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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177화 (17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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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그렇다고 우리가 손을 놓으면."

"그러면 뭐요? 아직도 멍청한 소리만 하고 있을 겁니까?"

이익헌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규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놈들은 이런 걸 예상하는 거예요. 지들이 캐츠 아이 스톤을 주지 않아도 우리가 레이드를 그만두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고요. 그 놈들은 지들 국민인데도 이 사람들 목숨을 담보로 베팅을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그놈들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한다는 겁니까? 그러다가는 당신들은 당신들 몸이 다 달궈지고 타버려도 그 판에서 내려오지 못해요!"

서규태는 멍하니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그가 '당신들'이라고 말하는 순간, 서규태는 깨달았다. 이익헌이 '우리'라고 하는 대신 '당신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서규태는 어째야 할지 혼란을 느꼈다. 이익헌은 자기가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익헌은 그런 서규태를 두고 그의 곁을 성큼성큼 지나가버렸다. 서규태는 이익헌이 혼자 블랙 호크 트리플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블랙 호크 트리플이 곧 날아올랐다.

클랜원들이 서규태에게 다가왔다. 이익헌의 대단한 기세에 눌려서 그 전에는 다가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에 가는 거예요? 왜 혼자 떠나는 거예요? 혹시 야로슬라프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래요?”

태인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저 사람들로는 무리예요. 이대로 놔두면 저 사람들도 죽을 거예요.”

강현이 말했다.

“아뇨.”

서규태가 말했다.

“예?”

태인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레이드를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돌아갈 거예요. 트레일러로. 그리고 한국으로.”

서규태의 말에 모두가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받을 캐츠 아이 스톤만 받고 여길 떠나죠.”

서규태가 지우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써전님?”

지우가 서규태를 보며 물었다.

“많은 것들이 변할 겁니다.”

우리는 그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직 그 말은 입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그거야말로 이익헌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

선아영은 전화 벨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가 전화를 건 사람이 이익헌임을 알고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지연이 그런 선아영을 보고 있었다. 선아영이 지연을 바라보았다.

“괜히 염장지르고 싶지 않은데 남은 얘기는 좀 쉬었다 할까요?”

선아영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선아영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밥은 먹었어?”

“네.”

“생각해보니까.”

“네?”

“다 네 잘못이더라.”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선아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게요?”

“전부 다.”

“그럼 나한테 화났겠네요?”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래요? 근데 이게 무슨 소리예요? 어디에 있어요? 시끄러워서 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블랙 호크 트리플.”

“아. 이동중이예요?”

“응.”

"거기에 타고 있는 거라면 이 정도로 들리는 것도 감지덕지인 거네요."

"그런 거지."

“근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선아영.”

“네?”

“사랑했다는 말은 안 하려고.”

“네?”

“그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무슨……. 왜 그래요, 정말 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레이드 하러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안 가면 되잖아요. 겁 나서 그러는 거면. 가지 마요. 왜 당신이 그걸 해야 되는 건데!”

“채준형은 좋은 남자같더라.”

"뭐라고요?"

"내가 이런 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너한테는 해야 할 것 같아. 좋은 사람 만나, 아영아."

"그만해요."

"선아영. 너는 좋은 사람이고. 행복해져야 돼. 나를 위해서라도 그래줘. 네가 행복해지고, 네가 웃는다면. 좋을 것 같아."

“닥치라고, 개새끼야. 이익헌! 너 뭐야. 너 뭔데 이래.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당신 뭐야. 당신 지금 왜 그러는 건데! 어?!!”

“행복하게 살아. 당신은 내가 배우지 못했던 세상을 가르쳐줬어. 내가 배우지 못했던 감정, 내가 배우지 못했던……. 네가 아니었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세상들. 그걸 네가 만들어준 거야. 이게 세상이라고. 네가 가르쳐준 거야.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세상은 그냥 나한테 바람 같았을 거야. 나는 세상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을 거야.”

“그러지 마요. 무서워요. 왜 이래요. 겁나게.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소리도 안 지를 테니까 이러지 마요. 제발요. 익헌씨. 내가 그리로 갈게요.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요. 그대로 있어요. 아무데도 가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익헌씨! 지금 어디예요. 어디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요? 그런 거죠?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죠? 제발 누구라도 바꿔줘봐요. 당신 진짜 왜 이래! 왜 이러냐고!!”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밀려 벽에 부딪쳤다.

“사실 우리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았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선아영이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아영의 비명 소리에, 문밖에 서 있던 지연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발 살아서 돌아와요. 내 환우가 고작 그런 걸로 죽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지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

파도 소리가 거셌던 해변에 블랙 호크 트리플의 굉음이 뒤덮였다. 블랙 호크 트리플이 다시 날아오르자 이번에는 울음 소리같은 바람소리가 공간을 대신 채웠다.

해변에 혼자 서 있는 이익헌의 모습은 낯설어보였다. 지난 밤에 함께 모여서 그와 얘기를 나눴던 클랜원들이 지금의 모습을 봤다면 그들도 움찔할 정도로 생경했다.

론 디어와 파이널의 스위치.

