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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꼬꼬마 헌터
이번에는 예전처럼 말랑한 이유를 대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가 훨씬 명확해져 있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나한테 깝치는 애들을 보고 있으면 재밌어지거든. 나중에 혼을 내줄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 삼촌은 그때 도와줘.”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시현이가 무서워보이기도 했다.
그건 그거고.
복도에서 삼촌이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시현은 그 앞에서 줄행랑을 쳤다.
“야!”
용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이 일제히 용하와 시현을 바라보았다.
“너! 너……!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용하는 녀석들 때문에 제대로 할 말을 하지도 못하고 분을 삭였다.
시현은 켁켁거리면서 한참을 달렸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건물 옥상에는 학생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그곳은 늘 자물쇠로 잠겨있었지만 시현에게는 삼촌의 열쇠를 복사해 놓은 것이 있었다.
옥상에서 학교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오늘은 문이 열려있네?”
문 틈으로 먼저 들어온 머리카락은 잘 익은 벼이삭처럼 노란 색이었다. 황금 빛깔이라고 해 주는 게 더 좋으려나? 레오니드 소로킨이었다.
“어!”
레오니드 소로킨이 먼저 시현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시현도 그를 알아보았다. 자신의 스타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현은 바짝 긴장을 한 채 차렷자세로 레오니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야, 여기에 누가 있나 봐. 빨리 와 보라고!"
레오니드는 정신없이 미하일을 잡아끌었다. 미하일은 느그적거리면서 따라오는 중이었다.
옥상 문이 열려있으면 열려있는 거지, 십 대도 아닌데 웬 호기심이 그렇게 철철 넘쳐서, 열려있는 문은 다 밀고 들어가 보겠다는 거냐면서 아직까지 불평을 해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미하일도 옥상에 있는 사람이 시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도 곧장 십 대 같은 호기심이 철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시현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두 스타와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 사실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멍하니 있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 어어.”
레오니드는 겨우 대답을 했고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미하일은 하필 머리카락이 은발이라, 레오니드와 비교해서 안 그래도 늙어보이는 얼굴이 더 늙어보였다.
두 사람은 아직 삼십 대 후반도 안 된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실제보다 어려보이는 얼굴 때문이었다. 미하일만 혼자 두고 보자면 그런 말을 듣기가 어렵겠지만 레오니드가 워낙 그래보여서 미하일도 도매급으로 같이 취급을 받았다. 나쁜 얘기는 아니라서 미하일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아빠랑 똑같다. 그렇지?”
레오니드가 미하일에게 소곤거렸다. 시현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손으로 입까지 막은 채였다.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사장이.”
미하일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한 걸 이사장이 어떻게 알아? 네가 말할 거야?”
“아니.”
“나도 말 안 할 건데. 너는 말할 거야?”
레오니드가 갑자기 시현에게 물었다.
“네? 뭘요?”
들리지도 않게 자기들끼리만 뭐라고 속닥거리다가 갑자기 너는 말할 거냐고 물으니 시현으로서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진짜 신기하다. 엄마 얼굴도 있다. 보스보다는 얘가 더 잘생긴 것 같아. 보스보다는 엄마쪽이 더 미인이었지.”
레오니드가 말했다.
“엄마는 성형한 거라던데? 근데 자꾸 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이사장 한 번 돌면 장난 아닌데. 우리가 이런 말 한 걸 이사장이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안 들은 걸로 할래.”
미하일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에 비해서 소심한 구석이 있는지 아예 귀까지 틀어막았다.
시현은 그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작은 소리로 속닥거려서 들리지는 않고 궁금증만 생겨서 죽을 지경이었다.
“사진 찍어서 야로슬라프한테 보내볼까?”
레오니드가 미하일에게 묻자 미하일이 펄쩍 뛰었다.
“이 멍청아! 야로슬라프는 보스랑 같이 있을 텐데! 우리가 쟤 사진을 찍어서 야로슬라프한테 보내면 보스도 알게 될 거라고! 그럼 보스가 이사장을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이사장이 보스한테 깨지면 이사장이 우릴 가만히 놔둘 것 같아?”
“그런가? 그럼 사진만 찍고, 보내지는 않으면 되는 거지?”
레오니드는 꽤 즉흥적인 사람 같았고 추진력이 대단해 보였다. 레오니드는 시현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현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거 왜 이러시냐는 표정을 짓자 레오니드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듯 놀라면서 이렇게 동그랗게 눈을 뜨니까 아기때랑 똑같다고 말했다.
옥상 위에 얼음 덩어리를 쏟아부은 것처럼 냉기가 감돌았다. 일순간,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기때랑 똑같다는 말에 시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를……. 아세요?”
시현이 레오니드에게 물었다. 레오니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미하일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자기는 이 사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오늘 여기에 안 올라온 거다. 너, 꼬맹이! 여기에서 나를 봤다고 하면 죽어! 너는 그냥 저 멍청이만 본 거야. 내 이름이랑 헷갈리지마. 레오니드 소로킨. 그게 저 멍청한 자식 이름이다. 저 멍청이가 혼자 팔랑거리면서 여기에 올라온 거고 너는 저 자식만 본 거야, 알았어? 너희 삼촌한테 나를 봤다는 말을 하면.”
“저희 삼촌을 아세요? 아니. 그보다. 그 분이 제 삼촌이라는 걸 아세요?”
“……!”
미하일의 표정이 굳어지는 동안 뒤로 바람이 휙 지나가는 것 같더니 옥상에는 어느새 미하일과 시현, 둘만 남겨져 있었다.
