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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카르마 클랜의 헌터들
용하가 밥을 넣어준지가 한참 됐는데도 입 안에 있는 밥이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시현. 자꾸 밥 안 먹고 그거만 보면 끈다!”
“끄면 안 돼요. 끄면 안 돼요. 시현이 밥 먹을게.”
“끄면 안 된다는 소리만 존댓말로 하지!”
“안 그래요. 시현이 밥 먹잖아. 거봐. 다 먹었잖아.”
그래놓고 용하를 향해서 입을 또 벌렸다. 새 새끼가 벌레 달라고 그러는 것 같아서 용하는 그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더니 제 자식도 아닌데 시현이가 밥 잘 먹는 걸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시현이 열심히 보고 있는 동영상은 클랜 A가 쿠퍼티노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해치우던 때의 동영상이었다. 지우가 나올 차례가 되자 시현이 어느 새 방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지우가 달리는 것을 따라서 저도 마구 달렸다.
“시현이. 밥은 안 먹는 거야?”
용하가 말했다.
“아니. 먹는 거야.”
시현은 또 달려와서 밥을 먹고 동영상을 보고 지우를 따라하면서 다시 달렸다. 지우는 팔을 앞으로 쳐들지 않는 것 같은데 시현은 거기에 상상을 가미한 건지 꼭 팔을 쳐들고 달려갔다.
아빠라고 알려주지는 못했다. 어차피 아이들은 믿지 않을 거고 시현이는 억울해 할 거고 지우가 시현이를 보러 오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시현이는 클랜 A가 좋아, 삼촌이 좋아? 라고 물으면 시현은 고민을 했다.
답은 이미 클랜 A가 좋은 걸로 정해져 있지만 삼촌한테 사실대로 말을 해도 되는 건지 거짓말을 해 줘야 되는 건지 그걸 결정하려고 고민하는 것이다.
시현은 그럭저럭 학교 생활에 잘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다. 가끔 시현을 괴롭히는 녀석들이 나오면 용하가 뒤에서 해결을 봐 버렸다. 시현이를 위해서 만든 학교였다.
이념? 교육 철학? 그딴 건 다 부차적일 뿐이다.
지우가 시현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어린 시현이 눈에서 눈물 떨어지지 않게 튼튼한 배경이 돼 주겠다는 게 용하가 갖고 있는 단순 무식한 목표였다.
영상에서 임정이 나올 때가 되면 시현은 임정을 따라서 뛰어다니지는 않고 입을 귀에 걸고, 하아, 하는 표정으로 임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걸 보면, 엄마를 아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카메라가 건물 옥상에 있는 용하와 시현을 잡을 때면 시현은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베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는 제 삼촌을 흉내내서 베개를 들고 멋있게 서 있는 것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 용하 삼촌이고 베개가 자기라는 건 전혀 모르면서 매번 지치지도 않고 동영상을 보고 또 봤다.
그건 시현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도 클랜 A를 마음속의 영웅으로 삼았다. 남자 아이들이 모이면 서로 안지우를 하겠다고 싸웠고 그중에 잘 생긴 녀석들이 이익헌을 맡았다.
시현은 한 번도 이익헌은 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안지우를 맡지 못하는 걸 억울해하기는 했지만 이익헌을 맡지 못하는 걸로 속상해하지는 않았다.
“시현아. 엄마 아빠 다시 만날 때까지 삼촌이랑 행복하게 살자?”
용하가 말했다.
“그래야지 뭐.”
“'그래야지 뭐.'라고? 시현이는 삼촌이랑 사는 거 안 좋아?”
“좋다는 소리야. 삼촌.”
용하는 시현이를 위해서라도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잠깐만요. 그렇게 하지 말아봐요. 아뇨. 빼봐요.”
“왜? 깊어?”
이익헌이 슬쩍 허리를 뒤로 빼면서 물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태클이었다. 그런 말이 나올까봐서 충분히 조심하고 있는데도 아영은 또 얼굴을 찡그렸다.
“하기 싫어서 그래?”
결국 익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그런 게 아니라. 아파요.”
“아파? 왜?”
“그건 모르겠고.”
“병원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다른 때는 괜찮은데 삽입을 하면 그래요.”
“그럼 하지 말까?”
“천천히 해 봐요. 너무 깊게 하지는 말고.”
“자기가 아프다는데 왜 하겠어. 다음에 하고 오늘은 병원에 가 보자.”
“화 난 거 아니예요?”
“내가 짐승이냐? 내 여자가 아프다는데도 박고 싶어서 미쳐버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죠.”
아영이 혀를 내밀고 익헌을 놀렸다. 하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았고, 병원에서 큰 병이라고 말할까봐 무섭다고 버텼다. 정말로 전혀 아프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에는 12시가 넘도록 일어나지도 못했고 둘이 나란히 늦잠을 자버렸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선아영. 몸살인가보다. 오늘은 회사 나가지 말고 그냥 쉬어. 내 말 듣고 그냥 쉬어. 알았어?”
익헌이 말했다.
대충 대답만 하고 출근 준비를 하면 화를 낼 거라는 말도 했다.
“익스트림 헌터 대표 자리가 그렇게 간단한 건 줄 알아요? 내가 안 나가면 안 돼요.”
“채준형 마스터나 강 부장한테 맡기면 되잖아. 자기가 꼭 봐야 되는 게 있으면 강 부장한테 집으로 갔다 달라고 하고.”
“정말 괜찮은데. 그냥 자꾸 피곤하고 졸리고 그러는 게 다예요.”
“어쨌든. 이런 건 잠깐 쉬어주면 금방 나을 것이, 계속 버티면 오래 가기도 하고 그런단 말야.”
