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9 / 0331 ----------------------------------------------
10부. 꼬꼬마 헌터
“네? 그래비티요?”
“아! 이름은 안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게 뭔데요? 설마. 교수님! 그게 지금 제 주머니에 있다고요?”
시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강의 준비하러 간다. 내일 봐. 내일까지 연습 많이 하고.”
왠지 해민의 기분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서 시현은 더 약이 올랐다. 전화를 끊고 시현이 주머니를 더듬자 딱 그래비티의 모양만큼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하아, 진짜 이 교수님이!”
시현은 그걸 손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옷을 뒤집어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래비티는 또르르르 구르더니 침대 사이의 통로에 떨어졌다. 제 검지로 그걸 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시현. 삼촌 지금 기숙사 앞에 와 있는데 내려와봐. 줄 거 있으니까.”
“어, 삼촌.”
시현은 검지로 그래비티를 똘똘 굴려 제 침대 다리 옆에 딱 붙여놓고 다른 녀석들이 그것을 찾지 못하기를 바라고 아래로 내려갔다.
용하는 오랜만에 본 시현에게 간식거리를 챙겨주다가 뭐가 이렇게 말랐냐면서 아무래도 기숙사 밥이 안 맞는 것 같다고 하더니 납치를 하듯이 식당으로 데려가 버렸다.
그래비티는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
민효재는 방이 어두운 걸 보고 시현이 아직도 안 온 건가 하면서 불을 켰다.
공부할 게 많아서 방에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피곤할 때가 있어도 제 침대라고 생각하면서 올라가기에는 아직 불편한 게 많았다. 시현이 매번 화를 내면서 길무영을 침대에서 끌어내리지만 않으면 그냥 자기가 바닥에서 자는 게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라고 딱히 편하지도 않았다. 자는 내내 바닥에서 길무영의 살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용하는 책상을 시현과 효재에게 쓰라고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길무영은 책상 하나를 차지했고, 그 일을 이사장님한테 말하면 재미없어질 줄 알라고 효재에게 단단히 협박을 했다.
효재는 길무영의 협박이 무섭다기보다, 돈도 내지 않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책상까지 차지하겠다고 나서는 건 영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기숙사 독서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독서실에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를 맡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책을 챙기다가 민효재는 바닥에 있는 그래비티를 발견했다.
‘이게 뭐냐?’
효재는 발로 그래비티를 굴렸다.
‘이게 뭐야?’
궁금하기는 했지만 주인이 찾을 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거기에 내버려두고 독서실로 향했다.
그래비티는 그렇게 통로로 굴러나왔고 길무영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방에 들어왔다.
“이 천민 새끼들은 일찍 일찍 들어와서 불도 켜놓고 그럴 것이지!”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지른 길무영은 시현의 침대 위에 가방을 던지고 침대로 올라가려다가 그래비티를 밟았다. 발바닥에서 전기가 찌리리릿 전해졌다.
“아우우우우, 이 씨발 천민 새끼들이! 어떤 새끼가, 하, 씨발!”
길무영은 발을 붙잡고 콩콩 뛰다가 바닥에 있던 그래비티를 발견했다.
“하, 씨발. 어떤 새끼가 이런 걸 여기다가, 하! 씨발!”
길무영은 화가 나서 그래비티를 발로 찼다.
“흐아아아아악!!”
길무영은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발가락 뼈가 부러졌으니 엄살도 아니었다. 발가락은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고 보랏빛 피멍이 들었다.
“씨!발! 어떤 새끼가 이걸! 뭐야, 이거. 나한테 엿 먹이려고 본드로 붙여 놓은 거야?”
길무영은 설마 제 발가락이 부러졌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누운 채로 그래비티를 바라보았다. 길무영은 그것을 만져보았다. 그래비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씨발. 본드로 붙인 게 맞네! 그래. 엿 먹이려고 그랬다 이거지! 이 천민 새끼들. 내가 가만 놔두나 봐라. 그동안 오냐오냐 해 줬더니!”
