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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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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절묘하게 어긋났다. 원래 준비했던 시나리오는 이런 게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영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생긴 것이다.
채미영이 속한 3학년 헌터들이 시현을 안 좋게 보기 시작했고 그걸로는 약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제이를 괴롭혔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시현이었는데 시현을 건드는 것은 무서웠고 그냥 만만한 게 제이였다.
다른 기수에는 같은 기수의 여학생들과 자유분방한 섹스를 즐기는 관행 같은 게 만들어졌던 모양이었다.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일이고 어차피 서로들 성인이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3학년에게는 채미영이 문제였다. 퇴학을 당해서 재입학을 한 거든 뭐든 어쨌거나 3학년이 되었으니 그들은 채미영이 자기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채미영이 자기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고고하게 굴다가 1학년 주위에 얼쩡거리더니 민효재와 자주 만나는 것을 보고 3학년들의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3학년 선배들의 눈에 든 것은 제이였다. 효재가 눈 앞에서 채미영과 떠나버리는 것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제이는 멍하니 걸어가다가 3학년 선배들이 무더기로 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3학년들은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1학년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던 터였기에 제이에게 한 마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제이는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은 와중에 누군가 따귀를 때려준 격이 되어서 북받치는 설움을 실어서 울어댔다.
효재와 제이보다 조금 뒤처지기는 했지만 무영과 시현도 강의실에서 나오고 있었고 때마침 그 모습을 봐버렸다.
무영은 그 전부터의 상황을 유심하게 살폈기에 뭐가 어떻게 된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시현은 오해를 하고 말았다.
시현이 제이와 3학년들에게 달려가는 동안 무영은 제 차를 가지고 곧바로 티 레이크 호텔을 향했다.
그 근방에 있는 호텔이 그곳뿐이라는 생각에 그리로 향하기는 했지만 효재가 몇 호실에 투숙했는지 모르는 이상 호텔에 가더라도 효재를 찾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은 가는 도중에야 깨달았다. 그래서 로비에서 방황하던 도중에 민효재를 발견한 것이다. 효재를 끌고 나오면서 무영은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마구 얘기를 해댔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시현은 3학년 선배들이 제이를 괴롭힌다고 생각하고 제이에게 달려갔다. 뒤따라오던 무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혼자 뛰어가더니 자기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 버리는 것을 봤을 때는 그야말로 황당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요즘 제이의 기분이 좋지 않은데 제이가 동네북도 아니고 3학년 선배들한테까지 꾸중을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이제이. 무슨 일이야.”
시현이 물었다.
제이에게 묻는 것처럼 하고는 있었지만 시선은 3학년 선배들을 향해 있었다. 3학년들도 바보는 아니었고 시현이 자기들을 도발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할 거야?”
3학년들은 시현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둘러서서 회의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안시현이고, 자기들이 3학년이 아니라 13학년이라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런 것은 없고 헌터 아카데미는 4년제다) 안시현을 건드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헌터가 된 사람들이고 레이더가 돼야 할 사람들이고 정규 공격대에 들어가서 차근차근 등급을 올려가는 게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시현과 척을 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하는 거 아니겠어? 우리는 3학년이고 4학년 선배들은 이런 일에 신경쓸 여력이 없고. 이건 우리가 해야지. 현신 헌터 아카데미가 콩가루가 되는 걸 보고 있을 거야?”
누군가 그럴듯한 말을 했고 그 말에 바로 이견이 나오지 않자 모두가 일렬로 서서 시현을 노려보았다.
“안시현. 고깝게 듣지는 마라. 우리도 클랜 A의 헌터님들을 모두 존경하고 있고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너하고 나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현신 헌터 아카데미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어.”
어쩌다 보니 앞에 나가서 말을 하게 된 녀석은, 왜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고 난감해 했다. 그냥 적당히 물러나 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자기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우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희는 1학년이잖아. 너희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고 시작을 했더라도 선배라는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자라는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까. 너희도 질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 줘.”
선배가 그렇게 말을 하자 시현이야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건 줄 몰랐어요. 제가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시현이 말했다. 그러면서 제이에게 물었다.
“너는 왜 울었던 거야?”
제이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효재 때문에 속이 상했던 차에 그냥 울어버린 거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제가 오해했습니다.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시현이 거듭 그렇게 사과를 하자 3학년들이야말로 겁을 먹었다. 자기들이 만약 시현과 같은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남한테 고개를 숙이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자기들이 제이를 괴롭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면 정말로 재미없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3학년들은 서로들 입단속을 시킬 목적으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래. 사람이 괜찮네. 그래. 알면 된 거야. 다음부터는 좀 더 서로 주의하자.”
얼결에 대표가 되었던 녀석이 시현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덕담을 하는 순간이었다.
