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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지키고 싶은 게 많아질수록 사람은 계속해서 점점 더 약해지는 거라고 지우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그 말이 건방져보였는데 솔직히 부러웠다. 그 말을 이해하면서 내뱉을 수 있는 게 부럽기도 했고, 그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그렇게 울다가 마침내 이익헌도, 론 디어를 들고 그곳을 떠났다.
더 이상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는 없었다.
***
출근을 하러 문을 열었을 때 밖에 어두운 형체가 있는 것을 보고 선아영은 기겁을 했다. 깜짝 놀라서 문을 다시 닫으려다보니 그 형체가 왠지 낯익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이었다. 레이드가 끝난 후로 연락도 되지 않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더니 갑자기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선아영은 어제 도대체 어디에 있었냐고, 연락은 왜 안 받는 거냐고, 사람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줄 아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익헌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익헌은 선아영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선아영이 물었다.
이익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만난 이후로 이익헌의 그런 태도를 처음 본 선아영은 걱정이 되어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지금 나가는 길이야?”
“네.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어요. 이십 분 정도 일찍 나선 거예요.”
“내가 데려다줘도 될까?”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죠. 아직 시간 있어요.”
“아니. 내가 데려다 줄게.”
그렇게 말하고 이익헌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떤 할 말이 있기에 저러나 하면서 선아영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익헌은 무엇 하나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선아영에게 문을 열어주려고 하다가 갑자기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선아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차를 출발시키고 고급 빌라를 떠난지 한참이 되었을 때 이익헌이 입을 열었다.
“이 말을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그냥. 그래도. 하지만. 이건. 해야 할 말인 것 같아서.”
“…….”
“너를 처음에 만났을 때는 이런 말을 너한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이렇게 좋아질지 몰랐으니까. 아니. 그 말을 못 들은 걸로 해라. 어차피 지금 이런 말을 듣는 건 너한테 상처밖에 안 될 테니까.”
선아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 너를 만난 후에도 아마. 그 후에도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도. 적어도 그 일을 멈추기는 했어. 너 때문은 아니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는 파이널 폭탄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돌렸다.
“네?”
“사람들을 죽였어. 죽이진 않았고 때렸지. 그래도 나는 알고 있었어. 그 사람들이 죽을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중에……. 채준형 마스터의 동생도 끼어 있었어.”
“……!”
선아영이 이익헌을 바라보았지만 이익헌은 그쪽을 향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당신이 묻지마 폭행범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채준형 마스터님 동생을 죽인 거라고요?"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 건, 당신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거야. 만약에 그게 나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야. 너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기 전에 그냥 포기했을 거야.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 같긴 해.”
선아영은 공이 제 코트로 넘어와 버린 것을 알았다. 이익헌이 왜 이 순간에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건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준형 마스터님이……. 그 일을 눈치 챈 건가요?”
이익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실 거예요? 증거인멸을 위해서 채준형 마스터님을 죽일 거예요?”
“아니야. 가서 이미 말했어. 어제. 그 사람을 만났어.”
“…….”
선아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말을 듣고 네가 상처입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싫고.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놓은 나한테 화가 나.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 바꾸고 싶어.”
선아영은 창밖을 바라볼 뿐, 말이 없었고 이익헌은 차를 길가쪽으로 붙였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운전하고 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보다 내가 훨씬 더 고통스러울 거라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당신한테 느낀 감정은 나를 사람답게 느끼게 해 줬어. 당신을 해치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채로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했었어. 당신을 너무 늦게 만난 게 잘못인 거겠지. 너무 큰 숙제를 떠맡겨서 미안해.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 거야.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깊이 들어오면 나도 감당을 못할 것 같거든.”
차 문을 열고 이익헌이 내렸다.
이익헌은 인도를 따라서 천천히 걸었고 뒤에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선아영의 차가 천천히 그를 따라왔다. 이익헌은 차가 바로 뒤까지 왔을 때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내려갔다.
“어디까지 가는 길이예요? 타요.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이브닝 드레스. 그걸 입고 다닐 자리를 많이 만들어주겠다고 했잖아요.”
이익헌이 창문에 손을 얹었다.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고 결정한 거야?”
“아마도요.”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 이대로 당신을 지나치는 것보다는 이편이. 후회가 덜 남을 것 같아서요.”
선아영이 말했다.
표정이 한없이 어두웠다. 한마디 한마디가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익헌은 알 수 있었다. 미안했다. 한없이 미안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 그런 말을 듣게 한 것이.
“머리가 좋은 아가씨는 아니군.”
“나는 그냥 탕수육이잖아요.”
이익헌이 차에 올라 선아영을 바라보다 선아영의 손을 잡았다.
"채준형 마스터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동생이 1급 괴수를 사냥하고 싶어했다고. 동생을 생각하면서 1급 괴수를 사냥해 달라고."
"마스터님은 당신을 용서하기로 하신 건가요?"
"그런 것 같아."
"좋은 분이네요. 좋은 분이라고 해야 하나."
“미안해.”
