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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여자는 파우치를 건네받고 다시 시현에게 인사를 하고 좁은 계단을 먼저 내려갔다.
창백한 얼굴에 가는 윤곽, 시원한 이목구비의 적절한 배치. 비율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푸르스름한 얼음같은 숭고한 분위기.
시현은 여자의 인상이 좋아서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저기요.”
시현이 불렀지만 역시나 여자는 듣지 못했다. 시현은 걸음을 빨리해서 따라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팔을 건들었다. 여자가 시현을 돌아보았다.
“네?”
여자가 물었다. 얘기를 하면서 깨달았던 거지만 여자는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치고 발음이 정확했다. 선천적인 문제였다면 몇 몇 발음이 어려웠을 텐데 여자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건지 정상인과 다름없이 발음을 했다.
“저는 현신 헌터 아카데미에 다녀요. 1학년이고 안시현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친구들이랑 왔는데. 혹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시현이 말하자 여자가 웃음을 지었다.
“헌터군요. 나도 헌터예요.”
“헌터라고요?”
여자가 자신의 팔에 있는 헌터 타투를 보여주었다.
E급 딜러였다. 차크라 숙련도도 높았고 경험치도 높았다.
“소리를 못 듣는데 레이드를 할 수가 있나요?”
시현이 말하자 여자가 시현의 팔을 잡아 당기며 시현의 입술을 주시했다. 계단은 조명이 어두워서 시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소리를 못 듣는데 레이드를 할 수가 있냐고 물었어요.”
시현이 발음을 또박또박 하면서 제 입술을 보여 주었다.
“레이드를 하다가 이렇게 됐어요. 콜로니에서는 아마 어려울 것 같지만 늪에서 레이드를 하는 건 무리가 없어요. 늪에는 괴수들이 하나씩 존재하니까 괴수를 눈에서 놓치지 않으면 괜찮거든요. 그리고 진동으로 움직임을 느끼니까. 그래도 콜로니에서 싸우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시현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점이 시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요즘에는 어디서든 시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시현을 알아본 사람들이 시현을 통해서 인맥을 형성하고 싶어하면서 접근을 하는 바람에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이름이 뭐예요?”
시현이 물었다.
“하정원요.”
“아.”
“아까 이름 말할 때 잘 못 들었어요. 뭐라고 했어요?”
“안시현.”
“한시연?”
“안. 시. 현.”
시현은 허공에 글씨를 써 주었다.
“아. 안시현씨.”
“일행이 있어요?”
“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지루해요. 원래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동안 사적인 자리를 너무 못 가졌다고 해서 나온 건데 불편하네요. 같은 공격대에 속해 있어서 레이드를 할 때는 자주 보는데 꼭 사적인 자리에서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정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내 뒤에 사람이 오면 말해줘요.”
정원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안전해요.”
시현이 정원의 웃음을 따라 웃었다. 정원의 웃음은 시현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도 일행이 있는데. 밖에서 따로 만날래요? 같이 자리 옮겨서 커피라도 마시는 거 어때요?”
시현이 물었다.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 번 해 보죠. 못 나올 것 같으면 기다릴게요.”
시현도 자기가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구는지 알지 못했다.
“먼저 가세요. 같이 들어가는 건 이상할 것 같아요.”
정원이 말했다.
“네.”
시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원의 일행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해하며 걸어갔다. 그때 한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이 시현의 귀에 들어왔다.
“그런 사람이 공격대에 끼어있다는 것 자체가 공격대의 명성을 깎아 먹는 거지. 귀머거리가 있는 공격대라고 해 봐. 믿음이 가겠어? 늪에 열 명씩이 들어가야 되는데 왜 한 자리를 귀머거리로 채워야 되는 건데? 하정원이 이기적인 거야. 하정원이 공대장님이랑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뻔하지. 얼굴 예쁘고 몸매 좋으니까 그 짓 해서 자리 차지한 것 같긴 한데 공대장님도 정말 공격대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정말로 그런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잖아.”
