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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할머니. 이렇게 입으니까 아가씨 같다.”
효재가 말하자 할머니가 웃었다.
“나도 놀랬다. 미용실에서 졸다가 깼는데 거울에 웬 아가씨가 앉아있는 거야. 나 찾느라고 한참 헤맸다.”
“이야. 할머니 구라는. 민효재가 할머니 반만 닮았어도 세상을 쉽게 살았을 텐데요.”
길무영이 말했다가 할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아뇨. 할머니. 제 말씀은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거짓말씀을 참 잘하신다고요. 아니. 거짓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아가씨 같으세요. 아하하하하."
길무영이 진땀을 빼는 것을 보면서 효재가 웃었다.
"저기 구경났는가보다. 우리도 가 보자."
할머니가 효재의 손을 붙잡고 흔들면서 야나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야나의 앞은 시상식장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클랜 A와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서 난리였다. 그러나 클랜 A의 클랜원들은 거절을 하는데 거리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야나의 사진을 찍어댔고 클랜 A와 같이 서 있는 역사적인 순간을 담으려고 저마다 여러 각도로 셀카를 찍었다. 클랜 A도, 자기들이 사진의 배경이 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한참만에야 용하가 나타났다. 지우가 용하에게 달려가서 용하를 덥썩 안아주었다. 감개무량한 지우의 얼굴을 보고 용하가 지우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아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학부모 총회에 한 번 나오기는 하네. 내년에도 있으니까 그때도 나와.”
용하가 말하자 지우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이 표정이 저렇게 밝아보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부모 빈 자리는 채울 수 없는 거였나봐.”
용하가 말하자 지우는 헛소리 집어치우라는 듯이 용하의 어깨를 쳤다.
“자. 가자. 네가 정말로 올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왔으니까 학부모 대표로 네가 인사해. 시현이 기 좀 살려줘야지.”
“내가? 시현이 엄마 시키면 안 될까? 아오. 나 진짜 말 잘 못하는데.”
지우가 우는 소리를 하면서 매달렸다.
“나도 알아, 너 말 잘 못하는 거. 그걸 내가 모르면 누가 아냐?”
“그런데도 그걸 시키냐?”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게 너니까.”
용하는 거절은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이 강경하게 말했다.
지우는 갑자기 급해졌다. 클랜원들은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학부모 인사말을 짜느라고 분주해졌다.
뒤따라 오던 효재에게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효재야. 선생님이 말이야. 집을 얻어주시겠다고 했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집을? 무슨 집을? 사장님이?”
효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선생님이 오면서 나한테, 효재 보고 싶으시죠, 하고 물으시잖니. 당연한 소리잖아. 나는 내 손주 보는 게 유일한 낙인 사람인데. 다른 손주들도 있지만 나는 효재 네가 제일 좋아. 이제는 너를 볼 수가 없게 돼서 속상한 마음이 너무 크지. 네가 없어도 집으로 돌아올까 생각도 들고.”
“왜, 할머니? 큰아버지랑 큰어머니가 잘 안해줘?”
“잘 해 줘도 고맙지도 않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네가 주말에는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는데 선생님이 거기는 너무 위험하다고 집을 얻어주신다는 거야. 효재 네 생각은 어떠냐?”
“할머니. 나도 진짜 할머니가 보고 싶고 할머니랑 같이 살고 싶지만. 그건 너무 염치없이 구는 것 같아. 그렇게 하는 건 안 될 것 같아. 나도 이제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하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려, 할머니.”
“그래. 내가 주책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살았는데 1년만에 어떻게 되진 않겠지. 그래. 할머니가 참을게. 괜한 말 해서 괜히 미안하네. 우리 효재. 생각하는 것도 의젓하네.”
“할머니. 건강하셔야 돼. 내가 학교 졸업하고 헌터가 되면 그때는 할머니를 편히 모실게.”
“그래. 그러자.”
