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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원통형의 높은 고로에 쇳물이 들어있는 형태도 아니고 커다란 호수에 물 대신 쇳물이 채워져 있는 것을 상상하면 되었다. 용광로의 고로가 땅 속에 박혀있는 것과 같은 구조였다. 그 쇳물 호수가 맵을 거의 차지하고 있고 그 둘레에 흙길이 있었다.
용광로는 매순간 끓어 올랐고 가끔씩 그 쇳물이 갑자기 절벽처럼 일어서서 헌터들을 위협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아이온을 상대로 레이드를 하다보면 쇳물이 튀어 갑옷이 녹거나 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늪의 괴수가 출몰한다고 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것도 걱정이었다. 끓는 쇳물이 같이 넘친다고 하면 그 주변 일대는 용암이 넘치는 것처럼 황폐해질 것이 분명했다. 아이온이 늪 아래에 있는 동안 공략하지 못하면 그 늪 하나의 오픈으로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서규태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겪었던 늪 중에 가장 까다롭고 겁이 나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모든 클랜원이 그곳을 꼽을 것이었다.
“쇳물이 끓는 고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쇳물의 온돕니다. 쇳물을 식히지 않으면 우리는 괴수에게 접근을 할 수도 없을 거예요. 아이온은 그 아래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아이온을 밖으로 유인해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이온을 공략할 수 없습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쇳물을 식힐 수 있습니까?”
이익헌이 물었다.
“야나는 특이한 맵을 다스렸죠. 그 맵의 주인이었고요. 야나는 맵의 환경, 특히 날씨를 자유자재로 다스렸어요.”
“야나가 그곳에서 폭설을 내리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임정이 말했다.
“폭설을 내리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거죠.”
그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만 된다고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헌터에게 공략당하고 다른 괴수의 차크라를 주입받아 살아난 괴수가 다른 괴수의 맵에 들어가서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의지를 떠나서 자신의 늪도 아닌 곳에 가서 그곳의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요.”
태인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야나가 다른 맵에서도 눈을 내리게 할 수 있냐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문제는 절대로 여기에 앉아서 토론한다고 답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고요.”
미하일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래. 그 말이 정확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엉덩이를 떼고 나가서 확인을 해 보자고. 야나가 할 수 있으면 그건 야나한테 맡기면 되는 거고. 그러면 야나도 자기가 더 이상 무의미한 고철 덩어리가 아닌가보다고 오해하고 착각하면서 잠깐이라도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
이익헌이 말하자 사람들은 야나가 그 말을 직접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 입으면서 아이언의 늪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야나가 목적지를 어떻게 알아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애쓴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영역에 존재하는 거라면 그냥 그런가보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 오랜 시간을 괴수와 공존하면서 살다보면, '이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의미없게 되어버렸다.
“야나가 눈을 내리게 할 수 있는지. 오늘은 그것만 보는 거죠?”
야로슬라프가 서규태와 지우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아마 그럴 거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그 늪도 공략을 하기는 해야 하니까 공략법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를 해 보기는 하자고. 그래도 그 날이 오늘은 아닐 것 같아.”
지우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야나는 헤드라이트를 밝게 비추고 늪을 찾아 달려갔다.
***
시현은 저녁을 먹은 이후부터 말이 없었다. 용하가 말을 걸어도 짧게 대답을 하고 끝냈고 일찍 자기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아프냐고 물어도 안 아프다는 말만 하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졸려서 그래, 시현이? 삼촌이 책 읽어줄까? 삼촌이랑 같이 책 읽으면서 잘래?”
“아니?”
졸린 눈이 아니었다. 용하는 시현의 그 눈빛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시현아. 무슨 일 있어?”
“아니?”
"시현이 혹시 삼촌한테 화 나는 일이 있었어?"
"아니야, 삼촌."
그러다가 시현은 침대에서 내려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창틀에 기댄 채로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었다.
“시현아. 거기에 서 있으면 감기 걸려. 이리 들어와. 삼촌이랑 자자.”
“응.”
시현은 그렇게 대답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용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시현의 몸에서 희미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이 보일 때까지 용하는 시현의 침실을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말로 시현을 달래서 시현을 재우려고 했지만 시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현아.”
시현에게서 뿜어나오는 차크라를 보면서 용하가 조심스럽게 시현을 불렀다. 하지만 시현은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안시현. 우리는 시현이가 할 수 있을 거라는 거 알아. 아빠랑 엄마도 그걸 믿었으니까 시현이를 삼촌한테 맡긴 거야. 우리는 잘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응.”
“삼촌이 시현이 믿어도 되지?”
“응.”
시현은 그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했지만 시현의 몸에서 나오는 차크라는 수그러지는 대신 점점 더 강하게 피어올랐다.
용하는 스마트폰을 찾으러 제 방으로 달려갔다. 그 시간은 몇 초도 되지 않았다.
