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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네. 매번 공동 꼴찌라도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정말로 제가 정한 목표는 그거예요. 공동 꼴찌라도 하자는 거요. 3등을 노리는 건 너무 어려울 것 같거든요.”
서규태는 어린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그 옛날의 써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우리가 가는 곳은 늪이다. 하지만 우리는 콜로니에 대비가 돼야 돼. 너희들이 마주한 세상이 간단한 곳이 아니라서 너희한테 미안하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너희들이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너희들한테 좋은 세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너희들이 이 세상에 맞설 수 있게 충분히 강해지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울 생각이다. 알았지?”
“네.”
모두들 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드디어 늪에 도착하고 서규태의 인도하에 모두들 늪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늪에 들어갈 때 숨을 꾹 참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규태가 웃음을 터뜨렸다.
“클랜 마스터가 숨을 참고 늪에 들어오던 게 생각난다. 다들 그러지. 늪 아래에 내려올 때는 그곳이 물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 때로는 정말로 그런 늪들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물로 가득 채워진 늪에서 사는 심해어 괴수를 공략해야 할 때도 있고 용암이 끓는 곳에서 괴수를 공략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지. 트랙을 도는 기계 괴수를 마주칠 때도 있고 말이야.”
“그건 야나 얘기죠?”
무영이 말했다.
“그래. 바로 야나였지. 야나를 공략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이 뭐였는 줄 알아?”
서규태가 물었다.
“야나가 내리는 눈요.”
“야나가 트랙을 너무 빨리 돌아서요?”
“트랙이 미끄러워서요?”
제각각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눈 앞에서 트랙을 도는 야나를 보고 우리 모두 반해버렸거든. 그래서 야나를 공격할 수가 없었어.”
“네? 정말요?”
제이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남자애들은 이해가 되지? 전부 야나를 봤잖아.”
서규태가 말했다.
“저도 야나를 보기는 했지만 써전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안 돼요.”
제이가 말하자 서규태가 웃었다.
“세진씨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 맵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중에 세진씨가 있었고 세진씨는 야나한테 아무 매력도 못 느꼈지. 제이야. 제이한테는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녀석들이 혹시라도 기계 괴수한테 정신이 팔려있으면 제이 네가 나서서 공략을 하면 되겠다.”
제이는 갑자기 세진을 목표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롤 모델로 정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이들이 그 목표를 월등히 뛰어넘는 순간도 올 거라고 생각하며 서규태는 웃음을 지었다.
다섯 사람은 늪 아래로 내려가서 헌터들에게 공략당한 괴수의 사체를 마주했다. 써전은 맵과 괴수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괴수를 해부할 준비를 했다.
"자. 잘 봐라. 이제부터 해부를 시작할 테니까. 예전에는 내 뒤에 클랜 마스터님이랑 강현씨랑 태인씨가 서 있었지. 참내. 내가 또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건 진짜. 너무 감격스러워서 짜증이 나려고 그런다."
서규태가 말하면서 전기톱을 들었다.
신입 헌터들은 죽어있는 괴수를 보고 잔뜩 위축이 돼서 긴장을 풀지 못했다. 맵은 넓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넷이서 다닥 다닥 붙어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서 시작된 떨림이 끝에 있는 사람한테까지 서로 전달될 정도였다. 어차피 다같이 떨고 있었기에 누가 떨어서 떠는 건지는 확인도 불가능했다.
드디어 해부가 시작됐다. 먼저 털로 덮인 괴수의 가죽을 발라내자 괴수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거친 표면이 벗겨지며 이내 발그스름한 표피가 드러났다.
"으으으윽!"
네 명의 헌터는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서규태는 그들을 바라보고 웃었다. 하긴. 클랜 A의 지우와 태인, 강현이 사체 운반 헌터로 서규태와 같이 일했을 때와 비교해 보아도 이번 신입 헌터들의 나이가 더 어렸다.
