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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괴수의 차크라
시현의 두 번째 생일이었다. 시현은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아빠, 삼촌과 이모들 사이에서 재롱을 부렸다. 이제는 제법 말도 했다.
알아듣는 사람이 용하뿐이어서 용하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불려다녔다. 시현이가 진지하게 뭔가를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무대요. 무대요. 무도대요.”
임정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임정은 도움을 청했다.
“물 주세요, 라는 거예요. 물 주시면 돼요.”
용하가 말했다.
“무도대요는요?”
“물좀 주세요 라는 거죠.”
“글자수가 틀리잖아요.”
“얘도 머리가 크는 거죠. 귀찮은 거 아니겠어요?”
시현이가 ‘유대요.’라고 했을 때 임정은 다시 한 번 위기에 봉착했다.
물 주세요라는 말을 무대요 라고도 하고 유대요 라고도 하나보다고 생각하면서 물을 줬더니 마구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러면서 시현이는 간절하게 임정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유대요, 유대요, 유대요오오! 라고 했다.
용하는 이제 가까이 오는 것도 귀찮았는지 멀리에서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
“그건 우유 주세요 라는 말이예요. 무대요랑 유대요랑 헷갈리면 안 돼요.”
“글자 수가. 아. 네.”
임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들을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러워질 판이었다.
“엄마. 샤양애.”
시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으면 사양하겠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머리 위에 하트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엄마 사랑해? 시현이가 엄마 사랑해?”
“응. 시여니, 엄마 샤양애.”
머리는 크고 팔은 짧아서 손가락을 쭉 뻗어야 두 손을 겨우 닿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예쁜 하트였다.
“야, 시현이는 누굴 닮아서 저렇게 머리가 크냐?”
용하가 지우를 놀리며 말하자 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어렸을 땐 머리 컸어. 머리랑 고추가 컸지. 고추가 허벅지만해서 걱정을 하셨는데 허벅지가 쑥쑥 자라서 고추 크기가 정상적으로 보이더라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지우의 말에 용하가 킬킬거렸다.
“가족 모이는 게 무슨 각국 정상들 한 자리에 모으는 것보다 더 힘드냐.”
짝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시현이에게서 눈을 떼지못하는 지우가 안쓰러워서 용하가 지우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어떻게 돼 가?”
용하가 물었다.
“부사장님이 한 번 갔었지. 야로랑 미하일이랑 같이. 한 번씩 주고 받은 셈이야.”
“부사장님? 이익헌 부사장님? 그럼 끝난 거야?”
“그쪽도 뿌리가 많이 뻗어나갔어. 한 군데 친 걸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부사장님은 믿을만해?”
“말을 마라. 우리 편이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뻔 했어.”
“다행이네.”
용하가 진심으로 말했다.
“학교는 어떻게 돼 가?”
지우가 물었다.
“잘 안 될 이유가 없지. 순풍에 돛 달았다는 말이 이럴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용하가 잔뜩 뻐기면서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 얘기 자세하게 해 줘봐. 내가 도울 일은 없는지도 알려주고.”
“사람들이 뭐. 그냥 서로 돕고 싶어하는 거지. 바디 펌에서 건축 자재는 거의 다 대주고 있고 익스트림 헌터에서 헌터 아카데미랑 헌터 예비 스쿨이랑 헌터 박물관을 맡아 주기로 했어.”
“그래? 어마어마하겠네?”
“바디 펌이랑 익스트림 헌터랑 은근히 경쟁이 붙었어. 원래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학생들을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자는 의견이 나와서 기숙사도 지을 거야.”
“기숙사? 괜찮을까?”
“시현이? 시현이는 당연히 내가 키워야지. 전원 기숙사는 안 되고 기숙사랑 외부 생활을 선택할 수 있게 할 거야. 그래도 전원을 수용할 기숙사는 지을 거고. 거기에 교직원 아파트를 또 따로 지을 거고.”
“교직원 수는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은데?”
