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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미래를 아는 사람은 결정을 하는 것도 쉬운 것 같더라고 시현이 효재에게 말했다. 해민은 자기와 시현의 미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시현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게 시현의 말이었다.
해민이 쉽게 결정한 것처럼 자기도 쉽게 해민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생각보다 해민을 좋아하는 마음이 컸었는지 시현은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그런 시현을 보면서 길무영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속 편한 소리를 했고, 자기가 드디어 그래비티를 들 수 있게 됐다면서 호들갑을 떨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들다’라는 의미를 아주 아주 넓게 사용하자면 그것을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지면에서 0.1센티 정도 되는 높이로 들어올리고 다들 그 밑에 공간이 있는 걸 확인해보라고 의기양양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래도 발전이 없지는 않아서 시간이 지난 후에 길무영을 바라보면 이제 무릎 아래 정도까지는 그래비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세 사람 모두에게 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드디어. 헌터 테스트를 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
긴장감이 감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운명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다.
헌터 타투가 나타나기만 하면 완전히 인생이 펴는 것이다. 헌터 타투가 생겨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같이 상류 사회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헌터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길무영의 부모조차도 그날은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 수많은 어긋남으로 인해서 이제는 무영이가 서먹서먹해 했고 자기 부모가 오고 있는 것을 봤으면서도 효재의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우리 무영이. 꿈은 잘 꿨나.”
효재의 할머니가 무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안 될 것 같아서 걱정 돼 죽겠어요. 저만 안 되면 어떡하죠, 할머니? 효재랑 시현이는 다 헌터가 될 텐데. 저도 진짜 헌터가 되고 싶거든요. 헌터가 아닌 다른 모습은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런데 막상 헌터 테스트를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걱정되고 긴장돼서 밥도 안 넘어가요. 어제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어요. 저녁에 죽을 사다 먹었는데 그것도 두 숟가락 먹고 토했어요.”
“아이구. 무영이 네가 안 그래도 얼굴이 반쪽이 됐다. '헌터가 되건 안 되건 그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야겠다.' 이렇게 생각해야지 어쩌겠노. 우리 아들들이 전부 다 헌터가 됐을 때 그 녀석들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했지. 나도 그랬고.”
“잘 된 거잖아요. 할머니.”
“그래. 잘 된 거지. 잘 된 거야. 그런데 효재 애비는 안 되는 게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효재 아버님요?”
“그래. 우리 경욱이는. 그 녀석이 헌터가 안 됐으면 기차에 그렇게 뛰어들 생각을 했겠나. 지가 헌터니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할머니……. 죄송해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죄송하긴 네가 뭐가 죄송해. 말을 안 했으니까 당연히 모르는 거지. 아무튼 무영아. 헌터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거에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안 되면 안 되는대로 거기에 또 네 길이 있을 거니까.”
“할머니도 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무영이는 그 말이 불길한 예언 같아서 그렇게 물었다.
“안 되기가 쉽기는 하지.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두 명이나 세 명 정도가 되겠지.”
“제가 거기에 들 리는 없을 것 같으세요?”
“그냥 대비하자는 거지.”
효재의 할머니가 무영의 등을 쓸어주었다.
반면 효재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그 녀석은 지금 봐도 그냥 헌터처럼 보였던 것이다.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길무영의 부모는, 볼품없는 노인에게 다가가서 먼저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조금 기다리면 무영이 알아서 자기들한테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멀찍이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영은 할머니와 헤어지더니 다른 녀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 우리를 따돌리는 건가?”
무영의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을 따돌리는 거겠지. 내가 당신이랑 같이 있으니까 나한테도 못 오는 거고.”
길무영의 어머니가 말했다.
일단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헌터 테스트가 있는 날이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니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는 할 생각이었다.
클랜 A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야나가 현신 고등학교 앞에 도착하자 한 번 더 소란이 벌어졌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될 법도 했지만 아직도 클랜 A를 보면 놀라운 모양이었다.
시현이 효재와 무영을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떨리냐?”
지우가 시현의 팔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효재와 무영은 부지런히 인사를 하고 다녔고 허무영과의 악연 때문에 길무영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은 클랜원들이 악의 넘치는 인사를 무영에게 해 주었다. 그러는데도 무영이 헤헤거리면서 잘 따라주니 클랜원들도 무영을 예뻐하게 됐다.
“무영이. 그래비티를 밀게 됐다면서?”
강현이 물었다.
“밀다뇨. 그건 옛날 얘기죠.”
“그래? 그럼 지금은 번쩍 들어?”
“아니. 번쩍까지는 아니고요.”
무영은 어서 그 이야기가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손을 저었다. 헌터 테스트가 시작돼서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 남겨진 학부모들은 긴장된 속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내가 뭘 바라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시현이가 헌터가 되기를 바라는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지.”
임정이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지우도 말했다.
“헌터 타투가 안 나타나면 시현이 녀석. 엄청 실망할 걸? 그런데 시현이한테 헌터 타투가 안 나타날 리가 없잖아. 길무영이라면 모를까.”
용하가 말했다.
“우리 애들. 헌터 타투가 나타나면 일단은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클랜 A에서 스카웃 계획이라도 있나?”