어느새 이익헌이 다가온 것을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이익헌은 어디에서부터 들었는지, 두 사람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집은 이미 계약을 했고 일 년치 월세도 전부 냈으니까 그 집을 비워놓고 집에 먼지만 쌓이게 할 거면 그렇게 해라.”
이익헌이 말했다.
“네? 왜요, 사장님? 왜 그런 일까지 하신 건데요.”
효재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당장 갚을 수도 없는 것을 자꾸만 받게 되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그런 줄만 알고 있어. 어이, 길무영.”
익헌이 길무영을 부르자 길무영이 조르르 달려왔다. 혹시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을 마주쳐주지 않을까 해서 클랜 A의 클랜원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 하필 익헌에게서 눈을 돌렸을 때였다. 하지만 길무영은 익헌을 조금도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바로 달려왔다.
“효재 할머니가 이번주말에 이사하실 거야. 애들 데리고 가서 이사 도와드릴 수 있지?”
“네? 네. 맡겨만 주세요.”
“새로 사야 될 물건도 많을텐데 다른 애들보다는 네 안목이 낫겠지?”
“당연하죠. 사장님. 맡겨만 주세요.”
“그래. 카드 줄 테니까 네가 알아서 할머니한테 필요한 것들 사서 집 좀 잘 채워봐. 주말에는 효재가 할머니랑 같이 지내야 하니까 침대는 두 개가 필요할 거다.”
“네. 벌써 머릿속에 그림이 다 그려졌어요.”
“그래. 그런 거라도 잘 해야지.”
“아니예요. 저 이제 다른 거도 잘해요, 사장님. 저도 이제 그래비티 거의 들 수 있게 됐어요.”
무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이상하네. 그래비티는 거의 들 수 있다는 말이랑 어울리는 물건이 아닐 텐데? 들 수 있거나 들 수 없는 것. 두 가지 중 하나지.”
익헌이 말했다.
“그건 사장님이 아직 저 같은 애를 못 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들면 그래비티가 귀퉁이가 들려요. 밀면 밀리기도 하고요.”
“도대체 차크라가 얼마나 적으면 그러는 거냐?”
“그건 모르겠지만 아주 없는 것 보다는 나은 거잖아요.”
길무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세계 최고의 낙관주의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익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클랜원들이 전부 모였을 때 클랜원들이 레오니드와 미하일에게 물었다.
“현신고 2학년 중에서는 내년에 헌터 테스트에 통과할 녀석들이 몇 명이나 나올 것 같아?”
이익헌이 미하일에게 물었다.
“세 명요.”
미하일이 대답을 하면서 레오니드를 바라보았다. 레오니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 세 녀석들 맞는 거지?”
익헌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지으면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길무영은 커트 라인에 걸리겠네요.”
강현이 말했다.
“그래도 저 녀석이 저 팀에 도움이 크게 될 거야. 세상을 살려면 하기 어려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필요하고 난감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되거든. 그리고 길무영이 가진 재능 자체도 나쁘지 않고.”
이익헌이 말하자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재는 내가 제대로 가르쳐볼 생각이야. 저 녀석은 어떤 의미로 물건이 될 거야.”
이익헌이 먼저 찜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효재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닌 듯했다.
“정신 공격 계통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야로슬라프도 효재를 알아보고 말했다.
“응. 저 녀석이야말로 시현이의 오른팔이 돼 줄 녀석이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효재를 가르치는데 익헌만큼 적임인 사람도 없다는 것에도 동의하는 표정들이었다.
“다른 애들 중에는 쓸만한 애들이 없나요? 고작 둘로는 어림도 없잖아요.”
임정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나한테도 처음에는 둘 뿐이었어. 강현이랑 태인이 형. 아, 써전님도 계셨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더 만나게 되겠지.”
지우가 말하자 임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이 각성될 때가 벌써 기다려지네요.”
강현의 말에 야나조차도 헤드 라이트를 깜빡거렸다.
