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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야로슬라프도 차크라를 잔뜩 실은 검으로 달팽이 괴수의 살을 찍어대면서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노동을 하듯이 레이드를 했다. 복잡한 생각을 잊기에는 딱 적합한 단순노동이었다.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이 왜 굳이 그런 짓을 한 건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물어본다고 해서 그가 대답을 해 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 왜 굳이 달팽이 괴수 목구멍에 들어갔어야 했던 거예요?”
이익헌은 느리게 걸음을 옮기면서 느린 어조로 말했다.
“다시 태어나고 싶었거든. 내 과거가 없이, 지금부터가 내 인생의 새로운 역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어.”
“아짐…….”
그렇게하면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야로슬라프는 그를 위로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야로슬라프도 이익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이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감응기 앞에 서 있던 지연과 선아영의 표정은 차츰 가라앉았다. 곧 레이드가 완전히 끝날 거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레이드가 끝났을 때 선아영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연이 선아영의 등을 쓸어주었다.
“걱정 많이 했죠?”
선아영은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채준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채준형은 자신을 그렇게 불편하게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붓을 놀리는 동작을 보고 그 붓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채준형은 자기가 그 그림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론 디어를 휘두른 헌터의 동작을 보고 론 디어가 만들어낸 상처를 알 것 같았던 것이다.
지연과 선아영이 채준형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그 말에 답을 해 주지 못했다.
“괴수 사체를 꺼내오면 바디 팩 몇 개는 연구실로 가져가서 연구를 해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채준형이 선아영에게 물었을 때 선아영은 당연히 괜찮다고 말하면서 채준형에게 피곤해보인다고 말했다.
“아뇨. 워낙 놀라운 레이드를 가까이에서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 다 잘 끝났으니까 잘 된 거죠.”
선아영이 말했다.
채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표정을 감췄다.
***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사진을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고 그의 차크라 숙련도가 높아지고 론 디어를 다루는 기술도 더 정교해져서 괴수의 몸에 만들어낸 상처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 사람의 개성과 의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채준형은 불 꺼진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찾을 수만 있다면 찾아서 죽이고 싶었다. 동생을 위해서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하필, 선아영의 연인이 되어서 나타난 건지.
채준형은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짜맞춰야 했다.
이익헌은, 그가 알기로 헌터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클랜 A의 클랜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채준형은 자기가 이익헌을 안다고 생각했다. 멀리서기는 했지만 그를 본 적도 있었을 것이다.
채준형은 지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익헌은 탱킹을 한다고 했던가. 그 말은 이익헌이 탱킹과 딜을 모두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재능있는 딜러 중에는 탱킹을 하면서 싸우는 딜러도 있기는 하지만 지연이 했던 말은 분명히 이상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지었던 지연의 표정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채준형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한숨을 쉬었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의 연구실은 복도 끝에 있었고 그의 연구실에 이 시간에 찾아올 방문객은 없었다. 그런데 복도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채준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기 마스터라는 그였지만 정작 그가 소지하는 무기는 없었다. 채준형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이라도 불을 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 아무도 없다고 믿기를 바라면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지만 이제는 뭔가 조치를 취하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문이 열렸을 때 채준형은 숨소리를 죽였다. 불이 켜졌다. 출입구 쪽에 달려있는 옅은 불빛은 안을 밝히기에 턱도 없었다.
채준형은 그가 이익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익헌은 그 뒤로 문을 닫았다. 채준형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다시 내 얘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이익헌이 말을 했을 때 채준형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기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연쇄살인범이었고, 지금은 클랜 A의 헌터인 이익헌을 상대로 저항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채준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익헌의 목소리는 지극히 부드러웠다.
‘자기 정체를 알게 된 사람을 죽이려고 온 사람이 저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니.’
채준형은 오히려 그 생각에 더 두려워졌다.
이익헌은 문 앞의 어두운 전등 하나만 켠 채로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향해 다가가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는 말.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 조금 일찍 사라진 것 뿐인데 그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자기 세상이 무너졌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도 안 됐고 싫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웠습니다.”
