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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카르마 클랜의 헌터들
이익헌이 노린 것은 절정의 순간이었다. 아무리 레이카라고 하더라도 절정의 순간에는 레이카의 집중력도 흐트러질 것이고 그때에는 레이카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차크라에 균열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카도 그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익헌과 직접 하는 거였다면 이익헌의 얼굴을 제 가슴에 끌어당겨 묻어버리는 것으로 그의 눈을 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질 않았다.
레이카는 이대로 상황이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다리가 풀리고 그쪽이 뻐근해지면서 빨리 절정에 달하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익헌이야말로 호기심이 폭발할 정도가 돼서 거의 흥분상태에 이르렀다. 레이카가 차크라를 모두 거두는 순간, 레이카가 어떤 모습이 될지 미칠 듯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레이카는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눈이 까무룩 까무룩 감겼다.
투지가 넘치는 선수가 레이카의 위에서 온갖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선수의 입에서 격정적인 신음이 터져 나오고 피니시 라인을 앞에 두고 그가 전력을 다해 달렸다. 레이카의 호흡도 똑같이 속도를 올렸다. 두 사람의 신음 소리가 어우러졌다. 레이카는 남자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박아넣고 그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묻어버렸다.
레이카의 고개가 이익헌을 향해 돌려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사라졌다. 이익헌은 레이카의 얼굴에 둥지를 틀고 있는 네머티나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네머티나의 기습 공격을 받고도 곧바로 뒤로 피할 수가 있었다. 네머티나는 제 숙주인 레이카의 몸에 여전히 페니스를 찔러 넣고 있던 남자를 노렸다. 이익헌은 불쌍한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벽쪽으로 던졌다. 구하려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힘 조절이 되지 않는 바람에 남자의 등짝이 벽에 심하게 부딪치면서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네머티나는 지금이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순간인 건지, 타협을 해야 하는 순간인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네머티나는 곧 사라졌다.
레이카의 얼굴에 원래의 차크라가 감돌면서 그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갖추었다.
“카르마 클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상당히 짓궂으신 분이군요. 그런 걸 보게 한 건 제 실수죠.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레이카가 말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익스트림 헌터 길드의 사신으로 온 것과 다름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테니 기억을 지우자는 것일 거고.
이익헌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레이카는 일단 자신의 정체를 들킨 이상, 그리고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만큼 두 사람 앞에서 더 이상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레이카의 얼굴이 다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역겹고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이익헌은 레이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굴의 다른 부분은 놔둔 채로 눈을 바꾸었다. 이제 그의 앞에는 레이카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일 뻔이었다.
레이카를 장악한 네머티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익헌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네머티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사라질 뿐 자기가 느꼈던 것들을 세세하게 레이카에게 보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머티나라면 이익헌이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감지할지도 모르지만 네머티나가 사라지고 다시 레이카로 돌아온다면 이익헌은 자기가 레이카를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익헌에게는 보고 따라할 훌륭한 선생님이 옆에 있었다.
이익헌은 남자가 바닥에 풀썩 주저 앉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레이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숙취를 느끼는 사람처럼 머리를 짚었고 이익헌도 대충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남자는 자기가 거기에 왜 왔는지는 알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익헌도 대충 그런 시늉을 했다. 괜히 말을 많이 해서 오해살 빌미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익헌은 레이카에 깃들어 있는 괴수가 네머티나만이 아니라 여러 괴수의 복합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신계 공격을 할 줄 아는 괴수가 들어앉아 있다니,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익헌은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레이카와 남자를 내보냈다.
레이카는 이익헌이 네머티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익헌의 표정에서 별다른 징후는 읽지 못했기에 속편한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레이카가 나가고 이익헌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레이카는 웬만한 괴수의 차크라는 전부 받아들일 수 있는 헌터였던 듯했다. 레이카에게서 보이는 몇 가지 차크라는 아키라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클랜 마스터가 힘을 원했다면 그것을 레이카에게 사용하는 대신 자기가 갖고 싶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카르마 클랜이 공략한 모든 괴수의 차크라가 레이카에게 주입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쓸만한 능력을 가진 것들만 엄선되었을 것이다.
네머티나의 능력을 갖고 있는 레이카라면 레이드 도중에 다른 헌터들을 구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카는 그저, 그들을 구할 이유를 갖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익헌이 지우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을 때 지우도 마침 그를 향해 오고 있었다. 레이카가 지나가는 걸 봐서 볼 일이 끝났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지우는 찬찬히 이익헌을 뜯어보았다.
“이 놈은 세우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볼 것 없어요. 나중에 아영이를 보게 되더라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혹시 아영이가 괜한 의심을 하더라도 나서서 내 편을 들어줘야 돼요.”
“제가 왜요?”
“아, 이 사람이 진짜!”
이익헌은 말을 해 놓고 지우를 잡아 끌었다.