이익헌은 주머니를 더듬어 그것들을 확인했다.

바람이 시원했다. 그는 모래 언덕을 밟고 별장을 향해 걸었다. 블랙 호크 트리플로 그렇게 요란하게 행차를 했는데 이익헌이 온 것을 안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부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야로슬라프가 모두를 해치우고 레오니드와 미하일을 구해서 도망쳤을 거라는 상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익헌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하지만 잠겨진 문은 이익헌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의 발길질에 문이 뜯겨나갔다. 론 디어는 이익헌의 차크라를 머금기 시작했다.

“아마 마지막일 거다. 실컷 먹어둬. 사양하지 말고.”

론 디어를 쓰다듬으며 말을 하고 이익헌은 야로슬라프를 찾아 들어갔다.

안은 적막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짙은 고요함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이익헌의 귀는 작은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벽난로 쪽에서 소리가 났다.

“……!”

해리였다.

해리가 일어서며 얼굴을 보였다. 이익헌을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피차 싫어하는 거라서 미안한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이익헌은 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이익헌은 알아차렸다.

이익헌이 누군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해리는 이익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론 디어를 들고 사냥에 나선 이익헌에게 망설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해리가 말했다.

“관심 없어.”

“관심 있을 텐데?”

“아니. 관심없어.”

“그러면. 여기까지는 왜 온 건데?”

“나는 너한테 관심이 있거든.”

이익헌은 해리를 향해 걸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해리와 라미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다.

해리와 라미실 중에 해리가 여기에 나와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그림이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어색한 냄새가 났다. 이익헌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서 비릿한 웃음이 흘렀다.

“개새끼들. 손님을 초대했으면 제대로 대접하란 말이다.”

이익헌은 차크라를 실어 해리를 향해 몸을 띄워 날아갔다. 이익헌의 발이 커다란 TV앞을 지나칠 때 벽면에서 가스가 분출되었다. 그게 코모도 괴수의 독침으로 만들어진 마취가스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채준형이 마련해준 해독약을 배가 부를 정도로 미리 먹고 왔기에 거기에 당할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화들짝 놀라는 표정은 해 주었다. 해리는 바짝 다가온 이익헌을 보며 뒤로 움찔거리면서 도망쳤다.

“남의 차크라로 몸을 데웠나? 그러면 조금은 쓸모있어졌으려나?"

이익헌이 말했다. 해리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어때, 기분은? 너는 론 디어에 찔리는 사람들을 구경만 했지, 해리. 그걸로는 늘 부족하지 않았어? 이제 직접 느껴봐. 론 디어가 네 창자를 가르는 느낌이 어떨지. 너는 나한테 절대로 저항하지 못할 걸?”

해리는 A급 헌터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체득된 경험은 괴수를 상대로 한 사냥의 경험뿐이었다. 사람을 살해한다는 터부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보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경계에서 그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익헌의 눈빛이 해리의 얼굴 위를 훑었다. 그저 시선이 지나가는 것 뿐인데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칼로 가르고 지나가는 것처럼 해리는 초조함과 긴장감과 생생한 통증을 느꼈다.

"해리. 나를 처음 본 순간 우리가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거라고 느끼지 않았나?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이렇게 되기로 정해져 있었어. 네가 왜 내가 일으킨 사건에 열광한 건 줄 알아? 네가 희생당하는 걸 피했기 때문이었던 거야. 너는 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네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놈이었지. 그래. 너나 나나 전부 쓰레긴데 너를 비난해서 뭘 하겠어. 맞아. 내 잘못이 더 크겠지.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버린 거고. 후회하지만. 어쩌겠어."

한 순간 오고 간 눈빛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해졌다. 이익헌의 팔이 기척도 없이 움직였다. 해리는 론 디어가 제 이마를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스치듯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상처의 깊이는 만만치 않았다. 론 디어가 이마를 파고 들어 해골을 그으면서 한 바퀴를 둘렀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타는 듯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입술이 열어지지 않았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해리의 눈 앞에 서 있는 이익헌이라는 공포의 실체가 너무 거대해서 그는 신음소리조차 참을 수밖에 없었다.

면류관을 쓴 것처럼 이마에서부터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해리의 얼굴이 빨간 페인트 통을 뒤집어 쓴 것처럼 온통 끈적한 붉은 피로 물들었다.

"뭐야. 대단한 차크라를 주입했다면서. 뭐가 달라졌다는 거지? 뭘 한 거야, 해리. 응? 조금은 나아졌을 줄 알았는데."

이익헌은 변한 곳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자.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 너도 나하고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하고 싫잖아. 어디에 있는지 안내해. 그 사람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머리 가죽을 벗기고 그 다음에는 바로 네 뇌에 론 디어를 꽂아준다.”

해리는 이익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론 디어가 어디로 들어가게 될 건지 알려줄까? 네 목이야. 이걸로 네 목을 가를 거야.”

이익헌이 하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해리였다. 그는 서둘렀다. 눈을 뜨는 것도 힘이 들었다. 눈으로 자꾸만 피가 들어오는데, 피를 닦아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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