채준형은 그 상황에서 자기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스마트폰은 가방에 들어있는 채로 의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차크라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이익헌이라면 그가 의자 위에 있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기도 전에 다가와서 목을 따 버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평생 알아들을 수 없었던 외국어 같은 거였어요. 도대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 그게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이익헌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채준형은 알아챘다.
이익헌이 말했다.
“잃고싶지 않은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이제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게 되면서 자꾸만 내 마음이 과거를 향해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미안하고 바꾸고 싶고…….”
“선 대표는. 그 사실을 압니까?”
채준형이 물었다.
이익헌은 고개를 저었다.
“선 대표의 아버지도 묻지마 폭행으로 죽은 거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부사장님이 그 사건에도 연관된 겁니까?”
“아뇨.”
이익헌은 급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죽인 사람을 전부 기억합니까?”
이익헌은 다시 채준형을 바라보았다. 채준형의 동생을 죽인 순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죽을 정도로 폭행을 가한 순간이라고 해야 했다. 이익헌이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이익헌은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이전의 나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이전의 내가 한 짓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나는 그 일에 책임을 져야 돼요.”
이익헌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을 때 채준형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차크라를 쓰지 않겠습니다. 나를 어떻게 하든, 당신이 하는대로 맡기겠습니다.”
채준형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익헌은 론 디어를 꺼내서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제 오른쪽 어깨를 만졌다.
“내 팔이 본능적으로 나를 위해서 방어하지 못하도록 이것도 떼겠습니다.”
채준형은 제 눈 앞에서 이익헌이 자신의 팔을 도려내 잘라버리는 것을 보았다. 채준형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헌터이기도 하고 일반인이기도 한 사람.
탱커이기도 하고 딜러이기도 한 사람.
채준형은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이익헌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떨구어져 있었다.
채준형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익헌은 제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발길질을 참아냈다. 숨이 턱, 막혀왔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지만 그 고통을 온전히 저에게로 흘려보냈다. 차크라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그것은 채준형의 동생이 자신에게 당했던 폭행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익헌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 저주스런 행적을 지우고 싶었다. 손톱이 빠지도록 캐내고 싶었다. 뜯어내고 싶었다. 그것이 제 기억이 아닐 수 있게만 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문득 채준형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에 나한테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이 들어왔었는데. 당신이 한 겁니까?”
채준형이 물었다.
이익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그때 이미 후회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익헌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대답을 생각하는 중이라는 것을 채준형은 이해했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미안하지 않았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 때문에 바뀐 일을 보상하고 싶었습니다.”
“왜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거죠?”
“그 사람들이 잃은 게 뭔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나한테 내 가족의 죽음은, 영정사진과 봉분 하나. 그런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내 옆에 있는 동안에도 나랑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웃어주지도 않던 사람이 영정 사진 속에서는 그나마 웃었고, 그리고 땅 속에 묻혔죠.”
“이제는……. 그 의미가 달라졌다는 겁니까?”
“아영이를 생각해 보면. 아영이를 잃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그걸 생각하니까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채준형은 론 디어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들어서 이익헌을 찌를 수도 있었다. 동생이 죽은 후로 그것을 소망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에서 그것을 치웠다.
채준형은 그의 옆을 지나쳐서, 한 걸음 한 걸음, 바닥을 꾹꾹 누르면서 걸어갔다. 이익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1급 괴수를 잡을 거라고. 그 녀석은 항상 떠들어댔었습니다.”
“…….”
“채준석. 그게 그 녀석 이름이예요.”
“…….”
“1급 괴수를 죽일 때. 그 녀석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을 기억해주고 그 녀석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헌터였던 놈이니까. 죽어서도 괴수를 쫓아다닐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놈은 1급 괴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놈이니까. 그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하란 말이예요!”
채준형이 뒤를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후로는 돌아보지도 않고 복도를 뛰어가버렸다.
이익헌은 제 팔을 붙였다. 쉬지 않고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를 잃고 슬퍼하는 것은 남겨지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선아양에게 자신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순간은 선아영이 미칠듯이 보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