"가끔은 괴수가 다시 살아나는 일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서규태가 말했다.
"네에에? 정말요?"
서규태가 놀리는대로 다 속아넘어가서 얼굴이 창백해지는 헌터들을 보면서 서규태는 어느덧 신입 헌터들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여버렸다.
"그럼. 당연하지. 갑자기 일어나는 괴수도 있어. 좀비 괴수지. 좀비 괴수. 아직 좀비 괴수에 대해서 안 배웠나보구나? 2학년 과정에 나오나?"
서규태가 말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서규태와 괴수에게서 멀어졌다. 서규태는 그답지 않게 장난기가 발동해서 괴수 사체의 꼬리를 갑자기 휙, 휘둘렀고 무영이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제이까지 울어버리자 서규태는 미안해져서 좀비 괴수는 없다고 서둘러 아이들을 달랬다.
아이들은 서규태가 자기들을 놀렸다는 걸 알고 분한 마음을 가졌지만 한 번 속고나자 이번에는 좀비 괴수가 없다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거기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심을 품었다.
서규태는 자기가 괜히 일을 키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괴수 사체 해부에 몰입했다. 그가 커다란 메스를 집어들었다. 신입 헌터들은 메스의 주위로 강한 차크라의 기운이 응축되는 것을 목격했다.
"세상에. 차크라가 저렇게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리는 걸까?"
시현이 말했다.
그것은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엄청나게 응축된 차크라의 결정체라는 것이 느껴졌다. 신입 헌터들이나 현신 헌터 아카데미의 헌터들이 대충 만들어내는 잠자리 날개같은 힘없는 차크라와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크라는 그냥 빛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처럼 보였다. 윤곽과 형태, 색깔, 모든 것이 선명했다.
"엄청나다!"
아직 해부를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신입 헌터들은 서규태의 차크라만 보고도 벌써 압도되어 버렸다. 서규태의 메스는 작았지만 차크라가 더해지면서 메스가 커다란 무기처럼 보였다.
"지금부터는 잘 봐라."
서규태는 메스를 괴수의 귀 밑에 대고 턱선을 따라 움직이더니 그대로 다른 쪽 귀 아래까지 그었다.
“이제부터 내장을 적출할 거다. 그 전에 장기를 덮고 보호하고 있는 뼈들을 수거할 거고. 여기에서 적출한 것들은 바디 펌에 각각 용도별로 전해질 거고 거기에서 또 용도에 맞춰서 익스트림 헌터로 보낼 거야. 그리고 새로 만들어질 물건의 재료가 되는 거지. 이 괴수의 내장에서 추출된 물질은 당뇨병 치료제를 만드는 중요한 성분이 된다.”
서규태는 두 손으로 메스를 붙잡고 괴수의 턱 아래에서부터 몸 중앙을 따라 괴수의 복부까지 한 번에 갈랐다. 피부의 틈새에서 쿨렁거리면서 점성 강한 액체와 물컹한 덩어리 같은 지방이 쏟아져 나왔다. 메스를 내려놓고 펜치를 든 서규태가 그것으로 괴수의 늑골을 부쉈다.
"이게 너희들이 쓸 무기로 다시 만들어지게 될지도 모르지."
서규태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바디 팩에 넣어줄 테니까 한 번 날라봐라."
서규태는 원래의 용량대로 바디 팩을 채웠지만 그것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시현뿐이었다. 효재도 들지 못했다. 그래비티를 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현은 어쩌다 운 좋게 처음에 바로 방법을 터득한 케이스였고 다른 헌터들은 방법을 깨닫지 못해서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시현은 이미 수준이 다른 상태라서 얼마든지 혼자서 몇 개라도 나를 수가 있었지만 다른 녀석들을 낙심시키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클랜 A도 처음부터 잘 들지는 못했어. 하지만 자꾸 이런 말에 위안을 받으면 안 된다. 클랜 A는 정말로 열심히 연습했거든. 정말 걱정이 될 정도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야.”
