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281화 (281/331)

0281 / 0331 ----------------------------------------------

11부. 콜로니

“조루 아니야, 개새끼야!”

효재는 잘 나가던 방향이 길무영 때문에 또 샛길로 빠지자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는데 말이야. 어렸을 때 자위를 하면서 자괴감을 느꼈던 게 요즘에는 화가 난대. 이 사람 저 사람이 만들어 놓은 너무 많은 금지와 금기와 터부 속에서 아버지는 너무 많은 즐거움을 잃었다는 거지. 내가 봤을 때 그건 우리 아버지가 하실 말씀은 아니거든? 그 누구보다 알차게 그 시간들을 보내신 분 같은데. 하여간 아버지 말씀이 지금은 발기도 잘 안 되고 지속시간도 짧고,”

무영의 강의가 길어질 듯 하자 시현이 무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길무영. 제발 그런 얘기는. 아우! 사람들이 우리를 다 같이 싸잡아서 변태라고 생각할 것 아냐!”

“그래. 그래. 잘하는 짓이다. 혼자서만 고상한 척 하겠다는 거잖아. 그래도 이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여기 있는 세 사람 중에 아직 순결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무영이 말했다. 무영은 자기가 공격을 성공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뭐지. 이 패배감은?’

무영은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다른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효재와 시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순결, 예쁘게 간직해라. 네가 이겼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시현이 말했다.

채미영은 몇 번 효재를 찾아왔다. 그러나 효재를 만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효재에게 전화를 하면 길무영이 전화를 받았다.

“민효재 폰이지만 민효재는 선배와 통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민효재한테 접근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민효재. 볼 것도 없는 놈이잖아요.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선배가 시현이나 저한테 접근을 했다고 하면 선배가 꽃뱀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런데 민효재라니! 그건 너무 비열한 짓이라고요. 제가 생각을 해 보니까 결론은 하나던데. 나는 선배가 무슨 꿍꿍이를 갖고 민효재한테 접근한 건지 알아냈어요. 안시현은 처음부터 너무 높은데 있는 애라서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선배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한테 시선을 돌린 거예요. 훗. 내가 보였겠죠. 나는 현신고등학교에서부터 날렸던 일짱이니까.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도 알게 됐을 거고 내 고귀한 피에 대해서도 알게 된 선배는 어떻게든 나와 친해질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때 효재가 보였겠죠. 적당히 효재를 데리고 놀다가 효재가 당신한테 빠지면 그때 나와 효재의 우정을 이용해서 나한테 접근하려고 한 겁니다.”

채미영은 더 이상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꽤 집요하군요. 그 계획을 이룰 때까지는 절대로 효재를 놔줄 수 없다는 겁니까?"

“너.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린다! 알아서 피해 다녀! 아우, 재수없어!”

무영은 역시 자신의 추리가 정확했으며, 무영의 날카로운 추리에 자신의 속내를 간파당한 채미영이 효재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절대로 혼자 하지 않았고 효재와 시현에게도 알려주었다. 효재와 시현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설득이 되어서 나중에는 절반쯤 넘어가 버렸다.

이유야 어찌됐건 간에, 채미영은 그후로 효재에게 접근하지도 않았고 기숙사 식당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생기거나 아카데미에서 마주치게 돼도 자기가 먼저 피해버렸다.

민효재에게 강렬하게 휘몰아쳤던 봄바람은 그렇게 사그라졌다.

자신의 약점이 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효재에게 여러 가지로 이익이 되었다. 효재는 자기가 유혹에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그거야말로 전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효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독에 내성이 없는 것처럼 유혹에도 내성이 없었다. 그러면 그것을 조심하면서 피하면 되는 거라고, 효재는 긴 고민의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

결국 임시 휴업 결정이 내려졌다. 다른 나라에 나타난 콜로니를 공략하는 일 때문에 헌터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을 중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하는 것 때문에 오랜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가닥이 잡혔다.

지금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 강력한 콜로니가 한국에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고, 아직 한국이 안전 지대일 때 콜로니의 특징을 빨리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론이 번진 까닭이었다.

레오니드와 미하일은 클랜 A와 합류하는 것이 당연했고 세진도 돌아갔다. 클랜원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헌터 아카데미의 많은 교수들이 미국의 콜로니 공략행에 함께 했다.

클랜 A와 그 일행들이 콜로니로 떠나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시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클랜 A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클랜 A의 숙소로 찾아갔던 시현은 오히려 클랜원들이 자신을 위로하는 바람에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클랜원들은 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왜 그래? 누가 또 시현이한테 겁 줬어? 얘가 왜 우는 거지?”

이익헌이 그렇게 물었다. 이익헌이 묻는 거라서 다른 사람들은 안심을 했다. 그들 중에 그런 거짓말을 할만한 사람은 이익헌 뿐이었을 텐데 이익헌이 그러지 않았으면 걱정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시현아. 콜로니야, 콜로니. 늪이 아니고. 콜로니를 완전히 소멸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할 거야.”

지우가 말했지만 시현도 세진에게서 배운 게 있어서 콜로니의 공략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로 우리를 위험에 빠뜨려가면서 무리하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우리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거지.”

임정이 말하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말 그들이 그렇게 스스로의 안전을 챙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죽지 않아. 윤해민 교수가 해 준 얘기가 아직 실현이 안 됐거든.”

미하일이 그렇게 말하고 시현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 시현이도 이제 내년이나 내후년부터는 우리랑 같이 다닐 수 있겠죠?”

강현이 지우에게 물었다.

