잖아요. 오랜만에 시현이를 본 건데 여기까지 온 김에 시현이가 따라주는 술 한 잔은 마시고 가야 되는 거 아니예요?”
정원을 괴롭히던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자기가 누구를 건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강현이라면 네메시스의 부대장이었다. 익스트림 헌터 길드의 내부 조직인 네메시스는 국적을 초월해서 길드에 가입된 모든 헌터들에 대해서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치안대보다도 더 막강한, 무소불위라고 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기관이었다.
“안시현. 이십 년 동안 속 썩인 적 없더니 오늘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거야? 다음에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때는 진짜 가만히 안 놔둔다.”
임정이 말했다.
“네. 죄송해요.”
“나는 이 녀석한테 이 정도로만 할 건데 이게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말해라.”
임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너는.”
임정이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한 헌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치안대가 도착하는대로 구속된다. 레이드로 부상당한 헌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죄다. 거기에 대해서 할 말 있나?”
“그건……. 저는 저희 공격대의…….”
“너희 공격대의 뭐?”
“저희 공격대가 제대로……. 하정원 때문에 공격대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이건 인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말 잘 했다. 나도 궁금했는데. 좋아. 누가 누구한테 폐를 끼치는지 보는 걸로 하지. 두 사람의 레이드를 보겠다. 네가 말한 게 사실이라고 해도 너는 하정원의 명예를 훼손한 거다. 치안대는 레이드로 부상을 당한 헌터의 명예는 특별히 더 보호한다. 그래도 네가 어느 정도는 죄값을 치렀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주는 거야. 하정원보다는 더 레이드를 잘 해야 될 거다. 이름이 뭐야.”
“서규탭니다.”
임정과 강현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에이.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성인인 줄 알았는데?”
강현이 말했다.
“좋다. 서규태.”
반말을 하려니 괜히 머쓱해져서 임정이 또 강현을 바라보았다.
“괜히 일을 크게 만드시네요. 귀찮으시면 그냥 네메시스에서 데려갈게요.”
강현이 말했다.
“아니. 여자가 잘 되면 잠자리 기술로 얻은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녀석한테는 진짜로 제 실력을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지.”
“저희도 그거 보러 가야 돼요? 저는 시현이랑 있어도 되는 거죠?”
강현이 말했다. 임정이 시현을 바라보자 시현은 움찔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죠. 삼촌. 가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술은 다음에 사 주세요.”
“뭘 사 줘? 네가 사는 거지. 알았어. 아무튼. 그럼 늪 하나 알아봅니까?”
강현이 임정에게 물었다.
“3급으로 해.”
“3급요? 몇 급 딜러들인데요?”
“저는 E급입니다.”
정원이 말했다.
“저도 E급입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3급으로 해.”
임정이 말했다.
“3급 괴수는……. 한 번도 상대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서규태가 말했다.
“내일부터는 달라지겠지. 그 입으로 열심히 떠벌이고 다녀라. 드디어 나도 3급 괴수를 상대해 봤다고 말이다.”
“그런데 클랜 A 일은 안 바쁘세요?”
강현이 헌터 협회에 전화를 해서 3급 늪이 있는 곳을 알아보는 동안 무영이 임정에게 물었다. 일이 너무 커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임정은 무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 테이블에 같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같이 들어간다. 딱 열인가? 잘 됐네.”
임정이 말했다.
“열요?”
시현이 묻자 강현이 문쪽을 가리켰다.
“야. 쟤네들 좀 어떻게 해 봐.”
문 앞에는 서로 떨어질 줄 모르는 채 꼭 끌어안고 있는 효재와 제이가 서 있었다.
“무슨, 숙주랑 기생충 같아.”
임정이 말하자 정원이 시현의 팔을 건들었다.
“네? 왜요?”
시현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건지 이해를 못 했어요.”
“아아. 우리 엄마가 하는 말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우주랑 앵추 같다는 게 무슨 말이예요?”
“아. 숙.주. 숙주랑. 기.생.충. 같대요. 숙주랑 기생충.”
시현이 공중에 써주는 글씨를 하나씩 보더니 정원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