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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그래도 써전님의 방어력을 높이려면 어쩔 수가 없죠.”
지우가 말하자 태인이 지우를 바라보며 공모자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캐츠 아이 스톤을 써전님 갑옷에 몰래 넣어야 할 텐데. 그건 형 전문이니까. 잘 하실 수 있죠?”
“캐츠 아이 스톤은 그렇지 않아도 하나 챙겨왔어. 허락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 문제에 왜 제 허락이 필요해요, 형. 그리고 저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요. 저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제가 그런 거잖아요.”
“지우 네가 그런 거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고. 우리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무도 네 옆에 남아있으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그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네가 이런 생각을 할까봐서 그동안 말을 못하고 있었던 거야. 네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생각할 거라는 걸 알면 나는 너한테 점점 더 많은 비밀을 갖게 되겠지.”
“…….”
“응? 우리 사이에 말 못할 일은 없는 걸로 하자.”
“알았어요, 형. 그렇게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써전님을 보게 되더라도 그 일을 아는 척은 하지 말자. 자존심 상하실 거야. 써전님은 영원히 써전님이어야 하니까.”
“그래야죠.”
지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의 방패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노쇠해진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은 슬픔이었다.
"너무 그렇게 축 늘어져 있지마. 이건 일시적인 문제고 우리가 해결할 수 있잖아. 나도 써전님을 무리하게 S급으로까지 올려드리자는 말은 안 해. 그건 분명히 캐츠 아이 스톤 낭비니까. 채준형 마스터님이 없다면 모를까 우리한테는 그 분이 있잖아. 그 분이 새 무기를 계속 개발하면서 공격증폭률을 높여주고 있으니까 우리 공격력으로도 커버가 된다고. 다만 이번에만."
"알아요. 형.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았어요. 미안해하지 않을 게요. 그런다고 해 봐야 변하는 것도 없고.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겠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돼."
태인이 지우를 보고 웃어주었다.
그들이 늪에 도착했을 때 세 사람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인은 괜히 더 과장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세 사람을 놀렸다. 그러자 세진이 곧바로 도발에 넘어가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을 시작했다.
“이건 맵이 너무 달라요. 너무 강하다고요.”
세진이 말했다. 지우는 자연스럽게 서규태에게 다가갔다. 서규태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태인이 서규태에게 캐츠 아이 스톤을 끼워넣을 수 있을 터였다. 태인은 한 방에 깊이 훅 들어갔다.
“써전님, 이렇게 입고 레이드를 하신 거예요? 치매걸린 노인 같잖아요. 세진씨도 있는데.”
“왜요?”
서규태가 놀란 듯이 태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허리가 풀렸어요. 김강현도 웃기는 놈이네. 너는 인마. 이런 걸 봤으면 와서 챙겨드렸어야지!”
서규태가 됐다고 말할 틈도 없이 태인은 이제 강현에게까지 잔소리를 해대면서 천연덕스럽게 서규태의 갑옷을 바로잡아주었다. 서규태는 민망해져서 세진을 바라보았지만 세진은 태인이 하는 말을 아예 듣지도 않고 있었다. 맵의 공략법을 생각하느라고 머리에서 김이 퐁퐁 날 지경이었다.
“채준형 마스터가 이번에 특별히 부탁한 괴수거든요. 웹 스파이더의 거미줄을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데."
서규태가 지우에게 말했다.
"넷건에서 나가는 그물을 그걸로 보강하려는 모양이죠? 그러면 훨씬 더 효율이 올라가긴 하겠네요."
지우가 맞장구를 쳤다.
"그동안 만났던 다른 웹 스파이더의 맵에도 거미줄이 있기는 했지만 검으로 찢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이 늪에 있는 녀석은 다르네요. 엄청나게 질기고 강해요. 그리고 회복력이 문제예요. 괴수 뿐만 아니라 맵도 회복력을 보여요. 거미줄을 끊어도 바로 다시 생겨나요. 그래서 웹 스파이더한테 다가갈 수가 없어요.”
강현이 다가와서 서규태의 말을 보충했다.
“아까 세진이가 위험했어요. 웹 스파이더는 우리 중에 누가 가장 약한지 알아채고 곧바로 세진이를 노렸어요. 그때는 정말 아찔했어요. 세진이가 순간적으로 거미줄 위에서 균형을 잃었고 웹 스파이더가 바로 세진이를 향해서 달려오는데 써전님이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써전님이 그때 부상을 입으셨는데…….”
강현의 말을 서규태가 급하게 막았다.
“별 것 아니었어요. 돌아가서 탱커님한테 한 번 보이면 될 겁니다. 레이드를 계속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서규태가 말했다.
“당연하죠. 써전님은 언제나 괜찮으셔야 돼요. 레이드를 계속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말씀하셔도 써전님이 안 계시면 저희는 이 공략에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계속 싸워주셔야 돼요.”
지우가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계속 바라봐서 서규태는 지우에게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 주었다.
서규태는 이 레이드에서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우가 확실히 그렇게 믿는다는 듯이 말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지우가 그렇게 믿어주면 자기도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이때에, 지우가 보여준 믿음이 그를 조금씩 바로 세워주고 있었다.
"써전님은 치안1부장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저희들의 써전님이니까요."
태인이 말했다. 말을 하고 저도 쑥스러웠는지 후다닥 서규태의 곁을 지나쳐가기는 했지만 그 말이 오래오래 서규태의 머릿속에 남았다.
