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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나도 들었어. 직접 인사들을 하셨어. 클랜 A한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니까 전혀 실감이 안 나더라. 그 분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 놀랍고 감격스럽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대답도 잘 못했다니까? 바보 같이 보였을 거야."
해민이 말했다. 걱정하는 것들이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현은 신기해했다.
"설마요."
“효재는 방금까지 있다가 들어갔어. 시현이 너를 부러워하는 눈치더라. 그래도 정말 기뻐해 줬어. 시현이 네가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 일 말이야.”
"그러게요. 제가 효재 입장이었어도 그럴 수 있었을지 생각을 해 볼 정도로 너무 좋아해주더라고요."
"좋은 친구를 일찍 만나는 건 헌터한테 정말 중요해. 너랑 효재는 서로한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효재한테 가 봐야겠어요.”
하지만 시현이 들어갔을 때 효재는 땅이 갈라져도 모를만큼 깊은 잠에 빠져든 후였다.
***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고 입을 가볍게 놀리는 사람들을 서규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사는 도시가 블랙 스왈로워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갖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늪은 어디에든지 생길 수 있고 괴수는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가 있는 건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을 놀리는 것 같았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들은 클랜 A가 블랙 스왈로워를 구했다고 말하며 고마워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괴수가 괴수를 죽인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은 수가 아니었다.
시현을 가리켜 동족을 학살한 괴수라고 조롱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클랜 A가 나서지 않았어도 블랙 서커와 워즈는 미국 헌터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공략될 수 있는 괴수였다는 칼럼도 실렸다. 미국의 헌터들이 미리 워즈와 블랙 서커의 체력을 다운시켜 놨기 때문에 클랜 A는 다 차려진 밥상에서 쉽게 식사를 한 거라는 논조였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뇌가 없어도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키 위도는 이번이야말로 클랜 A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했지만 클랜 A는 처음에 그 일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에 상황이 변했다. 클랜 A는, 자기들을 향해서 날아오는 돌은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돌이 시현을 향하는 것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클랜원들은 시현이 상처받게 된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났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괴수라고 하는데 괜찮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말에 영향받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감정을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은, 쓰지 않아도 될 일에 자제력을 발휘하도록 강요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실, 반대 의견이 훨씬 더 많았다. 고마운 일에 정상적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을 건드는 한 마디의 미운 말이, 좋은 몇 천 마디의 말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아 시현과 클랜원들을 괴롭혔다.
시현이 원래부터 그렇게 무던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시현은 훨씬 더 힘든 시간을 겪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현은 성격적으로(?) 방어력이 높았고 그 일을 겪는 시현의 곁에 해민이 있어주었다. 시현은 해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에게 그런 문제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면 부모님은 그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울 거라는 생각 때문에 시현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해민은, 시현을 아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현이 보다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가 돼 주었다.
"교수님도 제가 괴수라고 생각하세요?"
해민의 방에서 시현이 물었다.
"괴수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무섭지 않으세요?"
"도시를 버리고 자기 나라의 시민들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더 무서운 것 아니야? 그리고 괴수가 이렇게 잘 생겼으면. 나라면 저항을 못 할 것 같은데?"
해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걸 참아야 하는 상황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요."
"그럴 거야. 나라도 그럴 거야.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같이 있어주고 얘기를 들어주는 걸로도 충분히 도움이 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듯했고, 의자에 앉아있는 해민을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해민은 시현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빠한테 동료들이 생긴 것처럼요. 교수님도 제 팀이 돼 줄 수 있어요?"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우리한테 다른 길이 주어져 있다면 각자 그 길을 걸어가게 되겠지."
"왜요? 혹시 뭔가 보였어요? 우리는 헤어지게 돼요?"
시현이 진지하게 묻자 해민이 웃었다.
"너는 헌터가 돼 있고 네 옆에 귀여운 여자애가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때 교수님은 어디에 있는데요? 그 애는 그냥. 헌터 아카데미에 같이 다니는 애거나 그렇겠죠."
"그냥 헌터 아카데미에 같이 다니는 애하고 할 짓을 하고 있지는 않던데?"
"프레딕터가 그런 것도 알려준다고요?"
시현이 심각하게 물었다. 이건 사각지대가 없는 CCTV랑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나하고 사귈 생각이면 바람은 못 피워."
해민이 말했다.
"그거. 굉장히 중요한 얘기네요!"
시현이 말하자 해민이 웃었다.
***
용하와 헌터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먼저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시현과 효재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은 엄마 아빠와 다시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지만 클랜 A에게는 아직 그곳에서 할 일이 남았다는 말에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한국에 가면 또 보게 될 텐데, 뭘. 이제부터는 지겹도록 보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우가 말했다.
“레이드를 하실 거예요?”
시현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레이드는 안 해. 고마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콜로니를 정찰해 보기는 해야 될 거야. 한국의 콜로니를 공략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거든.”
지우가 말했다. 그들이 그곳에 남아서 하려는 일은 정작 따로 있었지만 시현에게 말하지 않았다.
익헌은 미국에 있는 동안 치안대의 캐츠 아이를 칠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씨를 말릴 계획을 세우고 착착 준비를 해 나가는 중이었다.
지우와 용하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서둘러. 한국에서 보자고.”
그렇게 클랜 A와 헤어지고 드디어 현신 고등학교의 천민들이 현신 고등학교로 돌아왔다.
