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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정말요? 세진이가 그 정도로 감각이 있어요?”
용하야말로 뜻밖의 말에 놀라면서 말했다. 익헌은 뭐가 그리 놀랄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중에 신세진씨가 나이가 가장 어리잖아요. 이변이 없는 한 끝까지 살아남겠죠. 우리가 워낙 실력들이 출중하니까 데리고 다니면서 죽일 일도 없을 거고. 그러다보면 신세진이 에이스가 되는 날이 오지 않겠어요? 클랜 A에서 혼자 남게 되는 거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에이스는 에이스잖아요.”
익헌의 칭찬을 기대하면서 이미 환하게 웃고 있던 신세진의 얼굴은 그대로 굳었다. 짬밥도 안 되는 주제에 딱 표정을 굳히지도 못하고, 계속 웃지도 못하고 불쌍한 신세였다.
샴페인 잔을 가지고 나타난 강현이 아니었으면 신세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서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강현이 나타나주었고, 또 우리 세진이 놀리기가 시작된 거냐면서 세진에게 샴페인 잔을 건넸다.
그런 강현을 바라보는 용하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주욱 둘러보니 채준형과 서규태를 빼고 짝 없는 사람은 자기뿐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없어보였다. 채준형은 아예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거거나 아니면 여자한테 쏟았어야 할 열정을 모두 무기에 쏟아부은 것 같았다.
채준형은 어느새 서규태와 지우를 붙잡아 놓고 스마트폰으로 자료를 보이면서 그 괴수 좀 잡아다 달라고 성화였다. 지금 만들고 싶은 방어구가 있는데 그 괴수의 석회질이 꼭 필요하다는 거였다.
다들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해간다는 생각에 용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우와 눈이 마주쳤을 때 지우가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고 용하도 잔을 들어 올리면서 지우를 보고 웃어주었다.
***
서규태의 앞에서 문이 닫히고 있었다. 그날은 왠지,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서 있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뛰었는데도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에잇!”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는데 문이 스르르 다시 열렸다.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안에는 지연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너무 늦은 줄 알았어요. 문이 닫히길래요.”
“아, 열림 버튼을 눌렀는데 제가 너무 늦었던가봐요. 기분 나쁘셨겠어요.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걸 보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잖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렇긴 하죠.”
여자가 조용히 웃었다.
“저…….”
서규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여자가 물었다.
“제 방에 좋은 와인이 있는데요.”
“…….”
‘젠장. 치한처럼 보였나보다.’
서규태는 속으로 생각했다.
“집에 치즈 케익이 있는데. 몇 호에 사시는지 알려주시면 치즈 케익을 가져가죠.”
여자가 말했다.
“치즈 케익은 우리 집에도 있는데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는 걸 과시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서규태는 여자의 웃음을 들여다보았다. 서로가 현실에서 마주 하고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여자는 쇼윈도 속의 마네킹도 아니고 모니터 속의 배우도 아닌데, 여자가 서규태를 보고 웃었다면 서규태도 적절한 반응을 보이기는 했어야 할 텐데 서규태는 방관자처럼, 목격자처럼 여자의 웃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쁘고 좋았다. 그 웃음이.
다른 사람이 짓는 웃음이 첨벙, 가슴으로 튀어들어 번지는 느낌이 들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입술이 웃음을 마치고 다시 오므라들었다. 입술 가운데에 잡힌 굵은 주름 세 개와 그 옆에 자잘하게 잡혀들어간 주름들. 서규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상상을 시작해버렸다. 저 입술을 열고 거기에 자신의 분신을 밀어넣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에 손쓸 틈도 없이 가운데가 묵직해져서 서규태는 가방을 앞으로 들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먼저 내린 여자가 말했다.
“네?”
“몇 호예요?”
“아, 여기예요.”
서규태는 자기 방을 가리켰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두꺼운 카펫이 구둣소리를 전부 받아 삼켰다. 서규태는 여자의 날씬한 다리를 뒤에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방에 혼자 돌아가서 그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는 걸 과시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혼자서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그는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현씨, 내가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해석이 안 돼요.”
“무슨 말이었는데요?”
서규태는 자기가 들은 말을 들려주었다. 강현은 즉각 호기심을 보이면서 그게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물었다. 서규태가 설명을 하자 강현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씻고 오겠다는 거네요. 속옷도 제일 자신있는 걸로 갈아입겠다는 거잖아요. 써전님. 고무줄 늘어난 흰색 속옷 입고 있는 것 아니죠?”
“에?”
“당장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파이팅입니다!”
“아니. 뭐. 별 일이야 있겠어요?”
“그 여자. 입은 작죠?”
“입은……. 네.”
“화이팅입니다. 써전님!”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로 여자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 서규태는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더 이상 쭈뼛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여자의 손에 들려있는 치즈케익에는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것은 필요없는 장식에 불과했다.
서규태는 여자의 몸을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서규태는 여자의 손에서 치즈케익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자는 구두를 벗을 시간도 갖지 못하고 현관 앞에 서 있었고 서규태는 그대로 여자의 몸을 돌려세운 채로 옷을 벗기고 여자의 몸을 현관 문으로 밀었다.
여자는 차가운 문의 촉감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움찔했다. 여자의 등을 서규태가 자신의 육중한 몸으로 밀어댔다. 서규태는 한 손을 앞으로 돌려 가슴을 거칠게 만지고 주무르다가 여자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여자는 이마를 문에 가져다댔다.