“내년부터는 같이 다녀야지. 내후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그러니까 안시현. 열심히 훈련해야 된다.”

이익헌이 말했다.

“네.”

모두들 쉬면서 차크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에 시현은 떠밀리다시피 그곳을 나왔다. 그러나 시현이 떠나기 전에 이익헌이 할말이 있다면서 시현을 쫓아 나왔다.

“무슨 일이야, 삼촌?”

“야, 안시현. 너. 지금 사귀고 있는 애 없지?”

“응. 왜?”

“윤해민 교수하고는 완전히 끝난 거지?”

“응. 그런 거지.”

“서로 연락도 안 해?”

“응.”

“이 자식 냉정하네.”

이익헌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냉정한 건 내가 아니라 교수님이지.”

“왜? 너는 연락을 해 보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안 받은 거야?”

“응.”

“찌질하긴. 헤어진 여자한테 왜 연락을 하냐?”

“그래도.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교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셔야 돼서 그런 거니까 나는 그 후에도 소식을 서로 전할 수는 있을 줄 알았지.”

“어쨌거나. 지금은 사귀는 여자가 없다는 거지?”

“어. 왜?”

“이제이라는 애하고는 어때?”

그냥 생각나서 한 말치고는 질문들이 꽤 집요하게 이어졌다.

“제이? 제이는 삼촌. 제이는 내 친동생 같은 애지.”

“그래? 잘 됐네.”

“왜? 소개해 줄 사람 있어? 그런데 지금이 그런 얘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때라고 생각해? 삼촌은 콜로니에 갈 게 걱정이 안 돼?”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는데? 그리고 지금이 딱 좋아. 너희는 임시 방학을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됐어. 가라.”

“뭔데 그래, 삼촌. 또 나 모르게 일 저지른 거 아니야?”

“일을 저질렀다고? 너 모르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너한테는 절대로 말 안 해 줄 거다. 가.”

이익헌은 혼자 돌아가버렸지만 고개를 돌릴 때의 표정에 웃음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이 꾸민 일이 뭐였는지는 늦지 않게 밝혀졌다. 현신 헌터 아카데미의 임시 방학이 시작된 첫 날, 아침부터 기숙사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무영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했고 무영 역시 끝까지 버텼다. 다른 때 같으면 효재가 일어나서 나가겠지만 요즘 효재의 컨디션이 영, 말씀이 아니어서 시현이나 무영이 아니면 나갈 사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침대 위에 버티고 있는 시현보다는 바닥에 누워있는 무영이 전적으로 불리했다. 어쩔 수 없이 무영이 일어서서 문을 열어주러 나갔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긁고 다른 손은 바지 춤에 넣은 채였다. 머리 긁던 손으로 문을 열어 주고, 아직까지도 잘 안 떠진 눈을 겨우겨우 뜨는데 방 문 앞에 어린 여학생이 서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헌터는 아니었고, 입고 있는 교복을 보니 현신 고등학교 학생인가 싶었지만 얼굴은 아무리 많이 쳐주려고 해도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 여기가 남자기숙사라는 건 알고 있지? 혹시 여장하는 게 취미인 남자냐?”

무영이 말했다. 시현은 길무영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면서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어!”

첫만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시현은 그 여자 아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야, 민효재. 일어나봐.”

효재가 이불을 천천히 내리면서 부스스한 머리를 먼저 내보였다.

“너. 옷은 다 입고 잔 거 맞지?”

시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왜?”

“됐어, 새꺄. 그냥 이불 덮고 있어.”

“왜애. 바지는 입었어.”

효재가 말했다.

“야, 쟤 좀 봐. 익헌 삼촌이랑 닮지 않았어?”

시현이 작은 소리로 말하자 효재가 눈을 비비고 문 밖의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

효재야말로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바닥으로 내려왔다.

“익헌 삼촌? 이익헌 사장님?”

무영이 뒤늦게 그 말을 알아듣고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진짜야? 너. 이익헌 사장님 따님이셔?”

반말로 시작했던 말이 갑자기 이상한 존댓말로 나와 버렸다.

“네.”

“헐. 진짠가보네. 그런데. 그래도. 이익헌 사장님 따님이어도 남자 기숙사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하긴. 세상에 안 되는 게 뭐가 있냐. 들어오실래요?”

무영이 말했다.

“현신고는 방학을 안 했어요. 현신고는 어차피 선생님들이 일반인이니까 방학을 할 이유가 없어서요. 학교에 가야 돼요. 조금 있다가.”

시현과 효재는 신기하다는 듯이 여자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야? 혹시 우리 전에 본 적 있어?”

시현이 물었다.

“아뇨.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이름은 이시아고요.”

“시아? 시현이랑 남매 같네. 이름이.”

무영이 말했다.

“안녕. 나는 민효잰데. 혹시 나를 알아?”

“오빠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어요.”

“근데 너. 고등학교에 다니기에는 굉장히 어려보이는데. 몇 살이야?”

무영이 물었다.

“열 세 살요.”

“컥!! 무슨 열 세 살이 고등학교에 다녀?”

시현이 물었다.

“현신에는 그런 제도가 있어. 시험을 봐서 그 과정을 합격하면 진급을 시켜. 시험을 봐서 일찍 진급 한 애들은 따돌림을 엄청나게 당해서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기는 하지만.”

무영이 말했다. 왠지 전문가의 냄새가 나는 것이, 따돌림을 주도하고 진급한 아이들을 따돌리도록 지시를 내린 사람이 무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