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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애썼습니다. 세진씨. 오늘 멋졌어요.”
서규태가 말했다.
“아, 맞다.”
태인이 갑자기 서규태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고, 지우도 태인의 비명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서 서규태에게 다가갔다. 모두의 시선이 서규태에게 향하더니 서규태의 갑옷을 우악스럽게 뜯어내듯이 벗겨냈다. 강현은 뒤에 서 있느라고 보지 못했지만, 저를 돌아보며 웃음을 짓는 태인의 얼굴을 보며 일이 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공!”
태인이 엄지를 척, 올려 세우면서 강현에게 말했다. 강현은 함박 웃음을 웃었다. 서규태는 그제서야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를 깨달았다.
“이게 뭡니까! 왜 캐츠 아이 스톤을 나한테 낭비해요!”
서규태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써전님은.”
지우가 입을 열었다.
“저희의 고정점이예요. 거미가 거미줄을 거는 곳요. 저희가 견고하려면 써전님이 계속 그렇게 강하게 버텨주셔야 돼요.”
미리 준비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말을 해 놓고 보니 꽤 근사하게 나온 것 같아서 스스로도 우쭐해졌다. 태인이 지우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두 사람의 손뼉이 공중에서 경쾌하게 부딪쳤다.
“역시 사람은 레이드를 해야 유식해져.”
태인이 말하자 서규태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 다시는 이러지 마요. 만약에 나 몰래 나를 S급으로 만들어버리면 괴수는 다 놔두고 여러분이랑 싸울 겁니다.”
서규태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지었다. 지우는 세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수고했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 세진이도 밥값을 하네. 용하도 이제 나한테 덜 미안하겠다.”
“그동안에도 잘 해 왔잖아요.”
“누가? 우린 지금 신세진 얘기 하고 있는 중인데?”
지우가 놀려대자 신세진은 약이 올라서 펄펄 뛰었고 강현이 세진이를 챙겼다.
“또 우리 세진이 놀리기 타임이 시작된 거예요?”
“응.”
“응.”
지우와 태인이 동시에 말했다. 멀리에서 바디 펌의 트럭들이 다가오는 게 보이자 그들도 슬슬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서규태가 태인과 지우의 사이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고마워요.”
서규태가 말했다. 지우와 태인은 그를 보고 나란히 웃어주었다. 그것으로,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정확하게 그들의 마음이 전달되었다.
***
채준형의 눈이 자신만만하게 빛났다.
이익헌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공격 증폭률이나 방어 증폭률을 획기적으로 올렸을 때가 아니면, 이제껏 나온 적이 없는 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을 때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선아영도 같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 사람이 같이 있는 곳이 선아영의 집무실이었다.
“자.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건 알겠으니까 이제 얘기를 해 보세요. 바디 펌에도 일이 쌓여 있어서 한 번 들러줘야 합니다.”
“바디 펌은 버린 자식 취급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네요?”
채준형이 말했다.
“천 전무가 잘 해 주고 있어서 가끔씩만 이렇게 들여다봐주면 됩니다.”
“사장이 된 것 축하해요.”
“그런 축하는 할 필요없으니까 빨리 얘기 해 봐요. 지금 나한테 할 얘기가 있는 거잖습니까.”
채준형이 자꾸 딴소리만 할수록 이익헌의 애가 점점 닳았다. 채준형과 선아영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드디어 채준형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획기적인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무기라고는 하지만 방어 기능이 더 많다고 해야 되겠죠. 탱커들한테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 될 거고요. 이번에도 클랜 A가 아니었으면 못 했을 일이긴 합니다.”
“뭔지 알겠어요. 웹 스파이더의 거미줄로 넷건을 만든 거죠?”
이익헌은 채준형이 갖고 온 소식이 제 예상 범위를 넘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약간 실망감을 느꼈다. 채준형도 이익헌이 이미 예상했다는 것 때문에 조금 김이 빠지기는 했지만 채준형과 선아영이 준비한 소식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 뒤부터는 대표님이 직접 하세요.”
채준형이 공을 넘기자 선아영이 웃었다.
“웹 스파이더 괴수를 공략하는데 성공한 레이더들은 다른 나라에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채준형 마스터님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죠. 대한민국에서도 익스트림 헌터만 채준형 마스터님을 보유하고 있고요. 우리가 만들어낸 무기는, 이름도 그냥 평범하게 웹인데 웹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공격대의 수준을 달라지게 만들 거예요. 점점 더 많은 정규 공격대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정규 공격대에 가담한 헌터들의 실력이 높아지고 있어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 봐야 괴수와 맵의 진화 속도에 대응할 수준이 안 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한테 설명하듯이 하지 말고 그냥 대충 얘기하면 될 것 같은데?”
이익헌이 말하자 선아영이 눈에 힘을 주고 한 번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할 얘기는 간단해요. 우리는 대단한 무기를 가진 세계 유일의 회사고 이제부터 그 지위를 이용해서 독점적 시장 지배자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로 결정했어요.”
“무서운 말이 연달아 나오고 있는데? 독점적 지배자?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적극적으로 행사해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이익헌이 말했다.
“익스트림 헌터에서 정규 공격대들의 연합인 길드를 조직할까 해요.”
“길드? 그걸 왜? 그게 필요한 시점인가?”
“길드를 만들려는 이유는 하나예요.”
선아영이 잠시 뜸을 들이면서 채준형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결정적인 말이 나와야 할 타이밍에 침묵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이익헌의 가난한 인내심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었다.
