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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지금은? 지금은 괜찮아?"
지우가 물었다.
"응. 잠 들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웃으면서 잘 놀다가 막 잠 들었어."
"계속 부탁할게."
"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할게. 그렇지 않아도 나도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전화하려고 했을 때는 그 일이 다 끝나 있었어."
지우는 용하에게 시현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 두 사람의 차크라가 교류했던 건 아닐까요? 레오니드랑 시현이의 차크라가요.”
이익헌이 말했다.
“차크라가 교류하다뇨?”
지우가 물었다. 이익헌은 레오니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레오니드의 손가락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익헌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해리의 해변 별장에서 봤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때 해리를 보면서 나는 해리한테 주입됐던 게 레오니드의 차크라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전에 레오니드의 손이 마른 나뭇가지로 변했어요. 해리가 그랬었거든요.”
“그러다가 팔에서 나뭇가지가 뻗어나간다고요?”
레오니드는 끔찍한 농담을 들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레오니드를 따라웃지 않았다.
"뭐예요. 뭐가 그렇게들 심각해요."
레오니드가 말했다.
야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아이온 괴수의 늪에 도착했을 때 야나는 누군가 내려서 리드를 치워주기만 기다렸다. 강현이 리드를 치우고 다시 올라타자 야나는 멋지게 다이빙을 하듯이 아이온의 늪으로 뛰어들었다.
***
“야나하고 같이 다니는 게 정말로 좋은 건지 생각을 좀 더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텀벙텀벙 뛰어들어와 버리니 이건 뭐.”
이익헌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웃기는 것이, 이익헌은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지만 안에서는 열 수 있었다. 꺼지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것 같아서 매번 기분이 나빴다. 그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굴 거면 세진에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어디서 굴러온 강아지가 집에서 주인 가족을 가지고 서열 정리를 해서 줄 세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익헌이 그런 데에 신경을 쓰건 말건 다른 사람들은 늪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바짝 긴장을 했다.
쇳물로 고인 호수는 여전히 대단한 기세였다. 아이온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이온은 만나지도 못하고 늪 밖으로 나가게 될 수도 있었다. 모두들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용광로의 열기를 피할 길은 없었다.
“야나. 할 수 있으면 이 맵에 눈을 내려줘.”
태인이 야나의 본넷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러나 야나는 그 말에 전혀 감동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통하지 않나 봐요. 처음부터 그럴 것 같긴 했어요.”
태인이 서규태를 보며 말했다. 확인하기로 했던 것을 확인했으니 서둘러서 나가자고 하는 말 같았다. 서규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는 것도 이상하겠죠. 우선은 나갑시다. 생각해보면 방법이 아주 없지도 않을 거예요.”
모두들 야나에 올라타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잠잠하던 호수에서 갑자기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쇳물이 벽처럼 일어서며 솟구쳤고 금방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 같았다.
헌터들의 앞에서 저절로 문이 열렸고 모두가 순식간에 야나에 올라탔다. 야나는 늪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이온의 맵은 그들이 늪을 빠져나가도록 호락호락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늪을 빠져나가는 입구가 쇳물 해일에 의해서 매번 가로막혔다. 야나는 그때마다 호수의 주위를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서 해일을 피했다. 쇳물은 숫제 벽처럼 일어서서 헌터들을 넘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지? 우리하고 붙어볼 생각인가 봐요.”
임정이 말했다. 쇳물의 열기는 견디기 쉬운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갑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유혹이 느껴질 정도로 계속해서 땀이 솟았다. 이러다가 탈수 증세를 일으켜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나마 야나가 아니었다면 쇳물의 공격을 피하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헌터들은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야나는 계속해서 호수의 주위를 돌면서 쇳물을 피했다.
“아이온이 나왔어요!”
세진이 호수의 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들 세진이 가리킨 곳을 봤지만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아이온을 호수 밖으로 끌어내지 않는 이상 아이온을 공격할 방법은 없을 듯했다.
“야나. 정말 안 되겠어? 이 맵에 눈을 내려줄 수는 없는 거야?”
강현이 간절히 사정했지만 맵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 정도가 되자 야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흐으으윽!!”
레오니드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모두가 레오니드를 바라보았다. 레오니드는 제 팔을 제 어깨에서 떼어내고 싶은 듯이 털어냈다. 이익헌과 미하일이 그에게 다가갔다. 야로슬라프는 겁을 먹은 표정으로 레오니드를 바라보았다. 레오니드의 팔이 변하고 있었다. 팔꿈치 아랫부분이 굵은 나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레오니드!”
야로슬라프가 레오니드를 불렀다.
“야로슬라프. 도와줘!”
“너는 괜찮을 거야. 괜찮지 않을 리가 없어.”
야로슬라프가 레오니드의 손을 잡아주었다. 모두들 레오니드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거나, 변하지 않은 다른 손을 잡아 주었다.
레오니드를 휘감은 것은 통증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고립의 두려움. 격리의 두려움. 자기가 괴물이 돼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아무도 그런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왜 그런 일이 자기에게 생긴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레오니드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우리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레오니드.”
지우가 말했다. 레오니드는 울컥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레오니드도 알지 못했다. 자기가 간절히 듣고 싶어했던 단 한 마디가 바로 그 말이었다는 것을.
