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4 / 0331 ----------------------------------------------
7부. 컨트롤러
어느 순간, 지우의 차크라가 날카로운 발톱처럼 서규태를 휘둘렀다. 서규태가 입고 있던 갑옷이 찢겨나가고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는 그의 피가 흩뿌려졌다.
“안돼. 안돼. 안돼!!!”
지우의 절규가 이어졌다. 지우는 그의 육체 안에서 점점 작아졌고 그대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지우는 완전히 실종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축을 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떨어져나가면서 사람의 형체 하나가 들어왔다. 임정이었다. 임정은 눈 앞에 벌어진 참상을 바라보았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임정에게는 지우만이 보였다. 거대한 차크라를 뒤집어쓴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가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지우에게 다가갈수록 지우는 뒤로 물러섰다.
“안돼. 오지마. 나는 당신을 지킬 수가 없어!”
그의 눈에서 피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임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지우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거대한 힘에, 임정은 저항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를 향해 걸어가는 길 말고 임정이 아는 다른 길은 없었다. 그뿐이었다.
이제 차크라는 서규태를 내버려두고 임정만을 노렸다. 하지만 매섭게 휘갈키려다가도 마지막에 가서 힘을 빼고, 힘을 빼고 하는 식이었다. 임정이 마침내 지우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을 때 지우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가. 곧 한계가 와.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일 수는 없다고!”
“내가 바란 결말이예요. 오래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잘 살고 싶지도 않았어요. 당신이랑 같이 당신의 죽음을 지켜주면서, 바라봐주면서. 나는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임정이 지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는 진짜 바보야. 알아?”
지우가 속삭였다.
임정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임정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지우가 임정을 안아 임정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순간 지우의 차크라들이 임정의 몸을 가르고 들어갔다.
서규태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자아가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그들을 잃는다면,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두 사람의 형체가 그의 눈앞에서 부옇게 떠오르다가 서규태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스러졌다.
지우의 하얀 목덜미에 가는 주사기가 꽂혀있었다. 코모도 괴수의 독침이 지우를 잠시라도 잠재워줄 수 있기를 바랐다. 두 사람의 육체가 피로 물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
로드 벤슨은 오랫동안 클랜 A의 블랙 호크 트리플을 조종하던 조종사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마지막 비행을 마쳤다.
이익헌이 자신을 태워다 달라고 한 곳이 해리의 해변 별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레이더를 가동시켰다. 이 정보 역시 돈이 될 정보가 될 것 같다는 감이 왔다. 그에게는 계속해서 돈이 될만한 정보가 모아졌지만 클랜 A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그 사람들을 건드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충동질에 넘어가고 말았다. 대통령도 이미 상당 부분 눈치를 챈 듯했고 로드 벤슨은 대통령이 의심하고 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확인을 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대통령이 클랜 A를 가리켜, 이미 기우는 해는 무슨 짓을 해도 되돌릴 수 없는 거라고 했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로드 벤슨은 아기의 차크라 얘기를 해놓고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괴수의 정체를 밝힌 로드 벤슨이 미국을 구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한 채 그 비밀이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지만 로드 벤슨의 용감한 시민 정신 때문에 미국 국민들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당분간은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될 수도 있었다. 다시 클랜 A에게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이익헌이 저지른 짓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해리와 라미실을 죽이고 해리의 별장에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의 눈 앞에 다시 얼쩡거리다가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냥 클랜 A는 완전히 잊고 사설 학원에서 헬기 조종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급한 것은, 해리와 라미실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들을 죽인 사람이 이익헌일 거라는 사실을 누가 가장 비싼 값에 사줄지 알아보는 거였다. 로드 벤슨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가 항상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몇 군데의 언론사에 접촉을 했다. 두 세 군데에서 미끼를 물었다.
최근에 대통령과 비밀 회담도 가졌었다는 얘기를 하자 그 이야기도 같이 해 줄 수 있다면 인터뷰 비용을 조금 더 줄 수도 있다고 제의해온 방송사가 있었다. 독점 인터뷰의 대가로 한 방송사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금액은 880만 달러였다. 로드 벤슨은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하는 곳에 결정적인 단서를 보내주고 인터뷰 비용을 올리도록 한 번 더 협상을 해볼지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으니 이제는 편히 놀면서 쉴 때도 되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아내를 불렀지만 아내가 마트에 간다고 삼십 분 전쯤에 나갔던 것이 떠올랐다.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벨이 울렸다.
로드 벤슨은, 자기가 없었다면 그 집은 원래 비어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없는 척을 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벨을 눌렀다. 나중에는 문을 발로 차기까지 했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남의 일에 상관하기 좋아하는 이웃을 두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웃 없이 사는 것은 이럴 때 불편했다. 수상한 사람이 와도 알아서 신고를 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로드 벤슨이 드디어 일어서기로 결정을 했을 때, 2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로드 벤슨은 그게 발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헌터일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로드 벤슨은 곧바로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로드 벤슨입니다. 바로 계좌로 돈을 입금하세요. 이익헌이 해리와 라미실을 죽였다는 증거가 될만한 자료를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방송사하고 독점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클랜 A의 사진을 독점으로 싣게 해 줄 수도 있어요. 2천만 달러로 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무엇이 더 급한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떨어져나갔다. 이익헌이 들어왔을 때 로드 벤슨은 전화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왔습니다. 이익헌이예요. 그가 이제 나를 죽일 겁니다.”