“그게 더 문제라니까?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해 봐라. 누가 그걸 알아주냐고. 어차피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텐데. 억울하지나 않게 그냥 하는 게 낫지.”
“그만 해라. 온다.”
“오면 뭐. 듣지도 못할 텐데.”
“그럴 거면 뭐하러 불러냈어? 나오라고 네가 고집 부린 거잖아.”
“괘씸하잖아. 나. 오늘은 말 하려고.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하게 하지 말고 그냥 레이드 때려 치우라고 말이야.”
“뭘 그렇게까지 해. 정원이가 레이드를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실력은 있으니까 지금까지 커버가 된 거였고. 정말로 실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거였으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벌써들 들고 있어났을 거라고."
"잠재적인 위험성을 왜 우리가 안고 가야 되냐는 거야. 지금까지 잘 해 왔으면 뭘 해? 한 순간의 실수로 공대가 전멸할 수도 있는 건데. 이런 걸 인정 문제로 넘겨야 되는 거라고?"
"꼭 말을 해야겠다 싶으면 상처 안 받게 조심해서 말을 하든가.”
“아니야, 말을 하기는 해야 돼. 저번에도 실수하는데 공대장님이 그냥 싸고 도시기만 하더라.”
그것은 다른 목소리였다.
“그때 너는 뭐, 실수 안 했냐? 다들 실수하잖아. 공대장님은 그럴 때마다 넘어가고 나중에 따로 불러서 알려주시는 스타일이고.”
“이 새끼. 왜 이렇게 하정원을 두둔해? 너 하정원 좋아하냐? 하여간. 여자가 좋은 거야. 나도 여자로 태어날 걸. 에효. 얼굴만 예쁘면 절대권력이지.”
“그만해. 정원이 온다고.”
“오라고 하라고!”
정말로 뒤에서 정원이 오는 것 같아서 시현은 무영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뭐야? 왜 거기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와?”
무영이 물었다.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헌터래. 레이드를 하다가 청력을 잃었나봐.”
“그런데?”
“일행이 그 여자 욕을 하고 있더라고.”
“그래?”
“응.”
“그래도 못 들으니까 기분 나쁠 일은 없겠다.”
“구화가 가능해. 입술을 읽고 대화를 하는 거지. 아마 멀리 있었어도 입모양으로 자기에 대해서 말하는 걸 알았을 거야.”
시현이 그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고 했는데?”
“공대장이 그 여자를 공대에 두는 건 그 여자랑 같이 자서 그런 거라고.”
“충분히 나올만한 얘기기는 하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공대에 전력 손실이 크다는 건데. 실력이 월등했으면 애초에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겠지. 실력은 그냥 평균 수준이고 공대장이랑 사적으로 친분 쌓아서 공대에 들어간 거라고 하면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뭐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무영의 말을 듣고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신경 쓰이냐?”
무영이 물었다.
“모르겠다. 애들은 어디 갔어?”
“몰라. 가방은 놓고 갔으니까 오겠지.”
시현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이 자식 봐라. 원래 아는 사람이야?”
시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무영이 물었다.
“아니. 화장실에서 만났어. 거기가 여자 화장실인 줄 알았나봐.”
“헌터랬지? 몇 급인데? 이름은 뭐래?”
“하정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시현은 헌터 협회에 접속해서 헌터명부를 볼 수가 있었다.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확인해 보라는 뜻이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너희들은 내가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서 너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냐? 나중에 너희들 상처받지 말라고 이러는 거야. 저 여자가 너를 속이는 거면 어쩌려고? 저기에 앉아 있는 놈들도 다 전부 한 패거리고 네 동정 사려고 안 들리는 척 하는 거면? 그랬다가 우연을 가장해서 몇 번 더 만나고 그러면 너같이 순진한 애 마음 얻는 건 금방일 걸? 안 그래?”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그래. 설마 그렇게까지 충분히 할 수 있어. 현신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는 사람들은 네가 클랜 마스터님이랑 치안대장님 아들이라는 거 다 알잖아. 그런 사람이랑 잘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더군다나 여자라면 더 좋은 기회를 생각해 볼 수도 있잖아. 잘 하면 클랜 마스터님이랑 치안대장님의 손자를 낳을 수도 있는 거고. 그야말로 신분 상승의 기회지.”
