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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계속 놀아주고 싶지만 말야. 슬슬 질려서.”
그렇게 말하고 이익헌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넷건을 집어들었다. 해리는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한 채 예의 그 고리타분한 공격을 계속할 뿐이었다. 이익헌은 그의 공격을 간단하게 피하면서 해리를 향해 넷건을 발포했다. 해리는 그가 소용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커다란 그물코 사이로 나뭇가지를 뻗어내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해리. 너도 참 운이 없는 녀석이다. 나무 말고 좋은 것도 많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쉽게 타죽지는 않았을 것 아냐?”
넓은 창문을 덮고 있던 커튼이 뜯어졌다. 해리는 불길에 타오르는 커튼이 제 몸을 덮게 될 잠시 후의 장면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때부터 평정심을 잃고 허둥댔다. 그렇게 한다고해서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막지는 못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에 커튼 끝을 집어 넣었다가 빼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간단히 마쳐졌고, 이익헌은 해리를 향해 커튼을 뭉쳐 던졌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는 불길에 타들어가면서도 살아서 움직였다. 그러나 비참한 운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 뿐, 그것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그는 완전한 괴수도 아니었고 강력한 생명력을 조금 맛보도록 허락을 받은 것 뿐이었다. 해리가 불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익헌은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곧 그곳이 완전히 불타오르면 자신이 도모했던 모든 일은 끝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했어.”
이익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리는 마침내 미동조차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러프 스톤은 나오지 않았다. 이익헌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어차피 클랜원들에게 전해줄 방법도 없었을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익헌은 불길이 일렁이며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고 운명에 순응하기로 결심을 했다. 헬기의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익헌은 깜짝 놀라 일어서며 현장을 어떻게 은폐할지 머리를 굴렸다. 이번처럼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다 뒤집어 쓰고 갈 생각이었기에 범행을 은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남고보니 복잡한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게 다 파이널이 불발된 탓이었다. 스위치를 건네줄 때 이미 서규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달아나야 하는 건가?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놈은 뭐야? 아직도 해리와 라미실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었단 말인가? 저 미친 놈들의 실패한 인생을 구경하려고 온 방문객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익헌은 계단을 뛰어갔다. 현관 문이 열렸을 때 그는 간신히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구둣발 소리와 검은 그림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숨긴 채 방문객의 얼굴을 훔쳐보던 이익헌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어어……!”
들어오던 남자도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채준형이었다.
“마스터가…, 여긴 어떻게요?”
이익헌이 물었다. 그러다가, 혹시 이 남자가 해리와 라미실에게 붙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채준형은 이익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가면 바디 펌 부사장이 죽는 걸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와 봤는데 불발이었던가 보죠?”
채준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불이 난 겁니까?"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예. 지하실에서. 뭐좀 태울 게 있어서요."
"그럼 생각한 것보다 일이 간단해질 수도 있겠네요?"
"무슨 일이 말입니까? 아니. 그런데. 어디에서 오는 거예요?”
“한국에서 온 건 아닙니다. 나는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지 순간 이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미국에 계셨습니까?”
“지금 소개팅하러 여기에 온 건 아니거든요? 궁금한 게 많겠지만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서요.”
“네. 그렇겠죠.”
이익헌이 말했다. 얼결에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가 여기에서 해야 한다는 일이 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채준형이 물었다.
“예?”
“지연씨한테서 얘기 들었습니다.”
“마스터를 여기로 보낸 게 강 부장이라고요?”
채준형이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얘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려는 표정이었다.
"아, 예. 그렇죠. 지금부터는 확실히 닥칠게요."
이익헌은 그를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불길은 적당한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더 태울 것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꺼질 수도 있었다. 해리의 나뭇가지를 태운 불은 눈에 보인 것처럼 화력이 좋지 않았고, 불은 그것을 거의 태울 즈음에 스스로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채준형은 눈 앞의 광경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익헌은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채준형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채준형을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채준형에게 무기 마스터라는 칭호는 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에게 적합한 유일한 칭호였을 뿐이었다. 채준형은 사람들의 시신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단지 자기가 들고 왔던 철제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붉은 가루가 담긴 통을 꺼냈을 뿐이었다.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으세요. 내가 이 가루를 뿌리고 나가면 이곳이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지붕까지 들썩거릴 정도가 될 겁니다. 여기에서 챙겨야 할 게 있으면 전부 챙기고 지금 나가서 바로 헬기에 타세요. 다행히 해변에 있는 별장이라 불이 번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여기를 폭파시킬 겁니까?"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겠죠."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요. 어차피 내가 안 가면 헬기는 안 뜰 겁니다."