“내가 시현이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 시현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너도 포기할 수 없어.”
지우의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레오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과 야로슬라프도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야. 레오니드.”
미하일이 말했다. 그 말에 기분 좋아해야 할지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았지만, 살다보면 그냥 덮어놓고 감동받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고 그 순간의 레오니드가 딱 그런 상태였다.
“실력을 보여줄 때가 됐잖아. 레오니드. 그동안은 실력을 숨기는 데만 모든 힘을 다 쏟은 것 같던데 말이야.”
이익헌이 레오니드의 등을 탁, 치면서 말했다. 레오니드의 얼굴에도 드디어 웃음이 지어졌다.
야나는 곡예를 하면서 쇳물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고 레오니드는 제 몸의 변화를 이제 담대하게 받아들였다.
“야나. 방향을 바꿔서 돌 수 있겠어?”
레오니드가 말했다. 헌터들은 야나와의 소통이 그렇게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야나는 레오니드의 말에 곧바로 화답해 주었다. 야나는 속도를 줄이고 부드럽게 회전을 했다. 턴을 하기에 공간이 충분해 보이지 않았지만 야나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중요한 시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야나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달렸다.
레오니드의 팔에서 뻗어나간 나무가 쇳물 호수를 향해 조금씩 더 나아갔다.
“레오니드. 탈 거야. 저 쇳물에 닿으면.”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쇳물의 온도는 지연의 감응기로 계산을 했을 때 거의 1600도였다. 거기에 나무를 가져다 댄다고 해 봐야 불이 붙어서 숯이 될 게 뻔했다. 그러나 레오니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괴수가 아니겠지. 고작 그 따위 괴수가 내 안에 둥지를 틀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레오니드가 말했다. 레오니드의 확신에 찬 말에 모두들 조금씩 희망을 품었다.
“야나. 멈춰.”
레오니드가 말했다. 야나는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명령에는 야나도 바로 반응하는 것 같아.”
미하일이 말했다.
“내가 시현이한테 가자고 했을 때도 확신에 찼었는데!”
지우가 말하는 동안 쇳물 호수가 다시 한 번 벽을 이루며 다가왔다.
“레오니드!”
미하일이 그를 불렀다. 야나를 멈춰세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쇳물이 그대로 그들을 덮어버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타버리거나 녹아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온한테 가는 다리를 만들어 주면 아이온을 공격할 수 있겠어요? 제가 호수에 다리를 놔주면요.”
레오니드가 물었다.
“견딜 수 있겠어? 타버릴 텐데.”
야로슬라프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졌다. 그때 쇳물이 그들을 노리고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다.
“야나, 제발 움직여!”
이익헌이 소리쳤지만 야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고집불통 고철 덩어리야! 가라고! 여기에 있다가는 너도 녹는다고, 이 멍청아!”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오니드의 팔에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서 차크라가 번졌다.
“그냥 나무는 아니라고 했잖아.”
면적으로 봐서는 덮쳐오는 쇳물을 다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쪽으로 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험은 통과했어. 될 것 같아요. 제가 다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아이온을 공격하면 돼요. 해 보시겠어요?”
레오니드가 클랜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하는 사람들은 없고 다들 투구를 단단히 쓰고 무기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까지 나서주는데 안 된다고 할 수가 있겠어? 그리고 야나는. 진심으로 싸우려는 사람 말을 들어주는 것 같고. 나도 야나한테 인정받고 싶어.”
이익헌이 말했다.
“아이온도 사실 별 것 없을 거예요. 뜨거운 괴수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막강한 쇳물을 등에 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이온에게 갈 수만 있다면 아이온도 무적은 아니예요.”
세진이 말했다. 명쾌한 말이었다. 맵의 공격은 단조로웠다. 펄펄 끓는 쇳물이 일어나서 헌터들을 위협하는 게 전부였다. 위협으로 끝나지는 않고 기회가 되기만 한다면 헌터들을 태워버릴 기세였지만 그때마다 헌터들을 태운 야나가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바람에 그 공격은 매번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레오니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끝을 알지 못했다. 서규태와 지우는, 만약 맵이 그들을 놔주기만 한다면 오늘은 그냥 늪을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레오니드의 몸에 나타난 변화를 잘 알아볼 필요도 있었고, 시험을 거치지도 않고 그 능력을 실전에 사용해도 될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온의 맵은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야나가 헌터들을 태운 채 몇 번 맵을 빠져나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쇳물의 벽을 일으켜 헌터들의 길을 막았다.
기특하다고 할만한 것은 야나가 혼자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야나에게도 고통스러울만한 열기였다. 그런데도 야나는 다른 헌터들과 같이 버텼다.
레오니드는 야나에서 내려 호숫가로 내려갔다. 야나는 헌터들이 언제든지 탈 수 있도록 스스로 모든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레오니드의 앞으로 나무 벽이 올라오고 있었다.
“굉장한데? 레오니드한테 차크라를 준 괴수는 도대체 정체가 뭐였을까?”
태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레오니드가 만든 나무 벽은 점점 그 높이가 높아지더니 아이온을 향해 기울었다.
“레오니드. 만약에 할 수 있겠으면, 다리 옆으로 벽을 만들어줘. 쇳물이 갑자기 튀지 못하게.”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