강현은 여러 말을 할 것 없이 서규태를 바라보고 빙구처럼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서규태도 알 수 있었다.
"하아. 이것참. 이렇게 다들 나만 의지해서 너무 부담스럽네. 이래서야 늙어서 죽을 때도 미안해지겠네. 나 죽으면 그때는 어쩌려고 다들 나만 의지합니까?"
서규태가 말하자 모두들 마음이 놓여서 웃음을 지었다.
“신세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고 말해. 다른 말은 안 돼.”
어느새 세진에게 다가간 지우가 세진에게 말했다. 세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시험보기 1분전까지 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럴 때는 정면 돌파지. 실패가 습관이 될 때는 어떻게든 실패를 끊어내는 수밖에 없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상관없어. 이겨야 할 때는 그냥 이기는 거야.”
지우가 말했다. 용하가 있었으면 그게 뭔 개소리냐고 바로 한 마디가 나왔을 테지만 태인과 강현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지우라면 상황을 그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강현은 태인이 캐츠 아이 스톤을 서규태에게 집어 넣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본 강현은 이 레이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다.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캐츠 아이 스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성공한다면 서규태는 다음부터 더 높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싸울 수 있게 될 터였다. 강현 역시 서규태에게 방어력의 증강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꼭 성공해야만 하는 레이드. 세 명의 헌터들은 그 어느때보다 더 마음을 다졌다.
“들어갑니다.”
그렇게 말하고 지우가 가장 앞장을 섰다.
“신세진.”
“네?”
세진은 지우가 갑자기 돌아서며 자신을 부르자 깜짝 놀라서 발까지 엉켜 기우뚱거렸다.
“끝까지 가 볼 수 있겠어?”
“어떻게요?”
“우리를 믿고. 끝까지 가 보라고.”
“네.”
“어차피 괴수도 아니까. 세진이 네가 가장 약하다는 거. 그걸 이용하자.”
“괴수를 유인하자고요?”
“그렇지. 좋은 미끼가 될 수 있겠어?”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의지는 대단했다.
“웹 스파이더한테 우리가 가려고 하지 말고 웹 스파이더를 우리한테 오게 하자.”
“제가 미끼가 되는 거고요?”
“응.”
“끝까지 가만히 있어야 되는 거죠?”
“사실은. 원래 하던대로 하면 되는 걸 거야.”
“네?”
“원래 하던 것처럼 하라고.”
좋은 미끼가 돼서 괴수를 유인하기 위해 해야 할 게 원래 하던대로 하는 거라면, 그동안 세진은 미끼 역할밖에 못 해 왔다는 건가 하는 생각에 세진은 헌터가 된 이후로 최대의 위기를 맞을 뻔했다. 그러나 지우는 미안한 마음도 없이 세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팀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해. 때로는 미끼도 필요하고. 세진이 너처럼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그러면 되는 거잖아. 어떤 식으로든 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거잖아. 맞지?”
“…그런 것, 같네요.”
떨떠름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었다.
모두들 늪으로 들어갔다. 강현과 태인은 두 배의 부담을 안고 들어갔다. 써전을 A급으로 만들어서 그의 방어력을 높여주고, 그리고 늪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거미줄에 걸려버린 세진이 괴수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그 전에 괴수를 죽여야 했다.
강현이 심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태인이 강현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강현도 깨달았다.
세진은, 늪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거미줄에 걸렸다. 그게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실족을 해서 그런 거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세진이 정말로 몸을 던져서 팀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미끼 역할을 잘 해냈다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진이 괜히 미안한 마음을 느낄 정도였다.
괴수는 1급 괴수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검은 몸에 섬뜩한 파란 동그라미 무늬가 박혀 있었고 온 몸에는 긴 털이 뒤덮여 있었다. 그 파란 무늬는 헌터들에게 긴장감을 높였다. 기를 눌리게 하는 상대에게서 느닷없는 농담을 들은 것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괴수의 몸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면 다리에 난 털이 그렇게 길게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개체의 크기가 20미터를 훌쩍 넘다보니 다리에 난 털 길이 조차도 엄청났다. 큰 것은 괴수의 개체만이 아니었다. 맵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컸다. 웹 스파이더는 그것들에 거미줄을 쳐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큰 괴수가 만든 거미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미줄은 놀라울 정도로 촘촘했고 탄력도 대단했다.
거미줄에 몸이 붙는 것을 떠나서, 그 위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트럼블린 위에 올라간 것 같은 거미줄의 탄력 때문에 위에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듯했다.
웹 스파이더는 도망쳤던 헌터들이 다시 들어온 상황에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전에 썼던 방법대로, 거미줄의 끝에 박힌 채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헌터들이 이상했다. 아무도 먼저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정보창의 타이머는 돌아가고 있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는데도 누구도 먼저 공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 녀석은, 맵으로 들어오자마자 해먹에 올라가듯이 거미줄에 걸려 몸부림을 쳐대고 있었다.
웹 스파이더는 갈등을 느꼈다. 먹이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몸부림을 칠수록 거미줄은 끈적하게 먹이를 옥죄었다.
웹 스파이더에게는 헌터의 고통스런 숨소리가 전부 느껴졌다.
강현이 세진을 바라보았다. 세진의 몸부림이 처음과 다르다는 사실을 모두가 점점 더 확실히 깨달았다. 처음에는 웹 스파이더를 유혹하기 위한 거였지만 그러는 동안 거미줄이 세진을 죄고 들어가면서 점점 숨 쉬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