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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라벨이 뜯겨져나간 약병과 주사기가 의자 뒤에 수북했다. 그는 준비해둔 재료로 어떤 요리를 하는 게 좋을지 상상을 시작하는 요리사처럼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해리와 라미실을 바라보았다.
이익헌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믿어버린 해리와 라미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괴수의 차크라로 강하게 해 주겠다는 말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씩 차크라를 공급받으면서 다른 사람은 브래들리 허버트를 감시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해리와 라미실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그들중 누구도 상대방을 위해서 기회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레오니드와 미하일이 가지고 있는 차크라에 대해서 알게 된 순간, 그리고 그 차크라를 뽑아서 자신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일을 미루는 것이 그들에게는 형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의자 위에 편하게 누워 브래들리 허버트가 자신들의 발 아래에 덫을 놓는 것도 모르는 채 편안히 그 시간을 만끽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제는 다른 의문이 생겼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브래들리 허버트였다. 왜 자신의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을 스스로 무력화시킨다는 말인가. 이익헌이 올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해서, 단순히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일어난 일 같지는 않았다. 타이밍의 실수라면 그들을 다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조치라도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브래드리 허버트에게서는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이 놈들을 다루는 건 쉬울 겁니다. 구태여 덫을 놓지 않아도, 한 손만 써서도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이죠. 정말로 단순한 놈들이니까. 가끔 칭찬 한 마디씩만 해 주면 돼요."
이익헌이 말했다.
"나한테 그런 것처럼 말이죠."
브래들리 허버트가 입술을 비틀면서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환상에서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라미실이 한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당신은 참 흥미로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처음에 한 말에 나도 동의합니다. 이 사람들은 형편없는 루저들이죠. 이 사람들 대신에 당신이랑 손을 잡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나같은 사람들은 나보다 열등한 사람들 중에 파트너를 찾으려는 습성이 있죠. 이 사람들은 나한테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탁월한 선택이네요. 저 바보들처럼 당신한테 우월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인간들도 많지 않을 테니까."
이익헌의 말에 브래들리 허버트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딱 저같은 웃음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이익헌은 시간을 기다렸다.
“당신은 나한테 줄 걸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오래 바라볼 필요도 없는 거겠죠?”
브래들리 허버트가 말했다.
"좀 더 창의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이 녀석들과 한 배를 타고 나가기로 결정을 하는 순간 당신은 평생 이류에 머물기로 결정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나한테 대안이 있나요?"
"클랜 A는 어떻습니까?"
이익헌이 말했다. 그러자 브래들리 허버트가 순수해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대안 말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중에. 내일 사라져버릴 클랜은 대안이라고 할 수가 없죠."
브래들리 허버트가 말했다.
"그게 클랜 A의 운명인가보죠?"
"이미. 시작된 일이죠.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이 결정을 내리는 건 이제 시간 문젭니다."
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대통령에게 제안을 했죠. 미국이 더이상 클랜 A에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우리한테는 우리의 A급 헌터들이 있고 그 A급 헌터들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 방법을 내가 갖고 있다고 말해줬죠. 우리한테 괴수의 숙주가 있으면 안 될 것도 없죠. 대통령에게도 혹할 조건이고 말입니다. 대통령은 곧 클랜 A를 버리게 될 겁니다."
브래들리 허버트의 말을 들으면서 이익헌은 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주절주절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익헌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칭찬받고 싶어 죽겠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 죽겠는 것이다. 브래들리 허버트같은 인간들은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관객이 없으면 그 사실을 못 참는다. 이 남자는 혼자서 남몰래 비둘기를 죽이고 비둘기 시체를 자기만 아는 공간에 숨기는 인간들과는 확실히 다른 부류다. 관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이익헌은 그런 사실을 깨닫고 웃었지만 브래들리 허버트는 이익헌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이익헌의 웃음을 보면서 불편해했다. 이해되지 않는 반응은 불편함을 준다. 그리고 때로는 그 불편감이 어떤 고문보다도 더한 스트레스를 준다. 하지만 브래들리 허버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과장되게 자신감을 실어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내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저 두 사람의 차크라를 해리와 라미실에게 주입하는 영상도 보내줬습니다. 나한테 어떤 장면이 필요한지 아는 것처럼 두 사람은 아주 괴로워하면서 차크라를 뺏겼죠. 그걸 봤다면 대통령도 대세가 뭐라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
"대세라. 그렇군요. 라미실이 한 말이 맞는 거군요. 당신이야말로 공을 던지는 사람이군요. 헌터들을 조련하는 건 당신이고. 헌터들이 공만 바라보고 공이 날아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공을 물어 오려고 달려나가는 동안 당신은 세상을 조종하는군요. 멋집니다."
이익헌은 브래들리 허버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그 말이 크게 마음에 들어서 웃고 싶었지만, 아직은 웃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웃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말이 만족스러운가 보지?'
이익헌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주기로 하고 당신은 뭘 요구했죠?"