길무영은 그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자꾸만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잡아 끌어내리며 기다렸다. 시현과 효재가 돌아갔을 때 현신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들 목을 길게 빼고 시현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였다. 시현이 교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현의 반 녀석들이 현관 앞까지 나와서 시현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시현아. 어서 와. 힘들었겠다.”
“시현아. 너 멋지더라.”
“시현아. 나는 그 병신 사이트에 댓글 2백 개 넘게 달았어. 유익한 표현도 네 덕에 많이 알았다, 야. Shut the fuck up!은 이제 엄청 빨리 쳐.”
“그걸 매번 쳤냐? 복붙하면 되지. 컨트롤 키 쓸 줄 몰라?”
길무영이 시현과 효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 새끼들. 평소에 잘하지. 암행어사 만난 놈들처럼 이게 뭐냐? 가오 떨어지게.”
“그래서 너는. 그렇게 말하는 너는 엄청 잘했냐?”
시현이 길무영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하자 길무영이 씨익 웃었다.
“방도 다 닦아놨어, 인마. 내가 씨발. 이불도 빨아줬다. 이불도 빨아줬어. 우리 엄마한테 이불 좀 빨아달라고 했더니 결혼하고 나서 자기 집 이불도 안 빨아봤는데 그런 걸 시킨다고 나를 아주 잡아죽이려고 하더라. 아우, 진짜. 우리 엄마지만 드러워서! 그래도 결국 빨게 했어. 방에 가면 아주 쾌적할 거다.”
길무영이 시현을 독차지해 버리자 시현에게 사과할 기회를 찾던 녀석들은 이대로 영영 기회를 놓칠까 해서 조바심을 냈다.
“시현아. 우리가 그동안 실수를 좀 했던 것 같은데.”
“시현아. 우리가 생각이 짧아서 혹시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게 있으면 시현이 네가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서.”
이 놈 저 놈이 사과할 기회를 찾아 서로 말을 해대는 것을 보면서 길무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입 닥쳐, 이 찐따 새끼들아! 너희들 같으면 용서해 달라고 한다고 용서해 주겠냐? 안시현이 병신 호구 새끼냐? 이렇게 질질거리고 있으면 안시현이, 그래. 다음부턴 조심해. 친구들이 사이 좋게 지내야지. 샤랄랄라 이럴 것 같냐고, 병신들아.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서 안시현 눈밖에 안 나게 처신들이나 잘 해, 이 새끼들아.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 좆까고 있네. 안시현한테 그런 걸 바라냐? 이 새끼 마음이 넓다고 누가 그래. 내가 살다살다 이 새끼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길무영은 큰소리를 치다가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아, 이 말을 하던 중이 아니었지.' 하고 뒤늦게 깨달은 듯 적당한 말을 찾아 헤맸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 하라고. 그렇게 한다고 용서해주지는 않겠지만. 사과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재재거리지 말란 말이야!"
누가보면 저는 아주 처신을 잘 해 온 것처럼 길무영이 녀석들을 호되게 혼냈다. 시현은 할 말을 잃고 효재를 바라보았고 효재는 그런 길무영을 보고서 자기가 마침내 학교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래서 너님은 나한테 그렇게 잘 하셨어요?”
시현이 물었다.
“하, 이 새끼. 미국가서 베이컨만 처먹고 오더니 멍청이가 돼 버렸나. 내가 너한테 잘해주던 거 다 까먹어 버렸어? 내가 천민인 너한테 은혜를 마구마구 베풀어주던 거 생각 안 나냐?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아직까지 현신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것 같아? 이 자식 좀 봐. 잘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잘 해 준 거 생각 안 나?”
“안 나네.”
“큰일났네. 이게 다 베이컨 때문이야. 베이컨.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 되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시간 맞춰서 딱 잘 도착했네. 지금 가면 맛있는 건 다 떨어졌겠지만. 그래도 내가 너희 천민놈들 기다렸다가 밥 같이 먹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잖아. 가자. 가자.”
길무영은 시현과 효재의 손을 덥썩 잡고 뛰었다. 혼자 엄청 신 나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시현은 길무영한테 잡힌 손을 빼내려다가 어깨를 툭 처 맞았다.
"잘 해 주면 그냥 호의를 감사히 받아, 인마. 사람이 잘 대해주려고 하면 버티다가 나중에 서운하네 어쩌네 지랄하지 말고."
"이게 어딜봐서 잘 해 주는 건데? 왜 손을 잡어, 병신 새끼야!"
두 놈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효재는 잘 묶어져 있던 신발 끈을 발로 밟아 풀고, 신발 끈을 묶는다면서 길무영의 과도한 친절에서 손을 뺐다.
"하아, 이 자식! 세상 살 줄 알아. 사람 기분 안 나쁘게 거절하는 건 이 자식이 진짜 잘 하잖아. 너도 보고 좀 배워, 이 천민 새끼야!"
길무영의 변함없는 말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시현도 포기했다는 듯 터덜터덜 그 뒤를 따라갔다.
***
아침에 일어났을 때 효재와 시현은 한동안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리둥절해 하느라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현이 발을 바닥에 내리자 물컹한 것이 밟혔다.
‘아, 기숙사지. 한국에 돌아왔지.’
길무영을 밟고서야 자기가 기숙사에 와서 잤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시현이 혼자 웃자 길무영이 잠에서 깨면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