“너는 하여간. 생각하는 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무영을 바라보았다.
“확인할 수 있는 건 미리 확인하자는 게 뭐가 나빠?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라고 말하는 건 게으른 거고 자신의 삶에 무책임한 거야. 알아?”
무영의 말을 들으면서 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정원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힐끗 바라보았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현신 선배들이 먼저 일어나는 게 보여서 시현과 무영은 동시에 일어나 그들에게 인사를 하며 배웅을 했다.
“야. 저 선배님들은 우리가 얼마나 예쁠까? 나라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아. 엄청 잘 나가는 놈들인데 잘난척 하지도 않고 뻐기지도 않고 예의바르지, 실력있지, 자기들한테 선배 대우 잘 해 주지.”
무영의 자뻑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현에게 무영이 제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이미 헌터 협회 홈페이지에 접속해 있었고, 헌터 명부 등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시현은 한숨을 푸욱 쉬고 용하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시현 역시 관심이 생겼다. 하정원이라는 헌터에 대해서.
명부에는 회원의 정보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하정원이 E급 헌터라는 말도 맞고 레이드 도중에 청각을 상실했다는 것도 맞았다.
“현재 블레이드 공격대 소속이래. 블레이드 공격대라는 곳도 있어? 들어본 적 있어?”
무영이 물었다.
“아니.”
“이름이 뭐가 이렇게 구려? 야. 헌터 협회보다 익스트림 헌터 길드 정보가 더 빠방하겠다. 정규 공격대에 소속돼 있는 헌터니까 익스트림 헌터 길드에 소속돼 있을 텐데. 응?”
“안 될 걸? 이런 이유로 어떻게 그런 걸 봐? 그리고 길드에 접속할 권한은 나한테도 없어. 헌터 협회 명부에 접속하는 것도 어차피 내 권한이 아니고 삼촌 권한이긴 하지만.”
“그 자식 참! 야. 네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을 것 같아? 여자는 정말 신중하게 잘 만나야 하는 거라고. 여자랑은 갑옷이랑 무기도 다 벗고 같이 누워서 여자 앞에서 자는 거잖아.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는 거잖아. 거기다가. 여자가 이것 저것 먹일 거 아냐. 혹시 약물이나 독 같은 걸 타서 준다고 해 봐.”
“길무영. 제발 좀 현실적인 생각을 해라.”
“이런 게 현실적이지 않다는 편견을 버려. 너는 너무 그냥 그 뭐냐. 하여간. 그래.”
무영은 길드의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듯 보였지만 어쨌거나 헌터 협회의 자료로 정원에 대해서 파악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 즈음에 정원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점점 소리가 요란해졌다.
“앉으라고! 말 아직 안 끝났잖아. 아아. 이럴 때는 안 들린다고 하고 잡아 뗄 건가? 그것 참 편하네. 앉으라고 했다. 사람 말이 좆같냐?”
큰 소리가 나오자 무영과 시현이 동시에 일어섰다.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정원의 팔을 억지로 잡아서 자리에 앉히려고 했고 정원이 팔을 빼면서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시현의 걸음은 어느새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영도 이제 어쩌는 수가 없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그리로 향했다. 싸움이 난다면 자기도 거들어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스마트폰 버튼을 눌러 효재를 호출했다.
“어지간히 물고 빨아댔으면 안으로 들어와봐. 싸움날 것 같은 분위기니까.”
그래놓고 시현의 등 뒤를 바짝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