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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컨트롤러
“레오니드 소로킨은 러시아에 남아있는 내 동료예요. 그 녀석이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건 E급으로 올라가지 않아서였죠. 그런데 최근에 그 녀석이. 레이드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그 말은 클랜 A의 다른 클랜원들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일단 그렇게 되면 캐츠 아이 스톤을 구하지 못하는 이상 몇 년 안에 죽게 된다는 걸 알잖아. 알면서도 레이드를 시작했다고?"
지우가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드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레이드를 하지 않는 걸 가족들이 이해해주지 않았대요. 가족들을 부양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자기도 더 이상 어린 애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괴수차크라에 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거긴 자기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혐오범죄가 심한 곳이예요. 소수자들을 고문하고 죽이면서 그걸 인터넷에 올려도 처벌받지 않고 은근히 장려되는 곳이기도 하고요. 레오니드는 그걸 무서워하고 있어요. 레오니드도 자기 차크라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B급까지 올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그때까지 열심히 레이드를 하다보면 캐츠 아이 스톤을 하나 정도는 발견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헌터는 E급이 되는 순간부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레오니드 소로킨의 시간도 이제 폭주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그 얘기를 하는 이유는요?”
서규태가 물었다.
“레오니드와 나는 동류예요. 우리는 폭탄이 터지기 전에 등급을 올려야 하죠. 그러지 못하면 폭주할 거예요.”
“내가 그 폭주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용하가 물었다.
“시험을 해 볼 수는 있겠죠."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는 건가요?"
야로슬라프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생각에는. 지우 형이 말하는 그런 원리로 용하 형이 괴수의 차크라를 통제하는 거라면 용하 형이 가진 능력은 레오니드한테 통하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용하 형이 가진 능력'이라는 말에 용하는 얼떨떨해졌다. 자기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야로슬라프가 단단히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런 것과 동떨어진 것 같아서 갈수록 부담감이 커지고 있었다.
"저만 해도 어떨지 모르겠어요. 용하 형을 알기는 하지만 용하 형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같은 건 솔직히 안 들거든요.”
야로슬라프의 말에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용하를 바라보았다.
“용하 네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나랑 시현이뿐인 걸까?”
“나는 아직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용하가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겠죠. 나도 용하 형이랑 관계가 좋아지면 언젠가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다른 클랜원들이랑도 이 정도의 믿음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달라졌잖아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괜히 긴장되고 부담스럽네요. 하기 싫다는 건 절대로 아니예요. 정말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어요.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좋죠. 특히 우리 시현이한테 내가 도움이 돼 왔던 거라면 정말 좋죠.”
용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시현이도 용하를 따라서 머리를 긁적였다. 도토리 뚜껑같은 머리가 들썩거렸다.
"용하가 차크라를 어느 정도로 통제할 수 있는 건지 모르지만 만약에 그게 잘 된다면. 우리가 캐츠 아이 스톤을 구하지 못하고 레벨 업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차크라가 폭주하는 일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지우가 말했다. 용하는 지우와 야로슬라프가 그때까지 했던 말이 무슨 뜻이라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달았다.
"무, 무슨. 그런. 정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야 진짜 좋겠지만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용하가 되물었다.
"나도 확신하는 건 아니야. 용하 네가 그 정도 수준까지 이를 수 있다면 적어도 시현이만큼은 용하 네가 지켜줄 수도 있지 않을지. 그 생각을 해 본 거야."
지우도 용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꾸만 기대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해야 되는 거야? 컨트롤러라고? 나같은 사람이 또 있었어?"
용하가 지우에게 물었다가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뭘 해서라도 내가 가졌다는 능력의 수준을 올리고 싶어. 시현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용하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거라는 거 알았어. 고마워, 용하야. 고마워."
지우가 말하자 시현이도 옆에서 같이 중얼거렸다.
“워어, 안똔.”
시현이가 손가락으로 용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용하 삼촌이지?”
지우가 말하자 시현이가 요아안똔, 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헌터들은 줄을 서서 자기들 이름을 시현이의 작은 머리에 각인을 시키려고 서로들 이름을 불러주었고 시현이는 금방 딴청을 부렸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익헌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직 안 끝났나? 우리도 시현이를 보고 싶은데."
"아,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태인이 말을 하자마자 밖에 있던 네 사람들이 우당탕탕거리면서 들어왔다. 멀리 가지도 않고 문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떤 곳에서 사는지 궁금했는데. 돈을 왕창 버는 사람들이라서.”
용하가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돈 쓸 시간도 없이 레이드만 하고 돌아와서 잠만 자고 밥만 겨우 먹고 나가는 것 같다는 인상이 한 눈에 풍겼다. 자기와 시현이는 오히려 호사를 누리고 있었던 거였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짠해졌다.