선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괜찮다는 말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언젠가는 그의 사과를 온전히 받아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익헌의 얼굴에 드리워져있던 그늘이 한층 옅어진 느낌이었다.
***
그야말로 폭풍 질주였다. 시현은 배를 납작하게 깔고서 발가락 끝을 잔뜩 세우고 발가락으로 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용하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면서 바라보았다.
“아빠한테 보낼 거니까 더 열심히 해 봐.”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면서 용하가 말하자 시현이가 다시 한 번 폭풍 질주를 시작했다. 동작은 스켈레톤을 타는 것과 비슷했다. 두 팔을 옆에 붙이고 발가락으로만 꼼지락거리면서 앞으로 전진을 하는데 그 속도가 꽤나 빨랐다.
“잘했어. 잘했어. 이거 아빠한테 보내고 삼촌이랑 같이 씻자.”
용하가 동영상을 보내자마자 지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한가한가보네?”
용하가 말했다.
“응, 지금 들어왔어. 이제 밥 먹으려고.”
“고생했다.”
“보낸 건 뭐야? 아직 안 봤는데.”
“으응. 제목. '인간 걸레 안시현.' 요즘엔 방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어. 시현이가 다 닦고 다니거든. 시현이가 아직 일어서지는 못하잖아. 그래도 뒤집기 한지 얼마나 됐다고 슝슝 다녀. 가끔 그 자세에서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들기도 하거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일어날 것 같아.”
“진짜?”
“응. 빨리 크지?”
“응. 네가 고생이 많다. 용하야. 항상 미안하고 고맙고 그렇다.”
“미안하긴 뭘. 나는 아직도 내가 너한테 받은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못 이기는 척 하고 그걸 다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네꺼야. 시현이가 사냥한 거라며.”
“그럼 시현이한테 줘야지.”
“시현이한테는 부족하지 않게 우리가 물려줄 텐데 뭘. 불편해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데에 써.”
“그렇게 말하면. 아무튼 고맙다. 더 생각해볼게.”
“그래.”
“시현이 바꿔줘?”
“아직. 우선 씻고 밥 먹고 그러고 다시 전화할게. 지금 내 모습 보여주면 시현이가 울지도 몰라. 완전 원시인 같거든.”
“아휴. 고생하네. 그래. 빨리 씻고 밥 먹어.”
“그래. 있다 다시 통화하자.”
서둘러 전화를 끊고 지우는 뜨거운 물을 틀고 샤워를 했다. 나왔을 때는 태인과 서규태가 식사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드시지 왜 기다리셨어요, 써전님.”
“먹으려는데 나온 거예요.”
태인이 말하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지우가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시현이 동영상 보면서 밥 먹어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런 게 왔으면 나한테도 바로 보내줘야죠.”
서규태는 정색을 하고 화를 내면서 말했다.
“시현이 동영상요?”
임정이 가장 늦게 오면서 말했다. 그래도 누구도 임정에게 서운해 할 수는 없었다. 레이드를 하다가 부상을 당한 서규태와 태인을 치료하느라고 임정이 여러 모로 바빴던 탓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현의 침실에서 강현에게 한 번 더 차크라 치료를 해 주고 나오는 길이었다. 세진이 옆에 딱 붙어서 간호를 해 주고 있어서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강현도 회복이 될 듯했다.
벽면 가득한 화면에 시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시현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마구 전진했다. 점점 속도가 올라가자 어느 순간 차크라가 피어올랐다.
“안 되지. 안 되지. 안시현. 그런 데에 차크라 쓰는 거 아니지.”
어느새 차크라가 스멀스멀 가라앉더니 시현이는 다시 발가락 조종에 집중을 했다.
“저러는데도 차크라가 나오네.”
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식사하면서 잠깐 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식사는 다 뒷전이 되었다. 다들 빈 젓가락만 물고, 입을 귀에 건 채로 시현이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요. 차크라가 말을 듣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요?”
임정이 물었다.
“그런데 차크라는 누구 말을 듣는 거예요?”
서규태가 말했다.
“아마 시현이 말을 듣는 건 아닐 걸요? 시현이는 말도 못 하잖아요.”
태인이 말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태인을 향해서 돌려졌다.
“……. 왜요?”
“차크라가 그럼…….”
지우가 태인을 바라본 채 말했다.
“용하씨요?”
서규태의 말에 이제는 모두가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용하는…….”
용하는 아닐 거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지우에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정수기 앞을 지날 때마다 어지럽다고 했을 때 용하가 정수기를 옮겨주었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강지연의 말대로라면 그때가 괴수의 차크라가 지우에게 들어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지우의 곁에는 용하가 있어주었다.
“아빠 엄마한테 인사하자. 삼촌들한테도.”
화면에서는 용하가 시현을 제 무릎에 앉힌 채 시현의 오른손을 잡아서 흔들고 있었다.
“‘아빠, 안녕.’ 해.”
“푸바바바바.”
시현이의 입에서 침이 품어져 나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때만큼은 용하만을 향하고 있었다.
“신용하?”
지우의 입에서 그 이름이 한 번 더 나왔을 뿐이었다.
6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