"예? 직접 몰고 왔어요?"
"그럼 이런 짓을 하러 오는데 누굴 데려오겠습니까?"
오히려 이익헌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채준형이 말했다.
"아. 그렇군요."
채준형이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혹시 방금. 내가 부사장을 구하고 죽으려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정말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을 리는 없지? 라고 물으려는 듯 채준형이 물었다. 이익헌은 누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냐고 말하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절대로 시인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어서 나가요. 내 속도는 가늠할 수 있지만 부사장님 속도는 내가 짐작이 안 되니까."
"아효.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쨌거나. 그럼 먼저 나가겠습니다. 챙길 건 없습니다.”
그리고 헬기를 향해 달려나갔다.
"나가다 죽지나 마세요. 나는 당신을 용서한 게 아닙니다. 당신을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유보한 것 뿐이예요. 언제든지 나는 당신을 심판하겠다고 마음을 정할 수 있으니까 함부로 죽지 말라고요."
그렇게 말을 하고 채준형이 돌아섰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젠장. 오는 내내 생각해둔 말이었는데!"
채준형은 그때부터 신속하게 움직이고 지체없이 별장을 빠져나갔다.
헬기가 떠오르고 별장이 손바닥만하게 보일 때, 채준형이 말했던 것처럼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폭발이 일어났다. 한꺼번에 솟구친 불은 겉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그 열기가 보통의 불과는 다르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었다.
"돌풍이 심해서 많이 덜컹거릴 거니까 아무데나 꽉 잡아요."
채준형이 말했다.
"시체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익헌이 물었다.
"흔적도 남지 않을 겁니다. 사람의 시신을 찾지도 못할 거고 폭발 당시에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도 없을 겁니다. 구조대가 출동한다고 하더라도 사망자 수를 밝혀내지는 못할 거라는 거죠."
"다행인 건지도 모르겠군요. 저렇게 요란하게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될 테니까."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여러 대의 소방차와 구급차가 해리의 해변 별장을 향해 출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로슬라프는 어디로 갔을지, 이익헌은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채준형은 고물 조종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전방을 향해 최고 속력으로 날아갔다.
삶을 향한, 새로운 여정이었다.
***
상황판이 이상했다.
1급 늪, 2급 늪 할 것 없이 갑자기 오픈일이 앞당겨져 있었다. 헌터 협회에서 일한지 십 년이 넘어가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그것을 발견한 직원이 그것을 보고하고, 그 사실은 헌터 협회장에게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헌터 협회장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는 잠시 후에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다.
“브래들리 허버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개의 늪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헌터 협회장의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잠시 말이 없었다.
“제 생각에는 브래들리 허버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클랜 A는 언제든지 돌변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지 않아도 그쪽에서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나라로 원정을 갈 수도 있는 일이고요.”
“그래도 아직 그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쪽에서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를 하려면 막대한 위약금과 손해배상금을 물게 돼 있으니까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게 문제라면 클랜 A를 처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 같습니다. 클랜 A는 미국 정부를 위해서 1급 괴수들과 레이드를 해야 하고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면 우리가 위약금을 물 필요도 없는 거죠.”
“계약 해지가 필요하다고 우리 국민들을 괴수한테 내주자는 말인 건가요?”
“대통령님. 그 자리가 중요한 건, 아무나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없어서인 겁니다. 대통령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브래들리 허버트에게는 제가 연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 우리한테는 A급 헌터가 있지 않습니까.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A급 헌터들 말입니다.”
협회장의 말에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니터에서는 지금도 브래들리 허버트가 보내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괴수의 숙주라는 헌터들이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그들에게서 차크라가 추출되어 해리와 라미실에게 주입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앞으로 미국에게 영원한 평화와 번영을 약속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대통령은 마음을 굳혔다.
“일단은 그 사람들을 내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방안이겠죠.”
“계약을 유지하시겠다고요? 클랜 A를 만나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생각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헌터 협회장은 대통령의 꿍꿍이가 뭔지 알지 못한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괴수의 숙주에게서 차크라를 주입받는 A급 헌터들의 모습은 그의 모니터에서도 재생이 되고 있었다.
클랜 A의 눈치를 보는 일은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속이 다 시원해졌다.
***
야로슬라프와 이익헌이 갑자기 떠나버리고 그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에만 급급했다.
마침내 지우가 서규태에게, 써전님이 알고 있는 걸 제대로 말해 달라고 했을 때 서규태는 난감한 질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