“레오…니드는 어디에 간 거야?”
미하일이 물었다.
“방금 내려가시는 것 같던데요? 헌터 아카데미의 미하일 세르게예프 교수님 맞으시죠? 교수님. 저랑 삼촌을 아세요? 제가 어렸을 때 저를 본 적이 있으세요? 혹시 저희 부모님도 아세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방금 그렇게 말씀을.”
“어. 내가 그게 있어. 정신적인 문젠데. 정신과 치료를 계속 받는 중이야. 다중인격 장애라는 건데. 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응. 그래서 상당히 좀 심각한 문제야. 가끔 전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미치신 거라고요?”
“응? 응.”
“…….”
“…….”
“저는 모르시는 거고요?”
“미안하다.”
“왜요?”
“아니. 내 말은, 너같은 애를 알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몰라서. 아쉽잖아.”
“저는 이 학교 다녀요. 현신 고등학교요. 헌터가 되면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갈 거고요. 내년에 헌터 테스트를 받아요. 그러면 저는 헌터가 될 거예요. 헌터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교수님한테 배울 수 있는 거죠?”
“너는 헌터가 못 될 거야.”
“네?”
그때까지 바보처럼 굴기만 하던 미하일이 강경하게 말했다.
시현의 눈에 놀라움과 서러움이 동시에 번졌다. 하지만 미하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안시현.”
“제…이름도 아세요?”
미하일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단풍처럼 물이 들었다.
사람들이 미하일에 대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그 부분이었다. 미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미하일처럼 적절한 사람이 없지만 문제를 길게 내다보거나 체계적으로 말을 이어갈 능력은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었는데 지금 그 우려가 현실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수업이.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선생이 먼저 약속을 어기면 학생들도 자연적으로 흐트러지게 되는 거지.”
미하일은 정신이 없기는 없었는지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놔두고 난간으로 뛰어간다했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여기 26층이예요, 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난간으로 달려간 시현의 눈에는, 나뭇잎처럼 팔랑거리면서 건물의 이쪽 저쪽에 발자국을 찍어대며 내려가는 미하일의 모습이 보였다. S급 헌터의 차크라란 저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시현은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삼촌에게 물어볼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S급 헌터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즐거운 일이었다.
‘야로슬라프?’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가려던 시현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레오니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낯설지 않다 했더니. 야로슬라프는 클랜 A가 미노타우로스 괴수와 싸울 때 안지우와 함께 미노타우로스의 다른 머리를 공격했던 러시아인 헌터였다.
‘레오니드 소로킨 교수님이 말한 사람이 그 사람인 건가? 도대체 저 분들은 누구고 나를 어떻게 아는 거지?’
시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때 수업 시작 십분 전임을 알리는 종 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졌다.
***
현신 고등학교 2학년인 안시현은 현신 고등학교 남학생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속해 있으면서도 다른 녀석들처럼 고분고분한 것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어른들의 총애를 받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까지 풍기는데다 은근히 사람의 기를 죽이는 얼굴로, 보는 사람들에게 괜히 패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현신 고등학교에서 여자 친구와 사귀고 있는 남학생들은 안시현을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안시현이 핵미남이라거나 그런 건 아닌데 안시현이 지나가면 여자애들이 긴장감을 확 느낀다는 게 눈에 띄곤 했다. 남자 친구들이랑 같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더에 안시현이 잡히면 갑자기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거나 청량한 웃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안시현에게 사족을 못 쓰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껄렁한 느낌에 늘 혼자 다니고, 여러 명이랑 붙어도 겁 먹는 표정을 짓지도 않고 혼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꼴에 헌터가 되고 싶은지 헌터 아카데미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때가 많고 친구라고 할만한 녀석도 없었다.
안시현에게 친구가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시현의 반, 피라미드의 상부층에서 시현이 고립되도록 조율을 하고 있는 탓이다. 누군가 시현과 눈을 맞추거나 말을 하기라도 하면 그 녀석은 그날 체육관으로 끌려가서 삼십 분은 족히 두들겨 맞았다. 그렇게 맞고 돌아오면 시현이 살갑게 말을 걸어도 시현에게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시현도 상황을 눈치챘다. 헌터인 부모를 둔 녀석들은 알량한 권력을 누리고 싶어했고 교실 안의 세상을 조종하고 싶어했다. 시현만 아니었다면 원활하게 돌아갈 우주의 원리가 시현이라는 툭 튀어나온 돌 때문에 자꾸 어긋나는 것이 그 녀석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시현은 저 때문에 다른 애들이 맞는 것이 싫었다.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 안에 있는 빈 종이컵처럼, 지금 뻐기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을 언제든지 비틀어지게 쥐고 누를 수도 있었다.
시현은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을 때가 오면. 그렇게 하기로 시현이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녀석들은 영원히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곤두박질치게 되는 것이다. 녀석들의 운명을 알고 그것을 뒤흔들 힘을 갖고 있는 시현에게는 그것이 그냥 우스울 뿐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들.'
점심을 잽싸게 먹고 평소와 다름없이 헌터 아카데미 쪽으로 향하는데 현신 고등학교에서 헌터 아카데미 사이에 있는 작은 휴양림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났다. 그냥 지나가자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삼촌이 잘 숨겨둔 동영상을 찾아서 불쑥 불쑥 올라오는 본능을 잠재우고는 있지만 라이브로 즐기는 것은 색다른 묘미가 있을 것 같았고 야외에서 이런 대담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관객을 원하는 걸 거라는 생각까지 더해져서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