“알았어요. 알아서 할게요.”
“말 좀 들어.”
익헌은 아영의 앞에서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지연을 호출해 놓고 나서야 익헌은 출근 준비를 했고, 오늘은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거듭 말을 해놓고 클랜 A의 진지로 향했다.
지연은 들어오자마자 아영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건넸다. 그리고 다짜고짜 아영을 욕실로 밀어넣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임신했다고요? 아니예요. 생리를 한 게…….”
아영은 자기가 거기에 똑똑하게 대꾸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야! 정말인가?
테스트기로 1차 검사가 끝나자 지연은 내친 김에 병원으로 아영을 데리고 갔다. 속전속결이었다.
아영은 익헌에게 전화를 걸었고 익헌은 모든 남자들이 갖는 고민에 빠졌다.
나라는 인간이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내가 한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
그때부터 이익헌은 지우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이를 키울 때의 마음가짐부터 임산부를 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코치를 받았다.
지우를 괴롭히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고, 아영이 다니게 된 병원에 아영과 같이 다니면서 아이가 여자 아이인지 남자 아이인지 알려달라고 졸라댔다. 모른다는 말로 일관하던 의사도 나중에는, 아이한테 분홍색 옷들이 잘 어울리겠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익헌이 소리를 질렀다.
“좋았어! 내가 원하던 대로 된 거야. 이거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시현이랑 결혼시켜야지! 얘가 남자애였어봐. 시현이보다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시현이보다 못하다는 걸 자꾸 비교하면서 아이한테 실망하게 됐을 거라고. 그런데 딸이라잖아. 현명하게도 고추를 포기하고 나온 거지. 정말 똑똑한 애 같아. 역시 내 딸이야.”
"고추를 포기한 게 아니고 주도적으로 여성성을 가지고 나오는 걸 걸요?"
아영이 말했다.
"그거나 저거나. 좋았어. 좋았어. 시현이가 내 사위가 되다니!"
아영은 에에? 하고 물었지만 그것, 꽤 괜찮은 생각인데? 하면서 아영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카메라 앞에서 서규태는 몇 번이나 엔지를 냈다. 감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찍는 거면서 몇 번이나, '다시, 다시!'를 외치면서 지우고 다시 찍기를 반복했다.
미키 위도에게 보낼 영상이었다. 맵의 공략법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미키의 부탁을 받고 영상을 만들고 그 말미에 붙일 영상을 따로 하나 만드는 중이었다.
그 영상을 위해서 대본을 쓰고, 외우고, 감정을 실어서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연습을 해 봤지만 어색해 보이기만 했다. 결국, 되든 안 되는 한 번은 끝까지 가 보자는 심정으로 서규태는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키. 이 문제를 두고 오래 생각을 했어요. 나는. 미키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네. 미키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렇다고 정말 막 그렇게 어리기만 한 건 아니었고 스물 두 살 땐가. 한 여자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고백을 했는데. 그 애가 화를 내더라고요. 내가 고백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전부 망쳐버렸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심란하더군요. 나는 친구를 잃었죠.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에, 원래 있던 자리에서까지 쫓겨났죠. 미키한테 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미키를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얘기. 하지만 만약에 미키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러니까 나를 받아줄 수 없고 나를 친구로도 남겨두지 않겠다고 결정을 한다면 그 상황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정말 많이 생각했고. 그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뭐든 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이렇게 계속 미키의 곁을 떠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키도 나를 아니까. 뭔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줬으면 해요.”
서규태는 심호흡을 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걸 강현씨한테 물어봤는데 요즘에는 건강 진단서 같은 것도 떼줘야 한대요. 치아 사진을 가져오라는 부모도 있대요. 나는 뭐. 이 나이가 됐으니까 부모님은 치마만 둘렀으면 괜찮다고 하겠지만. 치과 치료는 결혼하기 전에 마치고 오라는 데도 있다고 하고. 나는 그건 상관없어요. 아니. 지금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어쨌든 나는. 미키가 나에 대해서 객관적인 정보를 충분히 갖고 결정을 내려주길 바랐어요. 얼굴은 알 테고요. 이게 내 몸입니다.”
서규태는 카메라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성범죄로 고소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자체 편집을 했다.
배꼽 위까지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그 뒤부터 잘라냈다.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계속 빠져도 되는 건지. 아니면 이쯤에서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을지. 당신이 알려줬으면 해요.”
마지막은 어색한 손인사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미키의 개인 메일로 동영상을 보냈다. 미키의 개인 메일도 비서가 관리한다는 사실을 서규태는 알지 못했다.
회의를 주관하던 미키는 서규태에게서 온 동영상을 띄우라고 말하고 각각의 기사를 최종점검 했다.
서규태가 보내온 여러 개의 동영상 중에 하필 사적인 동영상이 띄워졌다.
사람들은 미키를 규탄했다. 한 남자를 저렇게 간절하게 만들어놓고 여기에서 자기들을 상대로 마녀짓을 계속하는 것은 그야말로 패륜 범죄라면서 당장 서규태에게 달려가라고 성화였다.
센스있는 비서가 그 자리에서 항공권을 예약했고 미키는 뻥 내쳐지듯이 한국으로 날아갔다.
서규태는 미키가 동영상 고백 하나에 즉각 한국까지 날아올 줄은 모르고 있다가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면서도 미키로부터 확답을 듣지는 못한 상태여서 근심을 지우지 못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용기내줘서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고. 사실은 내가 먼저 고백하고 싶었다는 말도 꼭 하고 싶어요. 그러지 못했던 건.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예요. 여기로 와서 써전과 같이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아직은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새로 시작한 일에 내가 필요할 것 같고요.”
서규태는 미키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