용하가 지우에게 물었다. 지우는 그거야말로 결정을 못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클랜 A는 다른 정규 공격대가 해결하지 못하는 높은 급의 괴수들을 도맡아 공략했다. 그런 곳에 시현을 데리고 다니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 마음이었지만 다른 클랜원들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솔직히 다 까놓고 말해서, 지우하고 비교를 한다고 해도 지우가 더 센지 시현이가 더 센지 가늠이 안 되는 판국인데 언제까지 시현이를 어린애 취급만 할 거냐는 게 클랜원들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게다가 콜로니의 등장이 클랜 A의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지금도 베로니카 공격대와의 연합 작전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콜로니를 공략하기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헤르겐과 스켈들이 살고 있는 콜로니에 수많은 헌터들과 함께 들어갔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콜로니를 공략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공략 기간이 거의 한 달에 이르렀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독을 가진 작은 개체에게 물린 것을 방치하고 지나갔다가 나중에 목숨을 잃은 사례가 특히 많았다.
모두들 헌터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안으로까지 들어가는 것은 헌터 테스트를 받는 당사자들만 국한시키기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용하가 설명했다.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용하가 그러기로 했다는데 토를 달 수 있는 사람도 없어서 모두들 밖에서 세 녀석을 기다렸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마다 모두들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다가 자기들이 기다리는 아이인지 확인을 했다. 그러다가 부모들이 달려갔고 조심스럽게 결과를 확인하고 아이와 부모까지 셋이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정해진 그림이 되었다.
그런 광경을 계속 보다보니 클랜 A도 괜히 긴장이 돼서 이리 저리 오가기도 하고 손을 비비기도 하면서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효재였다. 효재의 볼이 씰룩거렸다. 효재의 할머니가 익헌과 같이 있다가 가장 먼저 효재를 알아보았다.
“우리 효재가 나오네요, 선생님.”
할머니를 발견하고 효재가 바로 달려왔다.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들 같으면 헌터 타투가 안 나타났다고 장난이라도 쳐 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어려운 사람들일 뿐이라서 효재는 적극적으로 장난을 치지도 못하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가장 먼저 헌터 타투를 보여 주었다. 헌터 타투가 효재의 팔에서 빛나고 있었다.
“잘 했다. 민효재. 축하한다.”
이익헌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효재가 부끄러워 하면서 악수를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가 이어졌다. 모두들 효재가 헌터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 경욱이가 헌터가 됐을 때는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도 우리 경욱이는 진짜 굉장했지요. 효재도 제 아빠를 닮아서 잘 할 겁니다.”
효재의 할머니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두가 효재에게 덕담을 해 주고 있는데 시현이 나왔다. 시현은 페이크를 시도했지만 시현이 거짓말을 한다고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시현에게 헌터 타투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모두들 이미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야로슬라프가 지우를 바라보았다.
“어쩌겠어요, 형. 시현이는 잘 할 거예요. 우리가 부지런히 캐츠 아이 스톤을 모으면 되니까 형도 기뻐해 주면 좋겠어요.”
야로슬라프가 말하자 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현이는 언제나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나를 놀라게 했으니까. 그래. 믿어보자고.”
임정이 시현에게 달려가서 시현을 안아주었다.
“잘 했어.”
시현은 자기 팔에 나타난 헌터 타투를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다. 길무영은 어떻게 된 것 같냐고 강현이 묻자 아직 안 나왔냐고 시현이 되물었다.
“왜? 벌써 끝났어?”
강현이 물었다. 태인도 걱정을 했다. 길무영에게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뺀질뺀질한 것 같기는 해도 드센 부모를 둔 덕에 마음 고생이 심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태인은 길무영의 부모와 함께 레이드를 해 본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부부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가 안 맞는 것 같았다.
레이드 실력은 두 사람 다 괜찮은 편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엄청나게 다혈질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화를 냈고 일단 화가 나면 주위에 사람이 있건 없건, 그걸 어디서든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었다.
길무영의 엄마가 길무영의 아빠를 큰 소리로 부르고 그대로 달려가서 30여센티미터의 신장 차이를 극복하고 날아올라 뺨따귀를 때리는 것도 보았고, 길무영의 아빠가 길무영의 엄마를 무섭게 추궁하는 장면도 보았었다. 그래서 태인은 길무영이 저만하면 아주 잘 자라준 거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길무영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영이 차례는 지나갔어?”
강현이 다시 물었다.
“무영이가 원래 앞이었는데 조금 있다 하겠다고 자꾸 맨 뒤로 가더라고요. 아직까지 안 나왔는 줄은 몰랐어요.”
시현이 말했다.
“에효. 무영이가 긴장을 많이 했나보네.”
효재의 할머니가 말했다.
“무영이한테 헌터 타투가 나타나지 않으면 무영이 부모님이 무영이를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아 버릴지도 모른다고 무영이가 자주 그런 말을 했는데. 오늘 뵈니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영이가 오늘 부모님을 계속 피했어요.”
시현이 말했다.
“성질들이 대단한 사람들이긴 한데. 무영이가 이렇게 오래 걸릴 게 아닌데. 이상하네. 내가 들어가서 보고 올까요?”
태인이 말했다.
아무도 태인을 말리지 않았다.
“걸리면 헌터 테스트 받으러 왔다고 해요. 오늘 대개 젊어보여요. 고딩이라고 우겨요.”
강현이 말했다.
“그래? 그럼 너 믿고 지랄발광 한 번 하고 온다.”
그러고 있는데 길무영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