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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시현이 효재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효재도 시현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공격을 한 번 하고나서 꼭 정보창을 확인했다. 레오니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이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한 번의 공격을 하고 괴수의 체력을 깎아본 사람이 처음 경험하게 되는 환희는 어디에도 비교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시현은 너클을 낀 주먹으로 전력으로 베니를 공격했고 효재는 베니의 몸 깊이 검을 찔렀다. 베니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딜을 가하기 위해서는 차크라를 다시 충전해야 하고 차크라를 재충전하는데 7초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타이밍 조절을 잘 하지 못한 채 서둘렀다.
공격을 하고 바로 정보창을 보는데 베니의 체력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아쉬워하면서 빨리 다시 차크라가 차기를 기다리는 것도 여느 신입 헌터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레오니드는 시현이 베니를 공격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효재 역시, 시현이라는 천재를 만나지만 않았으면 무리 중에서 간단하게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녀석이었지만 시현이라는 벽은 너무 막강했다.
레오니드는 시현의 타격을 눈으로 보면서 헛웃음만 지었다. 저 차크라가 제대로 다듬어지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것에 대해서는 레오니드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일단 물러나. 곧 베니가 움직일 거다.”
레오니드가 시현과 효재에게 말하자 두 사람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먼저 늪을 나가라. 공략이 목적인 건 아니니까 여기에서 마무리 짓자.”
“넵!”
무영이 가장 먼저 대답을 하고 제가 먼저 나가려고 하더니 제이를 잊었다는 듯 돌아와서 제이를 챙겨 늪을 빠져나갔다. 이제 제이는 무영에게 그 누구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범식이 같은 꼴이 나면 안 되기에 제이를 소중하게 다뤄야만 했다.
네 명 중 공동 3위라는 타이틀에 그럭저럭 적응을 해 가고 있는데 세 명 중 단독 3위를 맡아놓고 혼자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늪 밖으로 나갔을 때 역시나 가장 말이 많았던 사람은 무영이었다. 시현과 효재에게 각각 순발력이 부족했다느니, 과감하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여러 소리를 해댔던 것이다.
제이는 시현과 효재에게 무섭지 않았냐고 물어보면서 자기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일단 해 보면 그 짜릿한 기분은 못 잊을 걸? 내가 어쨌거나 괴수의 체력을 조금은 다운시킨 거잖아. 이렇게 나와버려서 리셋되기는 하겠지만. 아깝다. 그렇지?”
효재가 시현을 보고 말하자 시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몇 백만의 체력 중에 둘이 합해서 만도 깎아내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괴수를 몇 천 마리쯤 한 큐에 잡아버린 것 같았다.
레오니드가 곧바로 그들 뒤를 따라나왔다.
“다들 어때, 기분이? 첫 공격을 한 기분 말이야. 무영이랑 제이는 조금 후에 그 기분을 느껴보게 될 거고.”
레오니드가 묻자 효재가 고개를 저었다.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요. 생각이 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효재가 말하자 시현이 입을 열었다.
“제 앞에서 어떤 봉우리가 퐁, 하고 열리는 것을 본 것 같아요. 진짜 재미있었어요.”
“나도 해 봐야지. 일단은 무기를 사고!”
무영은 두 사람의 꿈에 젖은듯한 눈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말했다.
***
현신 헌터 아카데미에서 네 명의 헌터가 왔다는 말에 익스트림 헌터의 무기 마스터인 채준형이 직접 매장으로 내려왔다. 채준형은 제이까지 네 사람을 각각 보더니 눈대중으로 갑옷의 치수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이제 이렇게 한 팀이 되는 건가?”
준형이 물었다.
“아직은 몰라요. 원래는 한 명이 더 있었는데 도중에 낙오했거든요. 제이도 좀 불안불안하죠. 아마 우리 셋이 한 팀이 되는 건 확실할 것 같은데 제이는 좀 더 두고봐야하기는 하죠.”
무영이 말을 하자 채준형이 고개를 저으면서 제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애랑 다니느라고 힘들겠다.”
채준형이 말했다.
“말도 못하죠. 죽이고 싶을 때가 하루에 몇 번인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용케 참았네?”
“성격이라도 좋아야한다는 말을 지금까지 계속 들으면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성격 좋은 척 하려고 참는 거예요.”
제이가 하는 말을 듣고 채준형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스타일도 좋은데? 뭐가 어디가 어때서 성격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데?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한 건데?”
채준형은 제이가 할 말에 기대를 하면서 물었다.
“그런 말을 안 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걸요?”
“여기있는 녀석들도 다 그랬단 말이야?”
준형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제이야! 그건 아니지. 내가 언제 그랬는데?”
시현과 효재가 동시에 말했다.
“외모를 가지고 놀린 적 있잖아. 너희들도.”
제이는 준형을 믿고 아예 작정을 한 듯이 말했다.
“이제이. 나는 정말로 제이 네 외모에 대해서 말한 적 없는데?”
효재가 자신있게 말했다.
제이도 자기 외모가 예쁜 축에 속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편인 효재가 아카데미 기숙사 식당에서 노랗고 짧고 통통한 파프리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제이 닮았다고 뛰어왔던 걸 생각하면.
제이는 늘 그런 역할이었다. 시현이나 효재, 무영 할 것 없이, 뭐. 무영은 상관없으니까 그렇다 치고, 시현이나 효재가 언제나 귀여워해주는 여동생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현은 워낙 고귀하고 순결한 혈통을 가진 존재라서 거의 구름에 가려 안 보이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반면 효재는 달랐다. 섬세한 외모에, 가까워지면 말도 친절하게 했고 자상해서 스스로 시현을 포기한 여자들한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시현과 효재한테서 귀여움을 받는다니 부러움을 사는 게 당연할 수도 있지만 제이도 여자였고 그런 시현과 효재에게 귀여움을 받는다고 거기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였는데 컥 소리나는 킹카들과 늘 자연스럽게 어울려 다니면서 순간 순간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시현이나 효재 모두 예쁜 강아지를 귀여워해주는 것 같이 대하니 제이의 마음 고생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냥 아는 척 안 하고 지나가줬으면 하는 길무영은 가다가 꼭 저런 소리를 해서 사람 속을 뒤집고.
