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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꼬꼬마 헌터
해민은 그 위를 한 번 더 자르고 그 사이의 것을 발로 차냈다. 나무는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가운데 부분이 잘려나간 채로 윗부분이 툭, 떨어지면서 균형을 이루었다.
해민이 시현을 불렀다. 시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해민이 무엇을 하라는 건지 알 것 같아서 다가갔다. 해민은 다시 칼을 휘둘렀고, 나무는 위태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사이에 있는 걸 발로 차 내는 거야. 위에 있는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시현은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민이 한 것을 이미 보았기에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해민은 한 번 더 시범을 보였다. 시현은 점점 더 몰입하면서 해민을 바라보았다.
"해봐."
시현은 발로 나무를 찼지만 위에 있던 것이 그대로 넘어가며 쓰러졌다. 해민처럼은 되지 않았다.
"감이 와?"
"전혀요.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사이에 있는 나무를 차내는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잘 안 돼서 그러는 건 아니고?"
해민이 시현의 어깨를 툭툭 쳐 주면서 말했다. 힘 내라거나 잘 견뎌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좋은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그루에 몹쓸 짓을 해 놓고도 해민은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그 정도면 차크라를 꽤 쓴 것 아니예요? 숨 차지 않아요?”
시현이 물었다.
“그랬다간 헌터 아카데미에 채용되지도 못했겠지. 자.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당연하죠.”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강의 수준을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보게 네 실력을 보여줘봐.”
“네? 저는. 아무 것도 아닌데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미하일 교수님이랑 레오니드 교수님이 어떤 분들인데 아무 것도 아닌 애한테 그렇게 마음을 쓰겠어?”
하지만 그렇게 시현을 충동질한 해민은, 잠시 후에 시현보다도 더 얼굴을 붉히고 서 있게 되었다. 정말로 이렇게 완벽하게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뭐. 일단. 의욕은 생기네. 완벽한 백지니까 내가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는 거잖아?”
시현도 해민이 스스로를 격려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가지만 명심해. 네 차크라가 나서서 싸우게 하면. 너는 이미 그 순간에 지는 거야. 네 차크라를 써서 네가 싸우는 거야. 네 힘으로. 알았지? 엄마는 집에 계시라고 하고 네가 싸우는 거라고.”
“네.”
“그래. 됐어. 재미있겠다. 당분간 이 수업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는 거다.”
“나이 많은 사람이 비밀을 만들고 비밀을 지키라고 강요하면 그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삼촌이 그랬는데.”
시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했다. 그것 역시 익헌 삼촌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해민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장난을 하는 거라면 받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짓고 있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설마 진지하게 하는 말인가 하면서 해민이 물었다.
“……. 내가 너를 건들까봐서 그러는 거야?”
“건들다뇨?”
“아냐. 그리고 야. 나랑 너랑 나이 차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야!”
"그래도 저보다 많잖아요. 근데 건든다는 게 무슨 말이예요?"
"됐어! 그만 말해!"
해민은 별 꼴을 다 보겠다는 듯이 시현을 흘겨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시현은 해민이 아작을 내 놓은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해민을 뒤따라갔다.
“길은 어떻게 알고 나가는 거예요? 나가려고 봤는데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던데요.”
여자 걸음을 자기가 못 따라 갈 거라고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걸어서 가는 해민을 따라잡겠다고 어느새 종종 걸음을 치다가 나중에는 뛰고 있었다.
"교수님. 무슨 걸음이 이렇게 빨라요?"
시현이 말했다.
"차크라 훈련을 하려고 왔는데 당연히 차크라를 써야지."
"아아. 이럴 때도 차크라가 쓰여요?"
"헌터들 움직임이 괜히 빠른 거라고 생각했니?"
"멋있어요, 교수님."
시현이 대단하다는 듯이 말해주자 어느새 우쭐해져서 해민이 속도를 키웠다.
"내가 제대로 달리면 너는 전력으로 뛰어도 나를 못 쫓아올 걸?"
해민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시현을 비웃어줄 생각으로 뒤를 돌아봤는데 시현이 보이질 않았다. 이 자식이 그것 하나 제대로 쫓아오지 못하고 그 사이에 길을 잃은 건가 하고 뒤를 돌아보고 있는데 어깨에 무언가가 얹어졌다.
깜짝 놀라며 해민이 방어자세를 취하며 물러서자 그 앞에 있던 시현이 웃었다.
"저예요. 교수님."
해민은 놀란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낑낑대면서 해민의 뒤를 쫓아오던 녀석이 어느새 해민을 앞질러서 해민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주책맞은 심장이 요란하게 쿵쿵 뛰었다.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제 감정을 무시하고 시현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떨구어졌다.
해민은 제 얼굴이 붉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붉어지는 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시현을 지나쳐서 걸었다.
“새로 난 나무들을 찾아봐. 거기는 헌터들이 연습을 한 곳이니까. 그곳들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결국 숲 밖으로 나가게 되지.”
“아아.”
“그런데. 방금 그건 어떻게 한 거니? 차크라를 쓴 거니?”
해민이 물었다. 시현은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가는 용하 삼촌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아, 이거요.”