이익헌은 난감한 표정으로 로드 벤슨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는. 숨길 것도 없게 된 건가?”
이익헌이 말했다. 로드 벤슨은 이익헌에게서 달아나려고 창문을 향해 달렸지만 애초에 헌터로부터 도주를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할 생각이었다면 조금 더 서두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익헌은 로드 벤슨을 붙잡았고 로드 벤슨은 비명을 질렀다. 이익헌은 로드 벤슨을 한 번에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를 위해 그런 배려를 해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로드 벤슨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대다가 맞지 않아도 됐을 매를 벌었다.
“당신 말이야. 책임을 좀 져 줘야겠어. 당신은 그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었거든. 특히 자기 자식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은 아버지는 지금 완전히 돌아버렸어. 당신의 혀 때문에 말이야.”
이익헌이 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한 것 없어요! 사실을 말한 것 뿐이라고요. 그 아이가 괴수라는 건 사실이잖아요."
"아니. 그 아이는 괴수가 아니야. 특별한 차크라를 가지고 태어난 것 뿐이지 괴수가 아니라고. 괴수는 늪 아래에서 산다. 괴수는 사람과 교감하지도 못하고 사람한테 감동을 주는 법도 몰라. 사람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사람을 사랑하지도 못해. 차라리 괴수에 가까운 건 너같은 인간이지. 그 아이는 절대로 괴수가 아니다."
"그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이 괴수가 된다고 대통령이 말했어요."
"그래. 사실을 말한 거라고 치자고. 나도 지금부터 사실에 기반해서 너를 죽일 생각이야. 그러면 공정한가?"
"나는 잘못한 게 없어요."
"그렇다고 치자고. 나도 잘못하는 게 아닌 거고."
로드 벤슨이 고개를 저어대는 동안 이익헌의 주먹이 로드 벤슨의 안면을 강타했다. 로드 벤슨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들으면서 이익헌은 그의 안면 뼈를 부수고 치아와 잇몸을 전부 으스러뜨렸다. 사람을 죽이면서, 1급 괴수를 사냥할 때와 똑같은 강도로 때린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조금도 그 강도를 낮출 수가 없었다. 이익헌의 주먹과 얼굴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로드 벤슨의 얼굴은, 식물을 으깨는 그릇처럼 되어 있었고 이익헌이 주먹으로 찧어댈 때마다 이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참을 기계적으로 움직이다가 멈췄을 때 로드 벤슨은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익헌은 치아와 피와 짓이겨진 살이 한데 뭉개져있는 그의 얼굴을 더듬어서 혀를 찾아냈다. 결국 혀를 잡아 뽑아냈을 때 로드 벤슨의 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지 않았겠어? 그렇게밖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 당신은 클랜 A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었던 거지?”
이익헌은 로드 벤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은 돈을 받아가는 것도 아니었잖아.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어? 클랜 A를 알았다면서 왜 클랜 A를 존경하고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한 거지?"
이익헌은 훌훌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채준형에게서 받아온 붉은 가루를 로드 벤슨의 몸 위에 뿌렸다. 그것은 로드 벤슨의 몸 위에서 튀어오르면서 독한 냄새를 내더니 순식간에 로드 벤슨의 몸을 먹어치웠다. 뼈도 남지 않았다. 채준형이 그것에 대해 설명할 때, 그것이 엄밀히 말하면 생화학 무기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이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채준형이 그를 태웠다. 그들이 두 블록쯤 멀어졌을 때 방송사의 취재 차량이 급히 로드 벤슨의 저택으로 향했고, 그들은 운 좋게도 로드 벤슨의 저택이 폭발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이익헌의 행보는 그 후로도 거침이 없었다. 채준형은 한 번 도와주려고 나섰다가 하루 종일 그를 위해 조종을 하고 다니게 됐다면서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이익헌을 옆에 싣고 헬기를 띄웠다.
"원래 그게 그런 겁니다. 도와주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냉정하게 굴어야 하는 거라고요. 한 번 돕기 시작하면 도중에 발을 빼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겁니다. 나도 피해자라고요. 나도 클랜 A 일에 이렇게까지 나서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요."
이익헌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채준형은 이익헌이 과격한 살인을 하고 나왔으면서도 주먹 하나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차크라라는 것, 헌터라는 것은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어딥니까?"
"헌터 협회로 갈 겁니다."
이익헌이 말했다.
"거기에도 죽일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사실대로 말해도 됩니까?"
채준형이 말하자 이익헌이 채준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뇨."
채준형은 고개를 저으면서 꽉 잡기나 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