“애들 대 여섯 명에 한 명씩 붙이려고 생각하고 있어.”
“애들은 몇 명이나 되고?”
“각 학년 2백명 정도?”
“요즘에 애들이 그렇게 많이 있기는 하냐?”
“없으면 말고.”
“조사도 안 했어?”
“그런 것까지 할 시간은 없어. 그리고. 네가 더 낳으면 되겠네.”
“애 만들 시간이 어딨어?”
“왜 그러셔? 시현이 없을 때 부지런히 더 만들어 놔. 안지우표 애기들은 내가 다 키워줄게.”
“말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를 보면 항상 죄인이 된 것 같으니까.”
“시현이. 많이 보고 싶지?”
용하가 애잔하게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웃겨서 지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네가 잘 키워주고 있어서 안심하고 있어. 이렇게 한 번씩 보면 되지. 잘 키워줘서 고마워. 용하 너도 슬슬 여자를 만나야 되는데.”
“내가 인마. 너한테 그런 걱정 안 끼치려고 만나고 있기는 해.”
“그래? 진짜야? 누군데?”
“시현이 봐주러 몇 시간씩 오는 베이비시터.”
“진짜야? 이 새끼 봐라. 고용주가 막 그렇게 따먹고 그래도 되는 거냐?”
“따먹었다고 누가 그랬는데?”
“안 따먹었을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하지.”
“히야아아. 아직 안 죽었네, 이 자식.”
“내가 먼저 유혹한 거 아니야.”
“어련하시겠냐? 자세하게 말해봐. 하나도 빼놓지 말고.”
지우가 용하의 귀를 잡아 끌고 한 곳으로 사라졌고 그쪽에서 두 사람이 키득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규태는 지우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게 얼마만인가 하면서 여유롭게 파티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사람들은 둘씩, 셋씩 짝을 이뤄 춤을 추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했다.
생일 파티의 손님들이라고 해 봐야 클랜 A의 클랜원이 전부였고 거기에 레오니드와 미하일, 그리고 준 클랜원인 천기정과 강지연, 선아영만 더 끼어있을 뿐이었지만 그들로 충분했다. 레오니드와 미하일은 흘러나오는 음악에 어깨와 허리를 움직이면서 제법 그럴듯하게 춤을 추었고 거기에 시현이도 가세했다. 발을 하나씩 들었다가 내려 놓는 것으로 끝나는 춤이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그 다음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핑크의 ‘언더 프레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태인이 지연을 바라보았다.
“왜요?”
지연이 물었다.
“우리가 같이 있는 동안 핑크의 노래가 다시 나오면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지.”
“누구 마음대로요?”
“왜 이래.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몸을 주겠다잖아. 이럴 땐 그냥 조용히 감동받으면 되는 거야.”
“이상하네요.”
“또 뭐가.”
“이미 사랑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그건 맞아. 그래도 지금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굴어보겠다는 거지.”
“적극적으로 어떻게요?”
“그러게. 그 얘기 좀 해 보자. 여기는 별로 적당한 곳 같지 않아.”
지연에게 손을 내밀자 지연은 장난스럽게 웃더니 그의 손을 따라 일어섰다.
레오니드가 야로슬라프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말했다. 야로슬라프가 보여달라고 하자 자기가 보여줄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하일을 가리키자 미하일은, 아직은 보여줄 단계는 아니라고 하더니 제 얼굴을 천천히 변형시켰다.
“미하일은 바보가 확실한 것 같더라고. 아짐한테 이걸 배운 건 조금이라도 잘 생겨지라는 거였는데 이보다 더 못생겨지는 걸로 얼굴을 바꾸고 있어.”
레오니드의 말을 들으면서 야로슬라프는 미하일을 두둔해주고 싶었지만 두둔해줄 수가 없었다.