"글쎄요. 나는 내가 뭘 받을 수 있을지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것 같아서 그쪽으로 공을 넘긴 상탭니다. 줄 수 있는 걸 주겠죠."
"그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협상은 결렬되는 겁니까?"
"그쪽에서 제안한 걸 보고 수량이나 직위를 높여서 요구하면 되겠죠."
"잘 생각했네요. 꽤 잘 짜여진 각본 같군요. 사람들이 오랫동안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될 테고 당신은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고 노벨상 같은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국제기구에서 연설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거고 나라들의 분쟁에 당신이 나서서 중재를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여러 나라의 정책이 당신의 한 마디에 의해서 바뀌는 건 말할 것도 없을 거고요. 당신한테 주어질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닐 겁니다."
이익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브래들리 허버트에게 이미 실현이 된 것처럼, 브래들리 허버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 아이들은 허버트라는 성을 물려받게 될 거고 파티나 중요한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말할 때마다, '혹시 그 허버트냐'라는 말을 듣게 되겠죠. 그러면 그 아이들은, '네, 내 아버지가 브래들리 허버틉니다.'라고 말할 거고. 괜찮네요. 남자로서. 꿈꿔볼만한 인생인 것 같아요. 그 정도는 돼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브라보. 굉장한데요?"
이익헌의 말에 브래들리 허버트는 날아오르려는 마음을 붙잡고 긴장을 유지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당신같은 사람요. 해리와 라미실보다는 훨씬 낫죠. 좋아요. 받아들일만 하군요.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이익헌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그게 악당에게 어울리는 대사가 아니라고 뒤늦게 생각했지만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고통 없이 끝내주겠습니다."
그것이 브래들리 허버트가 이익헌을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어준 배려였다. 이익헌이 그곳에서 도망치기로 달아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이익헌의 몸에 슬슬 코모도 괴수의 독침으로 만든 마취제가 퍼지고 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이익헌은 지금이라도 브래들리 허버트의 돼지같은 몸뚱이를 갈갈이 찢어내고 그곳에서 헌터들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정해놓은 결말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널브러져 있는 해리와 라미실을 이대로 놔두고 갔다가는 그들이 다시 또 클랜 A와 시현의 발목을 붙잡게 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미 미국 정부와 그 정도로 논의가 되었다면 아마 미국 정부가 해리와 라미실에게 협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의 일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치달을 수도 있었다.
'이 녀석들은 내가 끝내는 게 맞아.'
이익헌은 생각을 정리했다. 해리와 라미실을 죽이고, 그리고 자신의 복잡했던 인생도 여기에서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책임을 져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자기가 모든 일의 책임을 지고 죽는다면, 클랜 A에게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채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이 이익헌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아무리 미국 정부라고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A급 헌터 둘이 동시에 날아가버린 걸 알게 된다면 클랜 A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고 클랜 A는, 그리고 익스트림 헌터는...
그들의 미래에 함께 있고 싶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가슴 아래에서 밀고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순간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머저리들. 조금은 배웠으려나? 아직도 못 깨달았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뭐.'
이익헌은 태인과 강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선아영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그 녀석들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브래들리 허버트가 옆에 있던 넷건을 들어 발포했다. 그의 비대한 몸집을 보면서 상상할 수 없었던 대단한 속도였고 대단한 추진력이었다. 주저함이라고는 없었다. 손에 든 것이 넷건이 아니라 살상무기라고 했더라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고 이익헌은 생각했다.
이익헌은 그물에 걸려 발버둥을 쳤다. 그 넷건은 크리미널 헌터를 체포하기 위해서 익스트림 헌터에서 야심차게 만들어낸 제품이었다. 일단 그 그물에 걸리고 나면 아무리 헌터라고 하더라도 빠져나올 수도 없고 줄을 끊을 수도 없었다. 지금 이익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그 그물이 바로 선아영의 익스트림 헌터 제품이라는 생각에 이익헌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브래들리 허버트의 얼굴에 승리를 예견하는 웃음이 지어졌다.
이익헌이 몸부림을 칠수록 그물은 더욱더 촘촘하게 조여졌다. 그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브래들리 허버트는 계속 소리를 내어 웃어댔다. 그것이 이익헌이 노리던 바라는 것을 브래들리 허버트가 알 리가 없었다.
"즐거운가?"
이익헌의 낮은 목소리가 기이하게 울려퍼졌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이익헌이 저를 보고 웃는 것을 보았다. 섬뜩한 웃음이었다.
"즐겁냐고 물었다. 이 아르마니 돼지껍데기 새끼야."
이익헌이 말했다.
"너한테 당하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건 아니거든."
이익헌은 여전히 그물을 뒤집어쓴 채였지만 자기가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무언가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뭘 보려고? 이거?”
야로슬라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로슬라프의 두 손은 브래들리 허버트의 귀를 억세게 누르고 있었다. 그런 채로 목을 비틀어버리는 바람에 브래들리 허버트의 목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의 관절이 버텨낼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