길무영은 그러면서도 발이 점점 아파오는 통에 발을 붙잡고 신음을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시현은 밖에서 그 소리를 듣고 이 새끼가 방에서 딸을 치는 건가 하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주었다. 그런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들어간다는 신호로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해대고 문을 열었다.
눈 앞에, 바닥에 붙은 채로 끙끙거리는 길무영이 보였다. 제자리를 찾아 누운 것은 기특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시현이 길무영에게 다가가 길무영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 왜 그래? 발이 썩는 것 같냐?”
시현은 길무영이 발을 붙잡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뭔 소리야, 천민 새끼야. 씨발. 누굴 만져! 너! 저거! 저기에다 본드로 붙인 거 네 짓이지? 이 씨발 놈. 내가 너 가만 놔두나 봐. 이 개새끼야!”
길무영이 눈을 까뒤집고 하는 말에 시현이 그래비티를 발견하고 그걸 주웠다. 그랬다가 밤송이를 맨 손으로 만진 것처럼 깜짝 놀라면서 바닥으로 떨어뜨리더니 검지 위에 살포시 올려 침대 다리 뒤쪽으로 밀어서 숨겨놓았다. 길무영은 시현이 생쇼를 하는 동안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게 왜 움직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너. 지금 뭐한 거냐?”
길무영이 물었다. 아직도 일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시현은 길무영의 발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깜짝 놀라면서 길무영의 발에 제 얼굴을 가져다 붙였다.
“세상에! 진짜 썩나보네!”
시현이 기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구조 요청은 했냐? 너 저걸 만졌어?”
“뭔 소리야, 개새끼야!”
길무영은 시현이 하는 말에 겁이 나기도 하고 이게 뭔 헛소린가도 싶어서 시현을 재촉했다.
“너 이거 만졌어, 안 만졌어!”
시현이 거듭 따졌다.
“만지긴 뭘 만져, 씨발놈아. 발에 밟혀서 발로 찼다가 이렇게 됐고만!”
“차크라 없는 놈이 이걸 만지면 썩는다고 했는데. 구조대부터 부르자.”
“거짓말 하지마. 이 새끼야! 네가 나를 엿먹이려고 일부러 붙여 놓은 걸 모르는 줄 알아?”
“이 새끼는 시도 때도 없이 개소리를 지껄여대는고만.”
“이 새끼야. 아까는 이게 붙어 있었다고. 본드 자국이 아직 남아있을 거다. 걸리기만 해 봐. 씨팔놈. 가만 놔두나 봐!”
길무영은 본드 자국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로 제 다리를 끌고 침대 다리 뒤에서 그래비티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래비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당황한 채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이 자식이 뭔 수작인가 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왼손 검지로 살랑살랑 그래비티를 끌어내주었다.
“이 병신은 왜 왼손으로 이 지랄이야?”
길무영이 소리쳤다. 확 이 새끼 얼굴에 이걸 던져버릴까 보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시현은 억지로 참으면서 스마트폰을 찾았다.
그러다가 구조대를 부르는 것보다 해민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민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저랑 방 같이 쓰는 놈이요. 그래비티를 발로 찼다가 발가락이 썩고 있거든요. 이건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 구조대가 가고 있어. 실어서 보내면 돼. 너도 같이 내려와. 지금 아래에 와 있으니까.”
“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가 아, 프레딕터, 라고 생각하면서 시현이 밖으로 나갔다.
“아참. 그래비티는 어떻게 해요? 놔두면 효재도 다칠 수 있을 텐데요?”
“일단은 그냥 내려와.”
해민의 말에 시현은 방을 나가면서 길무영의 발을 바라보았다. 썩어들어가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길무영을 애도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표정을 보는 길무영은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너는. 근데 무슨 수로 저걸 밟았다는 거냐? 내가 침대 다리 뒤에다가 딱 붙여 놓은 걸.”