“일단은 호텔로 돌아갑시다. 가서 방을 바꾸죠. 화장실이 고장났다고 하거나. 그런 다음에 미키 위도랑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지우도 토를 달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아키라는 이익헌의 변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익헌이 내내 풀죽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혹시 불발이었냐고 묻고 웃어댔다. 이익헌은 과도하게 화를 내고 먼저 방을 나가버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익헌은 지우에게 레이카에 대한 것을 말해주었다.
지우는 흥미를 가진 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 괴수의 차크라가 혼합돼 있다는 말인 거군요.”
지우가 말했다.
“잡탕인 거죠.”
“그런데도 살아있다는 거고요. 그것도 대단한 능력이네요.”
“언젠가 그것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서열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요. 그리고 괴수의 차크라와 헌터가 서로 제대로 돕고 있지 않아요. 그, 시현이 차크라를 보면 그런 게 있잖아요. 차크라가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 같고 적극적으로 판단을 하고 나서지 않습니까. 그런데 네머티나하고 레이카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건물에 세들어 사는 사람처럼 그냥 어쩔 수 없이 그 몸에 갇혀있다는 느낌이예요. 네머티나 말고 정신 공격을 가한 다른 괴수는, 내가 잘 보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그런 상황에서 그런 걸 생각해 내셨다는 거예요. 저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뭘 말입니까? 다른 녀석을 불러오게 한 거요?”
“그것도 그렇고. 두 사람이 하는 걸 지켜보셨다는 거잖아요.”
“지켜본 건 아닌데요? 제대로 들어갔는지도 못 봤고 거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봤는데? 히야아! 안지우씨야말로 대단한데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부분에 집중을 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아니. 저는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거예요.”
“그런 말은 안 해도 됩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지우는 괜히 황당해져서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이익헌은 지우가 웃든말든 자기가 생각한 것을 계속해서 말했다. 레이카한테 네머티나의 능력이 있는만큼 레이카는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헌터일 거라는 말이었다.
“누구한테요?”
지우가 묻자 이익헌이 멍하니 지우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누구한테냐. 그게 정확한 질문이네요. 안지우씨나 나한테는 상관이 없는 얘기일 테니까.”
“아키라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을까요?”
“모르죠.”
“그런데 듣고 상상을 해 보니까 좀 더럽네요. 얼굴에 구멍이 생기고 거기에서 액체 같은 게 나온다니.”
지우와 이익헌이 호텔로 돌아갔을 때 미키 위도는 거의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추가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 있던 클랜 A도 지우와 이익헌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듣기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추가로 내놓을 정보가 별로 없었다.
“지우씨 말대로라면 이런 거겠네요. 카르마 클랜은 내부에 늪을 가지고 있고 괴수를 관리하고 있는 거죠. 카르마 클랜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을 만들어내는 거고 지금까지 캐츠 아이 스톤을 그렇게 많이 얻은 걸 보면 성공을 한 적도 많았다는 거고요.”
임정이 말했다.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라면 분명히 다른 헌터들보다 능력이 월등했을 텐데 왜 죽인 걸까요? 레이드에 사용을 해서 러프 스톤을 더 많이 모으게 하는 게 카르마 클랜에 더 이익이 되는 것 아니었을까요? 물론 캐츠 아이 스톤이 가치가 높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카르마 클랜은 캐츠 아이 스톤을 판 적도 없었고요.”
서규태가 말했다.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아키라랑 얘기를 하면서 느낀 건. 이 사람은 별로 원하는 게 없는 것 같다는 거였어요. 힘을 가지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건강하고 싶다거나 오래 살고 싶다거나. 그런 욕망을 초월한 사람 같았거든요. 어느 정도 돈을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게 두 배가 되건 세 배가 되건 중요하지도 않잖아요.”
지우가 말했다.
“아키라한테는 동료에 대한 애정도 없어요. 레이카에 대해서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도 없어요. 레이카에 대해서도 그 감정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건 아니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다른 사람들한테 돌리는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익헌이 말했다.
그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이익헌은 곧 침묵이 깨지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요?"
이익헌이 물었다.
"실망이예요. 아짐! 아짐은 그러면 안 되잖아요. 아짐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럼 순결을 지켜야죠!"
야로슬라프가 이익헌을 규탄했다. 저 새끼는 또 뭔 개소리냐, 하면서 이익헌이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뭐라는 건데?"
"레이카랑 잔 거예요?"
야로슬라프가 거듭 물었다.
"지금은 중요한 일로 회의를 하는 거잖아. 여기에서 그런 얘기하고 싶지 않거든?"
"잔 거야. 맞는 거야. 실망이야!"
야로슬라프가 랩이라도 하는 것처럼 운율까지 맞춰가며 이익헌을 비난하자 이익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잤어. 안 잤어! 아영이한테 미안할 짓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들어가기는 커녕 세우지도 않았어!"
이익헌은 여자들도 같이 참여하고 있는 화상 통화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창피해 죽겠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익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사이에 그런 식의 대화는 오간 적이 없었다는 듯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