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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175화 (17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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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괴수들이 어떤 이유인가로 급격히 강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블랙 호크 트리플이 착륙했을 때, 클랜 A가 도착한 곳에는 이미 다른 헌터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공격대를 꾸려서 괴수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1급 괴수였지만 최근에 출몰하던 것들에 비해서는 공략이 간단해 보였다. 그들이라고 해서 공략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어보였다. 꼭 오지 않아도 될 곳에 불려와서 자리도 못 찾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꼴이 되어 기분이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미국 정부와 헌터 협회가 사태 해결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보험용으로 클랜 A를 불러 놓았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규태와 지우는 우선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이 공략을 하지 못하면 지원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익헌의 머리는 다르게 돌아갔다. 그곳에서 괴수가 출몰하지 않았다면 클랜 A가 하고 있었을 일이 뭐였을지 거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괴수는 그냥 출몰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튀어나오고 있는 거였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고 한 번 떠오른 그 생각을 도중에 멈출 수가 없었다.

이익헌은 그럴 때 누구를 찾아야 할지 알고 있었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이. 환우.”

“부사장님.”

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익헌은 지연의 목소리를 분석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무심하게 전화를 받았을 때 나올 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익헌이 다짜고짜 물었다. 지연은 잠시 주저하다가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을 말했다.

브래들리 허버트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던 사실들과, 브래들리 허버트가 최근에 A급 헌터들과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다는 이야기, 그가 레오니드를 방문한 이야기와 레오니드가 그 일로 야로슬라프에게 연락을 한 일, 그리고 레오니드와 미하일에게 부착한 위치 추적기가 브래들리 허버트가 증여받은 해변의 별장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야로슬라프가 그리로 떠났다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털어놓았다.

“그런데 왜 그 얘기를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거지?”

“저는……. 야로슬라프가 해결하기를 바랐어요. 브래들리 허버트는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고,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브래들리 허버트의 타겟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시현이랑 안지우씨가 타겟이 되고 하고 싶지도 않고요.”

이익헌은 한숨을 쉬었다. 야로슬라프가 자살 폭탄을 두르고 적진으로 달려갔다는 사실과, 지연이 그를 이용해서 지우와 시현을 브래들리 허버트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잘못한 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저한테는 레오니드나 미하일보다는 시현이가 더 중요해요. 시현이랑 안지우씨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요.”

지연이 말했다. 자신의 결정에 후회가 없다는 태도였지만 지연이 편한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은 이익헌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지연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지연은 브래들리 허버트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독종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런 놈에게서 빠져나오려면 미끼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뿐이다.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잘했다고 해 주고 싶었다.

“잘못한 거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어. 나한테 그 놈들. 아니다. 해리 그 놈 해변 별장이라고 했지? 어딘지 알 것 같아.”

“가시…려고요?”

“그냥. 확인하는 거야.”

“…….”

“잘했어. 환우. 나는 환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계속 그렇게 그 사람들 지켜줘. 클랜 A를.”

“부사장님. 뭘 하시려는 생각인 거예요?”

지연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통화하는 내내 감정을 절제하더니 마지막 순간에 감정이 폭발한 듯했다.

"이봐. 그럴 것 없어. 잘한 결정이야. 원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그렇게 늘 괴롭고 힘든 거야. 강 부장이 야로슬라프를 아낀 거 알아. 레오니드랑 미하일도 마찬가지고. 강 부장이 그 녀석들 차크라를 숨겨주려고 옷을 만들어준 것도 알고 옷을 조금이라도 더 가볍고 편하게 해 주려고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보낸 것도 알아. 그런 사람들을 포기해야 하는 게 어떤 심정인지도 알고 슬프지 않은 척 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아니다. 그건 모르겠다."

이익헌의 말에 지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소리는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어쩌실 생각이세요?"

“아무 것도 안 해. 그냥 계속 그렇게 잘 해 달라고 말하는 것 뿐이야.”

"부사장님!"

"끊을 테니까 천 전무도 앞으로 잘 보살펴줘."

전화를 끊고 이익헌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쥐뿔도 모르는 헌터 나부랭이들은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서규태와 지우는 만의 하나,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해서 레이드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공격대 놈들은 뻐기고 으스대기에 바빴다.

브래들리 허버트. 해리. 라미실.

이익헌의 머릿속에는 그 세 이름이 조합되어 만들어질 폭발력이 계산되었다.

'야로슬라프. 멍청한 자식!'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에게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준 녀석이었다. 이익헌도 그 순간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녀석이 있어서 쉴 수도 있었고 웃을 수도 있었다.

강현이나 태인은 서규태와 지우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극한의 유대감을 보였다. 사체 운반 헌터때부터 써전과 운반팀으로 만들어져 이어온 팀이라 감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임정도 마찬가지였다. 지우와 같이 시현이를 만든 사람인데 말을 해서 뭘 하겠는가.