트레일러 안은 딱 기능적으로만 갖추어져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를 위한 투자라거나 소품같은 것도 없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없었다. 휴식을 위한 주거 공간이라기보다는 연구실같은 삭막함마저 묻어났다.
"괴수가 한 번 덮친 이후로 여기를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더라고. 괜히 그런 걸 뒀다가 도망치는데 걸리적거리기만 하면 안 되잖아."
용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지, 지우가 머쓱해하면서 설명했다. 용하는 더 구경을 하다가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옷을 보고 놀란 눈을 하더니 그리로 달려갔다. 온통 피가 묻은 옷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용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옆에는 갑옷들이 쌓여있었는데 찢긴 자국들이 있었다.
“아아. 레이드 하다가. 몸은 낫게 할 수 있지만 옷을 수선하는 재능은 없어서.”
지우가 말했다.
“레이드를 하다가 이렇게 다친 거라고? 누가?”
용하가 묻자 지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우를 빼고는 거의 골고루 다친 듯했다. 야로슬라프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제 클랜 A가 전부 뭉치면 레이드는 간단하게 하는 줄 알았는데.”
용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래. 그런데 요근래 좀 어려운 놈들을 만났어. 맵도 특별하고 정신 공격을 같이 해 오는 놈들이어서 쉽지 않았어.”
“맵이 특별해?”
“맵이 같이 공격을 해 와. 맵이 용암지대인 곳은 전에도 봤었지만 맵이 괴수의 의지대로 움직이면서 헌터를 공격하는 곳은 처음 봤어.”
지우가 말하자 용하가 세진을 걱정했다.
“세진이도 혹시 다쳤어?”
“응. 그래도 시현이 엄마가 치료해줘서 곧 회복되긴 했어.”
“세진이는 어떤 것 같아? 가능성은 있어? 말도 안 되는 애를 내가 맡겨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네 성격에 내가 부탁하는 걸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 같고.”
용하가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기도 했겠지만 세진이는 가능성이 있는 애야. 나도 부담이 컸어. 세진이는 내 라인인데 세진이가 가능성 없는 헌터였으면 나도 엄청 난감했을 거야.”
지우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밥값은 하나보다.”
“처음에는 밥값도 못 했지. 몇 번 너한테 다시 반품을 하려다가, 그러면 너도 우리 시현이를 반품한다고 할 것 같아서 참으면서 가르쳤는데. 처음에 깨닫는게 더뎌서 그런 거였고 일단 자기 방식으로 터득을 한 후에는 엄청나게 빠르더라고. 신체적인 열세를 다른 쪽으로 극복을 하고 있어. 굉장히 영리하게 싸우지. 괴수의 허를 찌르는 공격도 잘하고. 괴수의 허만 찌르는 게 아니라 같이 싸우는 동료들의 허도 같이 찔러서 문제기는 하지만.”
“왜?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야?”
용하가 물었다.
“아냐. 아냐. 그냥 하는 소리야.”
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그냥. 예를 들면 그런 거지. 괴수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자기 나름대로 함정을 만들어 놓는데 그걸 우리한테 안 알려주는 거지. 그러다가 우리가 당하기도 했어.”
“뭐어? 걔 바보 아니래?”
“서로 배워가는 거지. 이제는 세진이가 무슨 짓인가를 하고 있으면 우리가 먼저 보고 주의해. 괴수한테도 그게 잘 통해. 세진이는 맵을 가지고 싸워. 우리는 그런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떤 때보면 정말 굉장해.”
지우가 열정적으로 세진의 칭찬을 했다. 괜히 용하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정도야?”
“응. 덩치 큰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몸의 균형을 잃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러고 나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도 어렵고. 세진이는 맵의 여기저기에 함정을 만들어서 괴수의 움직임을 불편하게 만들어. 맵은 지금까지 괴수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세진이는 맵을 폭파시키는 방법으로 괴수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지.”
“괴수가 세진이를 공격하지는 않아? 가만히 놔 둬? 딱 봐도 얼빵하게 생겼으니까 세진이를 먼저 공격하고 싶을 것 같은데.”
용하가 말하자 임정과 태인이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자기에 대해서 절대로 좋은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니 정말이네요.”
임정이 웃었다.
“세진이도 우리를 믿으니까 그런 걸 시도하는 거지. 괴수가 세진이를 공격하도록 우리가 괴수를 가만히 놔두겠냐?”
지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 말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말은 없을 거라고 용하는 생각했다.
“맵을 조종하는 괴수한테는 세진이도 별로 소용이 없겠다?”
“괴수도 진화하고 맵도 진화하지. 우리는 세진이도 진화하기를 기대하고 있어.”
지우의 말에 용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상에 올랐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때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라미실과 해리는 그런 것에 능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는 것도, 조롱을 받는 것도, 2류로 취급받는 것도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취급받느니 차라리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기투합을 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면서 가끔 웃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해리의 별장에서 조용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떠들썩한 파티가 점점 싫어졌다. 남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벼파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