“익스트림 헌터의 길드에 속한 정규 공격대에는 파격적인 지원을 해 줄 거예요. 길드는 익스트림 헌터가 요구하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일 년 안에 1천회의 레이드를 하고 러프 스톤을 익스트림 헌터에 매각하는 것도 거기에 포함돼요.”
“익스트림 헌터가 돈독이 올랐다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데?”
이익헌이 시니컬하게 대꾸하자 채준형이 웃었다.
“러프 스톤은 그냥 떡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1천회의 레이드를 해야 된다고만 정할 뿐 몇 급 늪을 몇 개씩 공략해야 한다는 제한같은 건 두지 않기로 했어요. 우리한테 필요한 건 1급 늪의 러프 스톤이 아니라 많은 레이드예요. 짐작가는 게 있습니까?"
채준형이 물었지만 이익헌은 고개를 저었다.
"러프 스톤을 우리를 통해 거래하게 유도하는 건 캐츠 아이 스톤을 위한 겁니다.”
채준형이 말했다.
“……!”
이익헌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길드에 가입하고 유지하는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대신 캐츠 아이 스톤을 하나만 가져오면 러프 스톤 이백 개를 가져오는 것과 같이 취급을 해 준다거나 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세계의 캐츠 아이 스톤은 이제 익스트림 헌터를 단일 창구로 해서 거래될 수 있겠죠.”
채준형이 말했다.
이익헌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머리를 굴렸다. 그동안 미국 정부를 위해서 싸웠던 것은 미국에 급한 늪이 많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의 캐츠 아이 스톤이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몰린다는 점이 컸다.
지금처럼 미국과의 관계가 요원해진 상태에서 클랜 A에게 가장 큰 고민은 캐츠 아이 스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루트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정기적으로 각 나라의 헌터 협회 건물에 처들어가서 강도짓을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익헌 혼자서 계획을 세워놓고 있기는 했지만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선아영. 당신이 생각해낸 거지? 이게 마스터 머리에서 나왔을 리는 없고. 당신은 진짜 천재다. 다 나한테 배워서 그런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놀랍다. 진짜 대단해!”
이익헌이 호들갑을 떨었다.
“웹처럼 레이드에 꼭 필요한 획기적인 아이템들은 익스트림 헌터 길드 소속의 정규 공격대에만 제공할 생각이예요. 야비하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캐츠 아이 스톤을 모으는 건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선아영이 말했다.
“그렇지.”
그 말은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익스트림 헌터의 지분 85퍼센트가 클랜 A의 소유였으니 클랜 A의 목표가 익스트림 헌터의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괴수와 맵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다음 세대에 갔을 때 최강의 괴수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 뿐일 거라는데 모두의 생각이 거의 모아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의 의무라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웹은 그럼. 아! 당분간은 그럼 웹만 집중하자고 할까? 바디 펌도 웹 스파이더의 사체 수거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걸로 하고. 그래야 되겠지?”
이익헌이 말했다.
“그래서 부탁할 게 있는데. 웹에 들어가는 그물을 직조하는 과정까지 바디 펌에서 맡아서 해 줬으면 해요.”
선아영이 눈을 열심히 깜빡거려 가면서 말했다.
“에에에에이. 이 사람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내가 바디 펌 사장인데.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서 일을 떠맡아왔다는 걸 알면 천 전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익스트림 헌터도 놀고 먹느라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요. 웅?”
가만히 놔두면 뿌잉뿌잉이라도 할 기세였다.
“아이, 진짜! 가만 있어봐. 생각 좀 해 보자.”
이익헌은 급히 짱구를 굴렸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획기적인 계획이었고, 익스트림 헌터가 길드를 조직하고 정규공격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앞으로 엄청난 일들을 수행해야 할 거라는 것은 이익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오랜 고민 끝에’ 고단한 결단을 내리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대신 강 부장은 바디 펌이 다시 데려간다.”
“강지연씨요? 어림도 없는 소리죠. 그냥 차라리 그물 직조를 익스트림 헌터에서 하는 일이 있어도 강지연씨는 안 됩니다.”
채준형이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왜 그래요? 강 부장 좋아합니까? 강 부장은 태인씨랑 사귀는 걸로 아는데?”
“누가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영혼으로 교류하는 사이니까 그런 걸로 질투 안 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강지연씨는 놔둬요.”
“혹시. 그. 나하고도 영혼으로 교류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익헌은 괜히 걱정이 돼서 물었다가 채준형의 눈빛에 쏘여죽을 뻔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익스트림 헌터를 생각하면 어떤 무기들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그 무기들을 관리 대상으로 정할 거거든요. 익스트림 헌터 길드 소속의 정규 공격대만 구입할 수 있는 품목으로.”
선아영이 말했다.
“그러게. 알아봐야겠네. 클랜 A가 쓰는 무기들은 일단 다들 들어가야 되겠지?”
“꼭 그렇지도 않아요. 선망의 대상인 것뿐이지 그걸 제대로 다루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엑스 블레이드만 생각해 봐도 그렇잖아요. 클랜 A나 되니까 그 무기들을 그렇게 다루는 거죠.”
“그렇군. 너무 많은 무기를 관리 대상으로 묶으면 오히려 익스트림 헌터 이미지만 나빠지겠다. 잘 생각해야 되겠는데?”
“그러니까 하는 말이예요.”
“알았어. 같이 잘 생각해보자고. 아무튼. 진짜 좋은 생각이야. 자기 최고!”
채준형이 보고 있어도 이익헌은 꿋꿋하게 사랑의 쌍권총을 날렸고 선아영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흐뭇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