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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278화 (27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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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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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현과 무영, 효재가 앞에 나란히 앉았고 제이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었다. 괴수분류학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수업에 제대로 집중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현이 효재를 슬쩍 봤다가, 무영이 효재를 슬쩍 봤다가 시현과 무영이 서로 보면서 도대체 효재가 왜 저러냐고 눈으로 묻기도 했다.

제이는 더 기운이 없었고, 세 사람이랑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제이가 먼저 나갔고 효재도 곧 혼자서 가 버렸다.

“쟤들 진짜 왜 저러냐?”

시현이 무영에게 물었다.

“내가 저런 표정에 대해서 좀 알지.”

무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런 표정이 무슨 표정인데?”

“연약한 자신을 시험해 보자고 생각하면서 단 하루만이라도 딸을 치지 말고 넘어가자고 별렀는데 다시 또 유혹에 넘어가서 딸을 치고 났을 때의 자괴감을 느껴본 적 있냐?”

“있을 것 같냐?”

시현이 말했다. 무영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까 해서 물었는데 웬 미친소리만 해 대는 걸 들으니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 머릿속에는 언제나 그런 것밖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효재가 괜히 이상해지는 바람에 무영이말고는 같이 다닐 사람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이만저만 난감해진 게 아니었다.

“너.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 같아?”

“뭔 개소린데, 또!”

시현이 무시를 해도 무영은 혼자서 진지했다.

“그런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 것 같냐?”

“대체 뭔 소리냐고. 효재가 그런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했다고? 아니. 그런데 애초에 그런 계획을 왜 세워? 생각 났을 때 후딱 쳐버리고 정신 말짱하게 집중해서 생활하는 게 낫지 효재는 왜 그런데?”

“병신이냐? 말을 그렇게밖에 못 알아듣냐? 민효재같이 고결한 애가 육체의 연약함에 넘어져버린 거지. 그게 누구겠냐? 이제이 태도를 봐서 추측을 해봐.”

“제이? 설마! 제이랑 효재하고 그렇게 된 거야?”

시현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영을 바라보았다. 진짜 그런 거냐는 표정으로 아예 무영을 퍽 때리기까지 했다.

“너는 그냥 바보냐, 안시현? 뇌는 그냥 장식용으로. 아니지. 너 정도면 뇌가 아예 없는지도 몰라.”

“아니라고? 그럼 뭔데. 그냥 쉽게 말해봐. 하, 개새끼. 사실은 너도 모르는 거지? 그러면서 아는 척 했다가 내가 기대하는 것 같으니까 수습 안 돼서 그러는 거지? 너 하는 짓이 그렇지!”

시현이 이번에도 낚였다는 듯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채미영이 효재를 갖고 논 것 같은데.”

무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생각을 다듬고 있었다.

“어어? 채미영 선배가?”

“시간상으로 맞는 것 같아. 채미영을 만나고 와서 효재가 너한테 그 일에 대해서 얘기한 적 없지? 너희 둘만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기숙사랑 체육관에서 나도 거의 같이 있었잖아. 그런데 효재가 채미영 얘기 한 적 없지. 안 이상하냐?”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말할 꺼리도 없이 그냥 간단하게 끝났으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이도 아무 말 안 하잖아. 두 사람이 나갔을 때의 태도가 어땠냐? 채미영을 당장 어떻게든 해서 정의를 구현하려는 태도 아니었냐고. 너한테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할 것 같지 않았냐고.  그러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아무 말도 없고 두 사람 사이도 서먹해졌고 우리한테도 얘기를 잘 안 한다는 건.”

무영의 얼굴을 보면서 시현은 자기가 놓친 게 뭔지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채미영에 대해서 내가 좀 조사를 해 봤거든? 놀 줄 아는 선배더구만. 여기에서 퇴학당하고나서 공격대에 들어가긴 했나봐. 거기에서 같이 있었던 여자 헌터를 만나봤거든. 내가.”

“네가? 어떻게 알아내서? 하여간 너라는 놈도 진짜. 추진력은 진짜 대단하다.”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야. 채미영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여자일 수도 있다고. 평이 안 좋아."

"여자가 다른 여자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는 거 봤냐?"

"왜 이러셔? 그건 편견이야. 우리 엄마도 너희 엄마에 대해서는 엄청 좋게 평가해. 다시 태어나면 너희 엄마처럼 되고 싶대."

"설마."

"나도 설마라고 생각한다. 너희 엄마 정도 되니까 클랜 A랑 치안대에 대한 사람들 인상이 이렇게 좋은 거지 만약에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여서 클랜 A 클랜원이고 치안대장이고 그런다고 해 봐. 우리 엄마가 늪 아래로 내려가면 괴수들도 짜증낼 걸? 우리 엄마가 치안대장이고 클랜 A고 그랬으면 사람들은 덮어놓고 막 악감정 품고 반감 갖고 그랬을 걸? 우리 엄마가 익스트림 헌터 모델로 나선다고 생각해 봐라. 익스트림 헌터 제품 불매운동 하고 싶어질 걸?"

무영이 말했다.

장난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 엄마한테 저렇게까지 애정이 없을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가끔 생기기는 했다.

"그래서 나도 엄마한테 확실하게 말해줬어. 다시 태어날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이번 인생이나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라고 말이야."

무영이 말했다.

"하던 얘기 계속 해 봐."

"아, 그래. 채미영 말인데. 헌터로서의 실력은 꽝이고 훌륭한 헌터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그냥 괜찮은 남자 하나 꼬셔서 편하게 살겠다는 마음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게 채미영에 대해서 내려진 평가야."