무영의 차가 급정거를 하고 그 안에서 효재가 뛰어 나왔다. 효재는 그동안 훈련했던 대로 다리에 차크라를 실어서 그곳까지 한순간에 달려와 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효재가 3학년 선배의 팔을 힘주어 잡아 꺾어버렸다. 선배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현과 제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3학년 선배의 팔이 덜렁거리게 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 너……! 너, 이런 썅!”
3학년들은 그렇지 않아도 사건의 원흉이었던 민효재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무 말도 없이 선빵을 날리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효재의 눈에는 시현이 선배들에게 다굴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 시기의 효재의 판단력은 계속 그따위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선배님들! 이 새끼가 미쳐서 그러는 거예요!”
시현이 바닥에 납작 무릎을 꿇었다. 효재는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시현을 향해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비굴하게 굴 것 없어. 안시현. 이 정도는 우리가 다 해치울 수 있어!”
“해치우긴 뭘 해치워, 개새끼야!”
시현이 효재의 어깨를 잡아서 뒤로 치워놓고는 다시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읍소를 했다. 3학년들은 자기들끼리 다시 눈짓을 했다.
“어차피 힘으로 하면 우리가 절대로 저 놈들 못이겨. 그러니까 자애로운 선배인 것처럼 이미지를 굳히자.”
“그래. 그게 좋겠어. 그렇게 하면 나중에 우리가 2학년들한테 당할 일이 생길 때 쟤들이 도와줄지도 몰라.”
“그래. 맞아. 그게 좋겠어. 얘들은 그래도 예의는 바르네. 2학년들이랑 붙을 때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 너는. 아파도 좀 참아. 병원에 가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3학년들은 쑥덕거리고 다친 녀석을 다독거리고 곧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좋아. 우리가 선배고. 안시현이 또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까. 그래. 알았어.”
시현은 효재의 어깨를 콱 잡아다가 효재의 머리도 억지로 숙여놔 버렸다.
“이 자식도 얼이 빠져 있어서 그렇지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선배님들이 이해해 주세요. 그냥 그. 청춘이잖아요. 아하하하하.”
시현이 어울리지 않게 웃자 어색해 미칠 지경이 된 3학년 선배들도 아하하하하, 하고 따라 웃어주었다.
센 후배가 들어오는 것은 이래저래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효재는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들어들 가라.”
3학년들은 드디어 이 센 후배들과 관계를 정리했다는 생각에 꽤나 만족스러워하며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해서 자기들이 가야 하는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갔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후에도 돌아설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모두가 다 휙 돌아서 가는 것은 굉장히 이상해 보일 거라는 의견 교환 후에 그들은 가던 길로 쭈욱 걸어갔다.
시현은 효재를 돌아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참어? 선배들이 너한테 왜 그러는 건데?”
효재가 말했다.
“민효재.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 알았어?”
시현이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효재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알아. 우리는 청춘이고 원래는 이렇게 막중한 책임을 떠맡을 나이도 아니었을지 몰라. 그렇지만 지금 시대가 이렇잖아. 시대가 우리한테 많은 걸 기대하고 있고. 교수님들도, 클랜 A의 헌터님들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우리가 빨리 준비돼야 우리도 우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우리는 계속 우리일 거야. 민효재. 우리가 아닌 척 하자는 게 아니야. 단지.”
시현이 말했다. 앞에 나온 말은 그럭저럭 잘 나온 것 같았고, 효재는 기대감이 증폭된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단지' 뒤에 붙일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email protected]하자!”
무영이 얼렁뚱땅 효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시현은 무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내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는데 말이야.”
무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말했다. 모두가 무영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민효재는 조루야. 틀림없어. 강의 끝나고 몇 분이나 지났다고 벌써 끝내고 내려오냐고. 내가 호텔 로비에 갔는데 그때 민효재가!”
효재는 말이 그쪽으로 갈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예상치 못하게 봉변을 당하고 무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이는 귀까지 빨개진 채로 혼자 뛰어가 버렸다.
“길무영.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어?!”
효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뭘 잘 했다고 말을 해? 그냥 닥치고 근신하고 있어, 인마. 다른 때였다고 하면 내가 이해를 하겠다. 이렇게 어수선할 때에 꼭 그러고 돌아다녀야 하는 거였냐고!”
무영이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그 말이 나오자 효재는, 거기에 대해서는 자기도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시현이 효재의 목을 확 끌어당기면서 효재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래서. 총각 딱지는 뗀 거냐? 채미영 선배한테 많이 배웠어?”
“뭘 배워. 내가 가르쳤지.”
“웃기고 있네. 네가 뭘 가르쳤는데?”
시현이 계속 추궁을 하자 효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미안하다. 면목도 없고. 나 진짜. 내가 이렇게까지 의지가 약한 인간인 줄 몰랐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희가 나 좀 도와줘. 혼자 나가려고 할 때 너희가 나 좀 막아줘. 가두거나 묶어도 돼. 나라는 인간이 너무 싫어서 죽어버리고 싶더라.”
효재가 말했다. 그러자 길무영이 의젓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당연해. 조루라니.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래도 방법은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