***
길무영의 부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녹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에 있는 물건이 자꾸 없어지는 것 같아서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봤더니 범인은 길무영이었다.
길무영은 집안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뒤지고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것들이 있으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짠 걸 뭘 이렇게 많이 먹어? 웬만하면 집에서 요리 좀 하지. 다 인스턴트 식품이네.”
통조림류를 전부 다 쓸어담으면서 혼자서 구시렁 구시렁,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자기가 찾아낸 것들을 야무지게도 전부 가방에 밀어넣더니 한참만에 무영이 카메라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무영은 신기해하면서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길무영의 부모는 갑자기 길무영의 입속 구경을 하게 되었다. 길무영은 렌즈에 하아, 하고 입김을 불더니 소매로 렌즈를 닦았다.
“이런 건 뭐하러 자꾸 사는지 모르겠네. 달아놔봤자 먼지만 앉지. 청소도 안 할 거면서. 자. 그럼 이제 또 뭘 가져가냐?”
길무영은 아예 제 부모 침실에 들어가서 베개까지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소파에 있던 쿠션도 챙겼다.
“저 자식! 지금 뭐하는 거야?”
길무영의 아버지가 물었다.
“그걸 저 자식한테 물어야지 왜 나한테 물어요?”
길무영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제 집털이를 마친 길무영은 제 집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타고 효재의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주말을 맞아서 효재와 시현이 모두 거기에 와 있었다. 길무영은 산타 할아버지처럼 가방을 열었다.
“할머니. 베개가 너무 높은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이거 우선 베 보시고요. 이것도 높이가 안 맞으면 새로 사오게요.”
길무영이 말하자 할머니는 누울 생각도 없었다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떠세요?”
“아이구. 푹신하다. 잠이 솔솔 오겠다. 그런데 이건 어디에서 가져온 거야? 집에서 가져온 거야?”
할머니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길무영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제 방에 있는 건데 저는 집에 가지도 않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쿠션인데 여기에다 두고 허리를 기대면 되고요.”
길무영은 들고 오는 게 귀찮아서 가져올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던 다육이 미니 화분까지 꺼내서 배치를 끝냈다.
"할머니. 우리는 주말이나 돼야 오니까 우리 올 때까지 심심하면 이거 보고 계세요. 물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대요. 그러니까 그냥 심심하면 한 번씩 주고요."
다육이에 물을 얼마나 자주 줘야하는지는 저도 그 사이에 잃어버려서 생각나는대로 대충 얼버무렸다.
“아유, 죽겠다. 야, 천민. 라면 좀 끓여봐.”
시현도 이제는 길무영이 저를 천민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굉장히 생소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라면을 끓였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듣는다고 약이 오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약이 오르면 한 번씩 모아두었다가 아침에 한 번에 몰아서 화끈하게 밟아주면 되었다.
길무영이 신경써 주는 덕에 효재의 할머니한테 들어가는 생활비는 크게 절약되고 있었다. 효재는 이런 걸 가져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애초에 효재의 말을 들어먹을 길무영도 아니었다.
효재는 이익헌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너는 좋은 씨앗이야. 좋은 씨앗은 정말 많다. 하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못하면 자라기도 전에 사라지지.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썩기도 하고 새한테 먹히기도 하지. 먹히지도 말고 썩지도 말고. 잘 커라. 그게 네 임무야. 지금보다 조금만 더 약게 굴어라. 효재 너한테 바라는 건 그게 전부야.’
이익헌의 말은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지만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길무영이 효재의 그런 부분을 채워주는 것 같아서 남모르게 고마운 마음이 쌓여가고 있었다.
시현은 시현대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해민이 다른 헌터 아카데미로 떠났던 것이다. 시작하는 단계의 헌터 아카데미라서 모든 일을 해민이 도맡아서 해야 할 정도로 일이 많은 곳이었지만 해민은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