"그래?"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채미영이 사람 마음 하나는 그렇게 조종을 잘 한 대.”

무영이 말했다. 그게 핵심이고,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듯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채미영 선배랑 같은 공격대에 있었다는 헌터한테서 들은 말이야?”

“선배라고 할 것도 없어. 제이랑 효재를 저런 표정으로 만들어 놓은 걸 보면 분명히 두 사람한테 주술을 건 거야.”

“주술?”

“이 자식은 내가 비유를 하면 그걸 그대로 믿지. 주술은 아니고 애들 심리를 이용했겠지.”

“애들 심리라니? 효재 말하는 거야? 효재 심리가 어떤데?”

시현도 무영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다시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안시현. 이 일은 너 때문에 일어난 거나 다름이 없어. 효재가 너 대신에 그 자리에 나간 거잖아. 그리고 효재는 너만큼 뻔뻔하질 않아. 효재는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한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존감이 심각할 정도로 약해. 자존감이 약한 사람은 그런 유혹에 잘 넘어가. 고립시키려는 시도 말이야.”

“고립시키려는 시도라니?”

“자꾸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이 효재를 싫어할 거라고 믿게 만들고 실망하게 될 거라고 믿게 하는 거지.”

“그렇게 해서 뭘 노리는 건데?”

“너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사람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서 너를 이해해 줄 수 있다. 이렇게 해주는 사람은 없다. 나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잘해야 된다.”

“채미영 선배가? 공격대에 있을 때도 그랬대?”

“야. 채미영이 공격대에 들어갈 실력이 되냐? 된다고 생각해?”

무영이 말했다.

“아니? 그 선배 경력이라고 해 봐야 퇴학 당하기 전에 헌터 아카데미에 다닌 게 전부잖아. 레이드 경험도 거의 없을 걸? 그 선배 아직도 F등급일 거고. 그런 선배가 정규 공격대에 들어갔다는 게 이상하기는 해. 정규 공격대에서 그런 헌터를 받아주는가 싶기도 하고.”

“그렇지? 그런데 공격대에 있었다니까? 그게 왜라고 생각해?”

“……. 그러게. 뭐지? 효재처럼 정신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가?”

“능력? 채미영이? 웃기고 있네.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채미영도 그렇게 걸레같이 살지는 않았겠지."

"그럼 어떻게 들어간 건데?"

"너같은 애들이 모르는 다른 세상이 있는 거라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진 능력대로 대우를 받는 건 아니야. 능력에 맞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지. 그래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거야. 솔직히 나나 효재를 봐라. 우리는 그냥 F등급 딜러일 뿐이지만 너라는 줄을 잡으니까 클랜 A 클랜원들한테 직접 배울 기회도 얻고 익스트림 헌터에서도 특별대우를 받는 거잖아.”

"쉽게 말해, 좀."

"채미영이 특유의 그런 걸로 효재를 조종하는 거 아니겠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효재가 채미영 선배를 계속 만나는 걸까?”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 년은 선배도 아니라니까.”

“알았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채미영을 찾아가서 효재한테서 떨어지라고 할까? 아니면. 효재한테 직접 말할까?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멜로 찍냐? 지랄을 해라.”

“그럼 어쩌라고, 병신아!”

뭘 어떻게 하라고 딱히 알려주지는 않고 무영이 혼자 으스대는 바람에 시현도 화가 났다.

“민효재를 정신 차릴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냐?”

“그렇게 묻지 말고 그냥 말해, 개새끼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사실은 너도 모르는 거지?”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정신차리게 만들려면 그 사람을 괴수한테 던져주면 돼. 한가로울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이 다 들어도 일단 괴수가 앞에 나타난 걸 보게 되면 거기에서 도망쳐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지.”

“효재를 괴수한테 던져주자고?”

“아니. 그만큼 절박한 일을 만들어주면 되지.”

“효재한테 그만큼 절박한 일이 뭔데? 혹시 할머니? 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려고?”

“할머니만큼 절박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지. 민효재가 할머니만큼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게 누군데?"

시현이 물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무영이 시현을 보고 웃었다. 시현은 도대체 이 자식의 꿍꿍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

다시 또 와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효재는 나무 기둥을 손등으로 쳐버렸다.

이렇게 강렬한 유혹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 페니스를 잡아 훑어대던 채미영의 손길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느낌을 지우려고 해도 도무지 되질 않았다.

자연스럽게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렇게 자기가 헛된 데에 눈을 판 사이에 다른 애들은 저만치 앞서가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채미영의 주위를 기웃거렸다.

제이와 함께 채미영을 만나러 갔던 날 이후, 효재는 채미영에 대한 생각을 거의 떨치지 못하고 있다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채미영을 만나러 갔다.

3학년 수업이 있는 강의실을 기웃거리는 효재를 보고, 강의실에서 나오던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효재 역시 유명인사여서 효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효재는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돌아선 채로 채미영을 기다리다가 수업을 듣고 나오는 채미영의 뒤를 따라갔다.

채미영은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기숙사에서 지내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 식사를 할 때도 기숙사 식당을 이용하기보다는 혼자 나가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채미영은 효재가 따라가는 동안 아는 척을 한 번도 하지 않더니 자신의 차에 타기 전에 문을 열어 주었다.

“운전은 할 줄 알아?”

효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네가 운전할래?”

효재는 운전석에 앉았다.

“멀리 가지는 않아도 돼. 멀리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고.”

다리 사이로 채미영의 손이 들어왔다. 효재는 급히 숨을 들이쉬고 채미영을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는 않아.”

“…….”

효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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