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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이마를 얼마나 깊이 찔렸는지, 흥건한 핏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빨리 이 미친 놈을 괴수의 숙주들한테 데려다주고 라미실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해리는 온통 하얗게 장식된 응접실을 지나 계속해서 걸었다. 그는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빼서 주먹을 쥐었다가 또 다시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이익헌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철컥, 철컥, 철컥.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낯선 소리에 그는 차크라를 끌어모아 자신을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막 이익헌이 밟았던 바닥이 이익헌의 몸을 지탱해주지 않았고 그는 어두운 지하로 떨어졌다. 벽에서 무기가 날아올 것만 신경쓰고 있다가 바닥을 놓쳤다.
"이런!"
이익헌은 제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충격은 없었다. 온몸에 두른 차크라가 충격을 모두 흡수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쓸데없이 과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상태를 오해한다면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떨어진 높이는 상당했지만 오히려 그렇게 해서 거기까지 내려오는 시간을 절약한 것 같기도 했다. 그곳은 레오니드와 미하일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야로슬라프도 그곳에 같이 있었다. 그의 눈에 레오니드와 미하일이 보였다. 영상에서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함부로 구겨진 채, 꼼짝도 할 수 없게 결박되어 있었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채로 사물처럼 기대어 있었다. 야로슬라프의 몰골은 훨씬 더 처참했다. 아직 차크라를 추출당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항을 하다가 맞았는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저보다 몇 백 배나 큰 괴수를 상대할 때도 몸에 상처를 입는 일이 거의 없던 야로슬라프였지만 아마도 코모도 괴수의 독침을 피하지 못한 듯했다.
온몸이 마비된 헌터는 몸에 차크라를 돌릴 수도 없고, 가벼운 공격에도 제대로 방어를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손과 발을 꽁꽁 묶였으니 모든 저항이 허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 야로슬라프를 보면서 이익헌은, 그 독침의 성분이 통증을 느끼는 신경까지 잠재워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은 어느새 야로슬라프가 느낄 통증을 걱정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라미실의 모습이 보였다. 해리는 계단을 통해서 우아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한 건방진 얼굴이었다.
라미실과 브래들리 허버트가 나란히 선 채로 이익헌을 내려다보았다.
‘브래들리 허버트라.’
이익헌은 생각을 하면서 온몸에 차크라를 돌렸다. 이익헌은 브래들리 허버트를 바라보았다. 찾아올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혼자서만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비대한 몸에 값비싼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있어서 그 모습이 꼭 아르마니로 감싼 돼지 같았다.
“당신이군.”
이익헌이 말했다. 브래들리 허버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갔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보다. 뭘 알아낸 거지? 아니. 사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당신같은 사람이 왜 하필 해리와 라미실 같은 최고의 루저 커플한테 들러붙었냐 하는 거야.”
이익헌이 말하자 브래들리 허버트가 비죽 웃었다. 악담이 저를 피해가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브래들리 허버트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 했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지, 당신? 거기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당신 얘기를 하는 걸 자주 들었지. 내가 누군지는 알테고. 나는 바디 펌의 부사장이지. 아마 나를 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신이 바빠서 항상 어긋나곤 했지.”
브래들리 허버트의 얼굴이 조금씩 묘하게 바뀌어갔다. 그냥 조그만 학교에서 한 자리를 얻어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던 것 뿐이었는데 이 남자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 남자는 단순히 오해를 한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확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 위에 있는 놈을 한 놈만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꼴찌에게, '네가 바로 그 전교 1등이지!'라고 말을 해 놓고 입술을 달싹도 못해버리게 만들어 놓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정작 자기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이익헌은 몇 사람의 이름을 들먹였다. 브래들리 허버트도 들어본 적이 있는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들이었다. 이익헌은 그 사람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바디 펌에서 그들의 연구를 후원했다는 얘기도 했다. 구체적인 수치와 연도가 나오자 브래들리 허버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믿게 되었다.
어느순간부터 브래들리 허버트를 향한 이익헌의 말투도 공손해져 있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곤 했었는데. 당신이 기회를 잡지 못했고 당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이예요.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돼지들이 자리를 비키고 물러나 줘야 되는 거였는데. 몇몇 사람이 당신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 했었죠. 바디 펌에서 당신에게 후원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물었었고. 우리는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합의를 봤었어요. 당신이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법을 우리끼리 알아봤고 상당부분 진척도 봤는데.”