채준형은 그런 제이가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됐다. 채준형의 경험에 미루어 보았을 때도 제이는 보기 드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익스트림 헌터는 국내 최고의 기업이었고 선남선녀로만 가득가득 채워진 곳이었다. 고개를 돌려서 아무나 봐도 수준높은 미인들 뿐이었다. 그런데 제이를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성의없이 생겼냐, 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너무 귀여웠다. 젖살이 통통한 귀여운 아이가 화가 나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젖살만 빠지면 이쁘겠네. 너희가 제이같은 애들을 몰라서 그런다. 제이같은 애가 젖살이 빠지면 게임 끝나.”
준형이 말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이게 젖살이예요? 이건 근육이예요.”
시현이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제이의 볼을 주우욱 잡아 당기자 제이도 이미 기대하는 게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좋아. 얘들아. 어쨌든.”
채준형은 한바탕 웃은 다음에 수습을 하고 정리를 했다.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한 팀이 될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전력이 티나게 푹 떨어지면 균형있게 레이드를 하는 게 어렵지. 너희를 최고로 꾸며줄 테니까 기대해라.”
“저…….”
효재가 걱정된다는 듯이 채준형에게 슬쩍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저는…….”
“돈이 없다는 말은 안 해도 돼. 현신 헌터 아카데미 신입 헌터들한테 쓰라고 돈이 이미 들어와 있는 게 있다.”
“네? 누가요? 혹시.”
이익헌을 염두에 두고 효재가 묻자 채준형은 익명이라고 말했다. 익명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클랜 A가 배경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시현이에게만 물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지금은 콜로니까지 생겨나고 있는 판이었다. 시현이 믿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도록 시현의 동료들도 시현만큼이나 실력있는 녀석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다는 바보는 없었다.
레오니드 교수는 채준형에게 효재와 무영이 가진 재능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채준형은 흥미롭게 그 얘기들을 들었다.
“좋네요. 그런 정보들은 아주 유용하죠. 그리고 제이야. 언젠가 네가 잘 하는 걸 찾을 수 있을 거야. 오래 걸릴 수도 있어. 하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아저씨랑 약속하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 보니까 자기한테는 아직도 이렇다할만한 게 안 보이는 게 확실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비와 무기를 고르는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
레오니드는 클랜원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두루 보여주었고 늪 아래에서 만날 괴수에 따라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종류별로 갖추어 두는 걸로 하자고 말하면서 활과 석궁, 손도끼와 길고 짧은 검들을 사게 했다.
효재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가 레오니드의 솥뚜껑같은 손에 맞았다.
“제발 그런 말 좀 그만 해라. 하루종일 걱정만 하는 할머니하고 같이 있는 것 같잖아. 네가 도움 받아야 할 일이 있으면 도움을 받고 나중에 그걸 갚으면 되는 거잖아. 어차피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고 그때는 너희가 우리 자리를 대신해야 할 텐데. 우리도 다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자선사업을 하자는 게 아니니까 이제 그만 말해. 그 일에 대해서. 알았어?”
레오니드가 얼마나 사납게 말을 했는지 효재는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이 웃으면서 효재의 어깨를 쳐주었다. 무영도 얼찜에 그렇게 했다가 서로 분위기만 어색해져 버렸다.
“효재는 좀 이상한 것 같긴 해요. 저는 돈 굳어서 좋기만 한데.”
제이가 헤죽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채준형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장담하는데. 3년 안에 제이가 몰라보게 달라질 거다. 미리미리 제이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채준형이 말했다.
“왜요? 3년짜리 적금이라도 들어놨대요? 3년 지나면 만기 돼서 그 돈 찾아서 전신 성형수술이라도, 아얏!”
무영은 뒤통수를 쳐맞고 제이를 노려보았지만 제이는 이미 휙 지나가버렸다. 시현과 효재는 말을 안 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키득거렸다.
***
베니는 거의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헌터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아직은 자기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라고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인원이 그대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대로 나타나기만 한 게 아니고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신입 헌터들의 폼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지만 무기만은 날카롭게 빛났다.
베니는 거의 본능적으로 늪의 끝으로 도망쳤다.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베니한테는 강력한 독이 있으니까. 베니가 물어뜯으면 갑옷도 그냥 찢길 거다.”
베니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마구 뒤를 쫓아가던 무영은 레오니드의 말을 듣고 급정거를 했다. 이번에는 자기도 한 번이라도 공격을 해 보려고 용기를 한층 끌어올렸는데 레오니드가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다시 겁이 나 버린 것이다.
“아까처럼 하자. 내가 치명상을 입힐 테니까 그 사이에 공격을 해 보는 거다. 처음에는 제대로 안 될 거야. 마음도 서로 안 맞을 거고. 내가 저리로 가려고 했는데 왜 다른 녀석이 저리로 가나 하면서 불만도 생길 거야. 너희들이 어떤 자리를 선호하는지 지금은 너희도 모를 거야. 하다보면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우들이 생겨. 그걸 계속 경험을 하면서 너희의 파트너가 어떤 동작을 편하게 소화하는지도 이해를 해야 한다. 그런 게 반복되다보면 그런 게 팀웍이 되는 거지.”
레오니드의 말에 모두들 눈빛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