“뭔 소리야, 이 개새끼야! 통로 한 가운데에 있더구만! 그걸 내가 발로 차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헛소리는. 하긴. 너한테 성실한 답변을 기대한 내가 병신이다. 네.네. 제가 병신입니다요.”
“구조대는 어디있어!”
“지금 올라온다잖아!”
“너도 신고 안 했잖아. 어떻게 알고 온다는 거야?”
“헌터중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
“뭐?”
“병신이 어디에 자빠져 있는지 알아내는 능력을 가진 분이 있다고. 병신아.”
시현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길무영은 화가 나서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고 그러다가 그래비티를 바라보았다. 무슨 지랄 맞은 게 자기가 움직이려고 하면 안 움직이고 안시현이 만지면 떼구르르 잘만 움직이는 건지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길무영이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길무영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대로 병상을 지켰다.
덕분에 길무영은 수업도 빠지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길무영은 엄마와 아빠에게 안시현에 대해서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그렇지만 신통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뭔가 있어. 뭔가 있어. 그 병신한테.’
길무영은 혼자서 병원 천장을 처다보면서 그 생각에만 열중했다.
***
길무영이 없는 교실에서는 이용재가 왕이었다. 하필 그런 무법 천지 속에서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계급으로 따지자면 시현이보다는 한참 위였다. 부모가 일반인이었고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라고 했지만 현신 고등학교에서는 그런 건 알아주지도 않았다.
유기태는 이용재에게 오랜만에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시간에 유기태가 전학온 아이 자리로 걸어갔다.
시현은 저녁마다 계속되는 차크라 훈련 때문에 졸려서 거의 돌 지경이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마를 책상 위에 딱 붙이고 얕게 코까지 골아가면서 잠을 잤다.
전학생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얼마후였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같이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깼다.
전학생이 책상과 함께 밀려나가고 있었다. 유기태는 아예 끝장을 봐 버리겠다는 듯이 의자를 집어 들었다. 안시현이 본다는 것을 알고 유기태는 더 당당해졌다. 유기태는 전학생을 심하게 다루면서 안시현을 겁주려고 했다.
“잠 자는 거 안 보이냐, 개새끼들아. 씨발. 잠도 못 자고 피곤해 죽겠고만.”
시현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유기태를 노려보았다.
“뭐래냐, 저 새끼! 약 처먹었냐? 야, 병신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
“말하는 것도 못 알아들으면 네가 병신이잖아. 이 병신아.”
시현이 유기태를 보고 말했다.
“이 새끼. 너 오늘 죽었어. 씨발! 무영이가 너랑 같은 방 쓰니까 네가 무영이 믿고 설치나본데. 그래. 좋아. 마침 무영이 없을 때 이 새끼. 아주 죽여서 파묻어버린다, 내가. 씨발!”
유기태가 말했다.
“뭐로? 주걱으로? 병신.”
시현이 빈정거렸다. 별 것 아닌 말인데 유기태는 안시현이 하는 말을 들으면 괜히 빡쳤다.
“하,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눈깔에 뵈는 게 없나!”
“병신년처럼 주둥이로만 떠들지 말고 들어오라고, 개새끼야. 싸울 거면.”
시현의 말에 유기태는 의자를 창문으로 던졌다. 커다란 유리 조각이 유기태의 손에 들렸다. 유기태는 미친 듯이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손에 그런 것을 잡아본 적도 없는 놈이 그냥 분에 못 이겨서 그러고 있었다.
시현이는 용하 삼촌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화를 못 이겨서 자기 집 유리창을 깨뜨리고, 화가 나서 구조 요청도 하지 않고 피웅덩이 속에서 죽은 남자 얘기.
유기태를 보고 있자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은 순전히 유기태를 도와주겠다는 착한 의도로 유기태의 손목을 발로 찼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유기태가 큰 일을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뼈가 부러지면서 살을 뚫고 나오는 결과는 시현의 예상 속에 없었다. 그것을 보고 유기태가 더 놀랐는지 시현이 더 놀랐는지 모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