서규태가 그렇게 말을 하면 신입 헌터들은 눈을 빛냈다. 서규태는 신입 헌터들이 눈을 빛내면서 듣는 게 귀여웠다.
“시스템은 말이다. 말이 안 되게 불공정하지는 않아. 어느 정도는 공정성을 유지해. 괴수와 헌터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맞추지. 그 말이 무슨 뜻이냐면. 너희들은 그 힘을 갖게 돼 있다는 거다. 시스템이 너희를 선택하고 헌터 타투를 만들어 주고 헌터 테스트에 통과시켰다면 시스템도 너희를 믿고 있다는 거야. 알겠니?”
"네!"
서규태의 말에 모두들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제 해 봐."
해 보라고 한다고, 안 되던 게 갑자기 될 리가 없었다. 신입 헌터들은 차크라를 끌어 모아서 집중해서 발산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반으로 잘라주시면 될 것 같기도 해요."
무영이 자신의 바디팩을 질질질 끌고 서규태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서규태는 기꺼이 그것을 반으로 갈라 주었다. 무영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역량의 부족을 확인하고 다시 서규태에게 다가갔다. 서규태는 이번에도 반으로 갈라주었다. 나중에는, 바디 팩에 남아있는 것이 손바닥만 해졌다. 무영은 그게 자신의 훈련용으로 딱 적당하다는 듯이 그걸 가지고 연습에 매진했다.
제이도 구석에서 남모르게 구슬땀을 흘렸다. 안 되면 혼잣말로 욕도 했다. 괴수는 죽은 것도 억울한데 들어올려지지 않는다고 어린 헌터에게 욕까지 들어야 했다.
효재는 시현이 하는만큼은 아니더라도 시현이 하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을 했다가 자신의 방식으로 습득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선배 헌터들이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을, 효재는 시현을 보고 배워서 어느 정도는 대부분 할 줄 알게 되었다. 바디 팩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영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감한 일이었다.
서규태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말을 해 주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도 전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세계 최고의 헌터들이 된 거라는 말에 무영은 다시 힘을 냈다.
시현에게 지적해 줘야 할 것이 있었다면, 다른 아이들이 의기소침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계속해서 자기가 가진 능력을 숨기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보여주는 게 시현이 네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라. 지금은 천천히 발전할 시간이 없는 전쟁의 시기나 마찬가지니까.”
서규태의 말에 시현도 자신의 포지션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새끼 헌터들의 실력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다른 클랜원들이 가끔씩 와서 써전 노릇을 자청해주는 것에 비해서 세진의 도움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세진은 아예 맵 생태학이라는 과목을 맡아서 네 사람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세진의 강의는 인기가 많아서 다른 헌터들도 듣고 싶어했고 세진도 특별히 다른 학생들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현과 효재를 위해서 만들어진 강의였다.
거기에 길무영이 낀 거고, 길무영까지 끼었는데 이제이만 못 듣게 할 수가 없어서 신입 헌터반을 위한 강의가 되었던 것인데 강의자가 클랜 A의 신세진이다보니 헌터 아카데미의 학생들로 매번 강의실이 가득가득 차는 지경이 되었다.
세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현장감이 생생하게 묻어 있어서 세진의 강의를 듣다가 레이드를 포기한 학생도 나왔다.
세진의 강의는 실습 위주였고, 헌터 아카데미의 교수와 학생이 짝을 이뤄서 레이드를 하러 직접 나가는 수업도 있었다.
레오니드와 미하일은 항상 그 일에 동원되었고 다른 지원자도 많았다.
강현과 태인은 세진에게 하도 불려다니다보니 나중에는 두 사람을 현신 헌터 아카데미의 교수로 착각하는 학생들이 나올 정도였다.
세진을 중심으로 깔때기 모양으로 경사지게 만들어진 강의실에 학생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모두들 헌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