***
레오니드 소로킨은 클랜 A의 다른 클랜원들과 함께 야나에 몸을 실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자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아이언을 공략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레오니드도 아이온을 공략할 방법을 생각했다.
멀리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차크라 기둥을 본 것은 그때였다.
“형! 지우형!”
레오니드가 소리쳤다. 지우가 레오니드를 바라보다가 레오니드가 보고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크라 기둥은 몇 번 더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시현이 있는 곳이었다.
“야나, 멈춰! 시현이한테 가야 돼!”
지우가 소리를 질렀지만 야나는 지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지우가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지우가 바라보던 곳을 보았지만 그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크라의 기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왜 그래요, 형? 무슨 일인데 그래요?"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지우는 차크라 기둥이 솟아올랐던 곳을 바라보면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야나는 모두의 뜻이 모아져서 결정된 대로 따르는 것 같아요.”
레오니드가 말했다.
지우는 용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용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레오니드가 비명을 지른 것은 그때였다.
미하일과 야로슬라프가 레오니드와 같이 앉아있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짐. 레오니드가 이상해요!"
야로슬라프가 겁에 질린 얼굴로 이익헌을 불렀다. 이익헌이 레오니드에게 다가왔다. 레오니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혈관을 타고 쇳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기절을 할 것 같았고, 솟구치는 통증에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자식! 차크라가 나오려고 해. 무슨 일이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등급도 올렸고!”
이익헌이 말했다.
이익헌은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이 떠오르려고 하는 바람에 세차게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익헌의 눈 앞에서 레오니드의 손가락 끝이 갑자기 말라비틀어졌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익헌은 고개를 저었다. 이익헌은 그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해리의 해변 별장에서였다. 해리의 해변 별장에 레오니드와 미하일이 붙잡혀 가서 미국의 A급 헌터에게 차크라를 뺏겼을 때 이익헌은 그들을 구해냈었다. 이익헌은 그때 야로슬라프에게 레오니드와 미하일을 데리고 떠나도록 했다. 그 후에 해리와 라미실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자기도 그들과 함께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 날려줄 거라고 믿었던 파이널 폭탄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그는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혼자 있었다. 목이 베어져서 죽은 해리와 라미실이 살아난 것은 그때였고 해리가 라미실을 공격했다.
그때의 일을 이익헌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해리가 라미실을 향해 팔을 뻗었을 때 팔 끝에 달린 것은 손이 아닌 나뭇가지였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끊임없이 나뭇가지가 자라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자라난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라미실의 몸을 휘감았다. 라미실은 나뭇가지에 칭칭 감긴 채 그 안에서 조여지고 말라비틀어졌다. 나뭇가지는 자비도 없이 라미실의 몸을 계속해서 감아조였고 라미실의 몸은 거대한 블렌더에 갈리는 것처럼 으깨지며 피를 토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리의 몸은 나무 껍질로 감싸졌고 그 크기가 점점 부풀어갔다. 라미실이 죽은 후에 해리는 이익헌을 공격했다. 해리의 발이 있던 곳에서 나무 뿌리가 순식간에 뻗어 나오면서 이익헌을 붙잡으려고 쫓아왔다. 몸에서 빠르게 나무 뿌리와 나뭇가지가 자라서 뻗어나가게 하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옭아매는 것이 해리의 공격 수법이었다.
그때 해리는 레오니드의 차크라를 겨우 몇 시간 정도 주입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차 안에 같이 타고 있는 레오니드는 레오니드 자체였다. 뿐만 아니라 그때보다도 훨씬 강해진 레오니드였다.
이익헌은 레오니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레오니드. 나는 컨트롤러가 아니지만 너를 알아. 이 멍청아. 너도 알잖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우리가 너 때문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이건 배신이지, 이 개새끼야!”
이익헌은 레오니드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부드럽게 설득을 하는 방법은 이익헌이 애용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레오니드는 얼얼해진 뺨을 문질렀다. 충혈된 눈으로 레오니드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레오니드가 느꼈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가 대통령과 경호 헌터들을 죽였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래, 레오니드? 무슨 일이야?”
지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내 몸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레오니드는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차크라 기둥이 치솟아 오르던 곳은 이제 완전히 잠잠해져 있었다. 지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용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용하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 아까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어.”
용하가 말했다.
“혹시. 시현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갑자기 차크라가 나왔어. 폭주한 건 아니었지만 좀 이상했어.”
“이상했다니?”
“몰라. 뭔지 모르겠어. 차크라가 볼 일을 보러 나갔다 온 것 같다고 말하면 이상한가? 그런데 그런 것 같았어. 그러는 동안 시현이는 내내 창가에 붙어 서서 밖을 보고 있었어. 그 사이에 시현이의 몸에서 차크라가 쭉쭉 뻗어나갔어. 전에 차크라가 나오던 거랑은 완전히 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