이익헌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중얼거렸다. 이것저것 말을 하면서 상대방의 반응을 집중해서 관찰하면 그가 어떤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지, 어떤 얘기를 꺼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아르마니 돼지껍데기는 이익헌에게 익숙한 부류였다. 자기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천잰데 세상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주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몰랐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훨씬 더 높게 자신을 평가했고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모두 주위의 환경과 다른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했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이익헌의 올무에 점점 걸려들었다. 졸지에 프린스턴 대학 교수가 되어 있었고, 어느새 이익헌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짜맞추려고 하고 있었다.
해리와 라미실은 이익헌이 브래들리 허버트에게 능숙하게 거미줄을 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보는 눈 앞에서 뚱뚱한 돼지 한 마리가 네 다리를 팔랑거리면서 거미줄에 제 몸을 날리려 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원래 저런 식으로 남들을 이용해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면서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거죠.”
라미실이 브래들리 허버트에게 경고했다. 브래들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브래들리가 물었다. 하지만 라미실은 대답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익헌의 말이 바로 이어져나온 탓이었다.
“라미실. 내가 혹시 실수라도 했나?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브래들리 허버트 교수를 제법 잘 알아.”
이익헌은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자기가 지연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이용해서 적당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은 진실을 적당히 가미한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담도 없고, 사소한 부분에서 정보가 어긋나도 기억의 왜곡을 탓하며 간단히 넘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익헌이 늘어놓는 복잡한 거짓말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 중 누구도 야로슬라프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익헌이 해독제가 들어있는 특수총을 야로슬라프에게 쐈을 때 브래들리 허버트와 라미실은 서로 맹렬히 노려보느라고 이익헌이 무슨 짓을 하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프린스턴 대학교 좋아하고 있네. 저 놈이 항상 쓰는 수법이라고! 당신 열등감을 자극하는 거야!”
라미실이 브래들리 허버트에게 소리를 지르자 브래들리 허버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라미실을 노려보았다.
"왜? 내 말이 틀렸나? 저 놈은 당신 약점을 알아. 당신의 열등감을 알고 그걸 이용하려는 거라고. 저 놈이 정말로 모를 것 같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프린스턴? 웃기시네. 정신차려. 브래들리 허버트. 저 놈의 뻔한 수법에 당하지 말라고!"
라미실은 브래들리 허버트에게 충고를 했지만 브래들리 허버트는 라미실 따위에게 충고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봤자 돈이나 바라는 탐욕스러운 일반인일 뿐, 브래들리 허버트가 A급 헌터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하던 라미실은 브래들리 허버트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브래들리. 나는 당신을 존중해. 당신은 다른 어떤 프린스턴 대학 교수보다도 더 뛰어나고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 자리를 당신한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프린스턴 대학만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학이라면 어디든지 모두. 그러니까 괜히 이러지 말자고. 지금은 우리가 협력할 때야.”
라미실이 그를 달래려고 애쓰며 말했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했다.
“괴수 숙주들한테서 차크라를 뽑아서 당신들한테 주입했을 때, 순수하게 차크라만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브래들리 허버트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라미실이 해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해리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너무 화낼 건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서로 믿을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몇 분 후면 두 사람이 의식을 잃고 세 시간 정도 깊은 잠에 빠져들 거고, 그 사이에 당신들한테, 당신들이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겁니다. 당신들은 헌터고 나는 무능력한 일반인이잖아요. 당신들이 나를 없애고 내 지분을 다시 뺏어가려고 할 때를 대비하려는 거예요.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익헌은 브래들리 허버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어떤 일들을 계획했을지 상상했다. 지연에게서 그가 저질렀던 온갖 멍청한 일들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기에 그 일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자기가 원한 자리를 얻으려고 다른 교수의 컴퓨터에 미성년자를 강간하는 스너프 필름을 심으려고 하다가 걸린 위인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손쉬운 방법으로 성실한 경쟁자들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상대가 성실한 경쟁자도 아니지만.
약에 취해있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은 채 그런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익헌에게는 좋은 조짐이었다.
라미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브래들리 허버트를 노려보았지만 브래들리 허버트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약효가 나타나는 게 보인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차려. 이 멍청한 자식아!"
라미실이 소리를 지르며 브래들리 허버트를 향해 벌떡 일어섰을 때 라미실은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비틀거렸다. 대단한 타이밍이었다. 브래들리 허버트가 그때를 기다렸다가 말을 한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미실은 자신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는데도 손조차 뻗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가 먼저 바닥으로 쿵, 떨어지면서 처박혔다. 차크라를 두르지도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얼굴은 표피가 벗겨진 채 바닥에 피를 흘려냈다. 라미실에게 증상이 먼저 나타나기는 했지만 해리도 거기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라미실처럼 극적으로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무척추 동물이 된 것처럼 흐느적거리다가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브래들리 허버트는 두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