서규태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벌리고 발기된 페니스로 천천히 그 사이를 건들었다.
허벅지 안쪽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자 여자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서규태는 여자의 손을 잡아 제 페니스를 문지르게 했다. 여자는 처음에는 놀라는듯하더니 한 번 쥐어준 후로는 그것을 손에서 빼지도 않고 계속 잡고 있었다.
“위 아래로 훑어줘.”
여자는 능숙하게 그렇게 해 주었지만 서규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다.
“더 빨리. 세게.”
여자는 서규태를 만족시키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서규태는 완전히 벌거벗고 먼저 침대로 다가갔다. 여자가 쭈뼛거리면서 그를 따라왔다. 서규태는 침대 위로 올라가 상체만 일으킨 채 누웠다.
여자를 향해서 허리를 한 번 튕겨보이자 여자가 천천히 서규태의 페니스를 잡았다.
몇 분 후에 그 여자는 서규태의 위에 올라탄 채로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규태가 들어가 있었다. 여자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지면서 서규태의 가슴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신음성이 점점 높아졌고 서규태의 허릿짓도 거기에 맞춰서 점점 빨라졌다. 여자는 서규태의 위에서 헉헉거렸고 서규태는 여자의 안에 사정을 하고 싶었다. 여자의 손톱이 깊게 박혀왔다. 서규태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이제 신경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렸다.
등에 와 박히는 날카로운 손톱.
“아.”
서규태가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여자는 고집을 부렸다. 어느새 고추가 죽어버렸다. 참혹한 기분이 들면서 신경질적이 되어 서규태는 여자의 손을 떼내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의 손은 서규태의 등에 늘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서규태의 얼굴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다가. 그는 눈을 떴다.
익숙한 벨소리가 밖에서 들리더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써전님. 전화 왔는데요? 스마트폰을 밖에 두고 들어가셨어요. 미키 위도예요.”
강현이었다.
서규태가 멍하니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나가다 말고 협탁 위에 있던 티슈를 통째로 가져다가 서규태의 앞에 놔주었다. 서규태는 쪽팔림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으윽!’
서규태는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다른 손으로 등을 더듬었다. 등에 푹 박힌 정체불명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붙잡혀 나왔다. 문을 닫으려던 강현이 서규태에게 달려왔다.
“이게 여기에 있었네. 이거 시현이 로봇 주먹인데 이게 없어져가지고 시현이가 한참 울었거든요.”
“이게 왜 여기에 있어요!”
“날려봤는데 어디로 날아간지 못 찾았죠.”
“왜 내 방에서 논 건데요?”
“이 방 문이 열려 있어서요. 제가 데리고 온 건 아니고 시현이가 문을 밀고 들어왔어요.”
“로봇 주먹을 쏜 건 시현이가 아니죠?”
“어떻게 하는 건지 시범을 보이다가. 써전님. 그러다가 전화 끊어지겠는데요?”
강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문을 닫고 나갔다.
“여보세요!”
서규태가 전화를 받았다.
미키 위도였다. 클랜 A에 대한 특집 기사를 쓰고 싶은데 인터뷰를 해 줄 수 있겠냐는 얘기였다.
“나 말고 인터뷰를 해 줄만한 적당한 사람이 있을 텐데요. 그리고 클랜 A는 해산한다고 입장 표명을 했잖습니까.”
“그러면 클랜 A를 위한 게 아니라 헌터와 레이드를 위한 건 어떨까요? 서규태 헌터님이 보급하신 동영상을 보면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거든요. 이 시대에는 그런 게 필요해요.”
“그거라면. 나중에 시간을 한 번 내서 얘기를 해 볼 수도 있긴 하겠군요. 시현이 일로 빚진 것도 있고. 하지만 그쪽에서 와야 될 겁니다. 내가 미국에 갈 일은 이제 없을 것 같으니까.”
“정말 안 오실 생각인 건가요? 클랜 A가 아니라면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데요. 이 일로 제가 아는 사람들도 큰 피해를 입었어요.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이제 괴수한테 가까운 친구나 친척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됐죠. 이런 얘기가 가슴에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미키 위도는 주저하면서 물었다. 클랜 A의 입장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국인을 대변해서 자기가 한 번 정도는 클랜 A에게 진지하게 부탁을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클랜 A가 떠난 후 미국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었다.
“네. 가슴에 닿지 않네요. 멸종할 짐승들은 멸종하겠죠. 스스로 살아나갈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다면요.”
서규태가 말했다.
미키 위도는 서규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클랜 A가 뜻을 돌이킬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해요. 그래도 다음에 시간은 한 번 꼭 내 주세요.”
미키 위도는 힘없이 말했다.
“그러죠.”
전화를 끊고나서야 서규태는 자기가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미키 위도의 잘못이었다. 하필 때를 잡아도 그렇게 잡아서 전화를 한다는 말인가.
서규태는 로봇의 주먹 하나가 아직 침대 위에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이불을 젖히고 샅샅이 살펴보았다. 로봇 주먹은 나오지 않았고 시현의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 개만 나왔다.
그것은 마술을 부리는 재료 같았고, 시현의 머리카락을 집어든 서규태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이 지어졌다.
‘이 녀석. 이제 또 언제 볼 수 있으려나?’
서규태는 시현을 떠올리면서 혼자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