시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해민도 시현이 대답하지 않는데는 그마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이 숲을 빠져 나가야 정신이 차려질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때부터 해민은 밖으로 나가는데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시현은 해민을 따라가면서 해민의 손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손으로 차크라 모으는 거요. 그거 알려주시면 안 돼요? 연습해 보고 싶어서요.”
“내일.”
“네! 시간 맞춰서 여기로 올게요.”
숲에 들어올 때의 기분은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해민은 그런 시현을 보고 웃었다.
숲으로 재미있는 녀석이 굴러들어올 거라더니 프레딕터의 말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길무영은 혼자 기숙사로 돌아왔다.
안시현이 왜 그렇게 클랜 A의 레이드 동영상에 집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길무영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클랜 A 관련 자료를 모두 꺼냈다. 미키 위도의 기사와 인터뷰 자료도 찾고 클랜 A의 해산 발표를 하는 임정의 기자회견 자료도 찾았다. 그러다가 길무영은 잽싸게 지우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뭐야, 설마. 이 자식이?’
길무영은 안지우의 얼굴이 나와있는 자료도 전부 찾았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안지우의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무영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번호를 눌렀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혹시 안시현이요.”
“그래. 왜?”
“혹시 안시현이 안지우 헌터님 아들이예요? 안지우 헌터님이랑 임정 헌터님 아들요?”
“지금 레이드 준비중이다. 너는 네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길무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문이 열렸다.
민효재는 급히 들어왔다가 길무영이 안에 있는 걸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민효재는 책상으로 가서 주섬주섬 책을 꺼내고 그대로 길무영의 앞을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야, 천민.”
민효재가 걸음을 멈췄다.
“너. 안시현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길무영이 물었다.
“뭘?”
“안시현 부모가 누군지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시현이는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시현이한테 말을 걸었을 때도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한테 말을 걸면 내가 너같은 놈들한테 맞을 거라고.”
“잘 아네.”
길무영이 몸을 일으키면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민효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시현이한테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해서 시현이를 괴롭힌 거 아니야?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효재가 따지듯이 물었지만 길무영은 그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예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하면서 길무영은 자기가 궁금해하는 것들만 다시 물었다.
“혹시 안시현이 안지우 헌터님에 대해서 궁금해하거나 하는 건 없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바보냐? 질문도 못 알아들어?”
“안지우 헌터님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 모두가 다 클랜 A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아? 너는 안 그래?”
“됐다. 말을 말자. 너를 잡고 말을 섞은 내가 병신이다.”
민효재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나가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서 길무영을 바라보았다.
“시현이는 아직도 보건실에 있는 거냐?”
“뭔 소리야? 수업 안 들어갔어? 헌터 아카데미에 갔다가 나만 먼저 쫓겨나왔는데. 교수님들이랑 얘기 끝나고 수업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교수님들?"
"그 러시아 헌터 교수님들 있잖아. 레오니드 교수님이랑 미하일 교수님. 아니지. 너같은 천민 놈이 뭘 알겠냐. 있어. 그런 분들."
“헌터 아카데미에는 왜?”
“시끄러. 새끼야. 천민 주제에 내가 말대꾸 해 주니까 계속 묻고 지랄이야, 건방지게.”
민효재는 길무영이 말을 하는 도중에 밖으로 나갔다. 길무영도 은근 슬쩍 걱정이 돼서 따라나갔다. 결국 나란히 나가던 두 사람은 여유있게 걸어오는 안시현을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나란히 어디 가냐? 둘이 친해 보인다? 사귀냐?”
시현이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자 길무영과 민효재는 누가 더 기분이 나쁜지 겨루기라도 하려는 듯이 화를 내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시현은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욕만 얼큰하게 처먹고 갈 길을 서둘렀다.
길무영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녀석의 표정이 많이 풀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안도했다. 그러고는 그런 일로 안도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괜히 민효재가 서 있는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민효재는, 생각같아서는 그 다리를 확 잡아서 똑 분질러 버리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 화를 가라앉혔다.
***
이익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미하일이 달려갔다. 이익헌은 쇼핑백을 미하일에게 건넸다.
“차에 가서 갈아입고 나와. 그리고 바로 저기로 오면 돼.”
이익헌은 길 건너편에 주차돼 있는 검은 색 밴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
“모자도 써. 만약을 위해서.”
“네.”
미하일은 차에 들어간지 3분도 안 돼서 나왔다. 차에서 나온 미하일은 렌트카 업체의 직원으로 변장을 끝마친 후였다. 복장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지 시간은 얼마나 돼?”
이익헌이 물었다.
“세 시간 이상요.”
미하일이 그렇게 말하면서 이익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정교하게 바꾸는 것은 아직 이익헌의 솜씨를 따라갈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하일은 평범하게 얼굴을 바꾸는 것은 됐지만 누군가 자세하게 미하일의 얼굴을 본다면 이상한 점을 느끼면서 기겁을 하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미하일은 이익헌으로부터 차크라로 얼굴을 변형하는 기술을 전수받았는데 거의 20년이 되도록 이익헌의 기술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는 뭐가 문제인 것 같냐고 물었을 때 이익헌은 미하일에게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같이 있던 클랜 A의 클랜원들은 모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서 타인에 대해 관심없는 순위로 줄을 세워 놓으면 제일 앞에 설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한다면서 모두들 웃고 떠들어대면서 이익헌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이익헌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그들의 말을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