차크라가 아무리 남아돌아도, 그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피부를 젤라틴처럼 진득하게 늘여서 블롭피쉬처럼 제 얼굴을 바꾸는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눈은 와이셔츠 단추만큼 조그맣게 변했고 낮은 코는 한없이 커지고 얼굴 끝까지 이어질 것 같은 커다란 입은 양쪽 끝부분이 축 처져서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은 인상으로 보였다.
“좋은 생각이 전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되면 얼굴을 바꾸는 목적이 사라지잖아. 이런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면 모두의 뇌리에 깊게 박힐 거야.”
야로슬라프가 말하자 미하일은 비탄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딱히 비탄에 잠겨서라기보다, 블롭피쉬같은 얼굴로 만들 수 있는 표정은 억울한 표정이나 비탄에 잠긴 표정 중 하나여서 그런 것이다.
“웃기려는 의도면 성공했네.”
야로슬라프가 그걸 격려라고 해 주자 미하일이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면서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제 아짐보다 지속 시간은 길어. 조금 더 다듬기만 하면 될 것 같아.”
미하일은 아직 희망이 남았다는 듯이 말했다.
“다음에는 어류는 피해서 해 봐. 최소한 영장류 얼굴로 해 보자고.”
야로슬라프가 미하일을 격려하며 말했다.
시현이는 파티의 주인공답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을 상대해주고 있었다. 자기 다리로 걸어다니는 건 지치는지 지우를 열심히 부려먹는 중이라서 지우는 시현이를 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녀야 했다. 시현이는 자기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있던 얼굴을 외워야겠다고 생각하는 듯이 한 사람 한 사람과 시간을 보냈다.
“한똠!”
시현이가 이익헌을 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려가면서 반가워 했을 때는 시현이를 안고 있던 지우나 이익헌 할 것 없이 당황해 하면서 뻘쭘해 했다. 솔직히 두 사람에게 아기라는 매개가 없다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익헌은 별 수 없이 시현이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이익헌의 얼굴에 마술처럼 웃음이 만들어졌다. 선아영조차 그 모습을 보면서 신기해할 정도였다.
“익헌씨가 저렇게 자연스럽게 웃는 걸 본 적 있어요?”
옆에 있던 임정에게 선아영이 물었다.
“자연스럽게나 마나. 부사장님이 웃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임정이 말했다.
“시현이는 정말 대단하네요. 익헌씨는 애들도 엄청나게 싫어하거든요. 뭐라더라? 애기들이랑 짐승들은 통제가 안 돼서 싫다고 했나? 그런 면에서 괴수랑 다를 게 없다고 했거든요.”
“부사장님이랑 사귀면 스릴이 넘치겠어요.”
임정이 말하자 선아영이 진지하게 임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남자와 사는 당신만큼 스릴이 넘치겠냐는, 딱 그 정도의 표정이라서 임정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식으로 얘기를 전개시키지는 말자는 뜻이었다.
선아영도 냉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똠!”
시현이는 이익헌의 얼굴을 제 양팔로 감싸주고 있었다.
“너 웃긴다? 함똔이라고 하면 이해를 하겠다. 왜 한똠이라고 해?”
이익헌은 아이를 향해서 무의미한 논쟁에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 오빠 입이 썩어서 발음을 그따위로밖에 못해서 그럴 걸요? 오빠가 말을 그렇게 가르쳐놔서 그렇겠죠.”
그들에게 다가오던 용하의 귀에 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하는 신세진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귀신을 본 것만큼이나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야아아아! 얘 진짜 의지의 한국인이네. 너 정말 불굴의 정신이다. 아직 안 쫓겨난 거야? 아직 클랜 A에서 퇴출되지 않고 계속 붙어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존재감이 완벽하게 없을 수가 있냐?”
용하는 세진을 놀리려는 뜻은 전혀 없이 순전히 신기한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다. 사촌 동생의 머리에서 불이 일건 말건 우선은 제 궁금증이 더 급했던 것이다.
“신세진 딜러가 언젠가는 클랜 A의 에이스로 떠 오르는 날도 있을 거예요.”
이익헌이 시현이에게 멜론을 먹이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