애초에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서 결속력을 느끼고 싶은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만 혼자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과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뒤늦게 합류한 야로슬라프는 자연히 익헌과 어울렸다. 태연에게 속아서 이익헌을 아짐이라고 불러대면서. 나중에는 아짐이 아주머니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 후에도 이익헌을 아짐이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항상 고개를 돌려보면 야로슬라프가 있었다. 충직한 개처럼 늘 같은 자리를 지켰다. 야로슬라프는 클랜원들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신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이 없도록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 저를 바라봐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야로슬라프는 그들이 야로슬라프에게 원하는 것을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주었었다.

클랜 A의 두 아웃사이더로서. 이익헌은 클랜 A의 다른 누구보다 야로슬라프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는 야로슬라프의 결정을 책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어리석고 가벼운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꼬리 자르기나 마찬가지다. 두고 가야하는 꼬리가 너무 아까웠지만 지우와 시현의 안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야로. 너를 지킬 수 없겠어.’

이익헌은 혼자서 그렇게 생각했다.

라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영상에 라미실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야.”

이익헌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라미실의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걸음을 뒤로 했다.

“왜 그래? 기분이 별론가?”

라미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데?”

“그러지말고. 이큰. 너한테 기회를 주려고 이러는 거야. 우리는 남다른 우정을 쌓아왔잖아.”

“그래? 우리가? 그 '우리'가 너하고 나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면 착각이 심한데?”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해리는 너한테 화가 단단히 나 있지만 내가 설득했어. 이제 클랜 A에서 내려오라고. 그 배는 곧 침몰할 거야. 우리한테는 아직 네가 필요해.”

“나는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너희들을 위해서도, 너희들하고 같이도.”

“그러지말라고. 이큰. 아직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는 모양인데. 우리는 이제 달라. 전이랑은 다르다고.”

라미실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라미실에게는 이익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이큰. 지금부터 내가 재미있는 걸 얘기해주지. 아마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야로슬라프 코마로프. 그래. 그 대단한 클랜 A의 클랜원이었으니까. 그 녀석은 괴수의 숙주였어. 믿을 수 있겠어? 괴수의 숙주였다고!  아마 너도 몰랐겠지. 그런데 그 야로슬라프 코마로프의 친구들을 우리가 붙잡았어. 그 녀석의 친구들이라고. 이 녀석들도 괴수의 숙주지."

라미실이 웃으며 떠들어댔다.

"브래들리는 정말 대단해. 이큰. 네가 여기에 오면 그 사람을 너한테 소개해 줄 수 있어. 브래들리는 대단하다고. 우리는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공만 보고 뛰어가던 개하고 다를 게 없는 인간들이지. 하지만 브래들리는 아니야. 브래들리는 직접 그 공을 쥐고 흔들고 던지지. 그러면 너희 클랜 A가 그 공을 보고 뛰어가는 거고. 왈왈왈. 키키킥, 그래. 그렇게 왈왈 거리면서."

라미실은 쉬지 않고 지껄였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약 먹을 시간을 놓친 조증 환자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헛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익헌이 말했다. 라미실에게서 중요한 말이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이 멍청이가 도중에 자기가 하려던 말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왜 우리가 개라는 거지?"

익헌이 다시 물었다.

"그 녀석이 어떻게 공을 흔든다는 거냐고!"

익헌이 흥분했다고 생각했는지 라미실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브래들리는 늪을 여는 남자지. 괴수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말이야."

"뭐라고?"

이익헌은 라미실한테 기대를 한 자기가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새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일관적일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발전의 기미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익헌은 침을 뱉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왜 쿠퍼티노에 나타났는지 알아? 그 녀석은 늪 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아직 그 녀석의 늪이 열릴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갑자기 급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지. 늪으로 어떤 녀석들이 떨어져 들어왔어. 저를 사냥하러 온 레이더들인줄 알았지만 땡! 그게 아니었어. 그 녀석들은 움직이지도 못했거든. 하늘에서 그냥 고깃덩어리가 떨어진 거야."

라미실은 정신없이 웃어대면서 말했다. 거슬리는 웃음 소리를 참으면서 이익헌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쿠퍼티노에 나타난 미노타우로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괴수였다. 그런데 라미실이 바로 그 미노타우로스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이익헌은 이 바보가 중간에 다른 데로 새지 않고 이야기를 끝마쳐주기만을 바랐다.

"이큰. 너희들이 감을 잡지 못하고 너무 고생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한 가지만 알려주려고 해. 너도 이 얘기를 들으면 결정을 내리기가 쉬워질 거야. 누가 주인인지 알게 되겠지. 누가 떠오르는 태양이고 누가 지는 달인지. 헌터가 죽으면 그 늪은 더 빨리 열리지. 브래들리 허버트가 쿠퍼티노의 늪을 열고 미노타우로스를 꺼낸 거라고. 미노타우로스에게 헌터들을 던져주고 그 미끼로 그 녀석을 끌어낸 거야."

“……!”

적막에도 소리가 있다. 이익헌은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적막의 소리는 심장의 흐느낌이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 순간에는 라미실조차 지껄이는 것을 멈췄다.

"충격이 너무 큰가?"

라미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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