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8 / 0331 ----------------------------------------------
6부. 괴수의 차크라
“신무기를 사용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놈일 것 같아서 여기로 모셨습니다. 달팽이 괴수는 느릴 거라는 편견은 미리 버리시는 게 좋습니다. 달팽이 괴수를 다른 곳에서 만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종은 많이 다릅니다.”
채준형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상되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헌터한테 위협이 될 요소는 없겠죠? 그냥 덩치가 무지하게 크다는 정도겠죠?”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달팽이 괴수한테 압사당해서 죽은 헌터를 다른 헌터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게 달팽이 괴수의 습관이죠. 달팽이 괴수가 뭔가를 먹으면 그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전부 보입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들어가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겠죠. 2급 늪에 사는 달팽이 괴수의 공략 성공 확률은 굉장히 낮습니다. 그래서 오픈일이 거의 다가왔을 때 치안대가 나서는 일이 많죠.”
채준형이 말했다.
“압…사요?”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네. 그 넓은 몸으로 깔아버리면 방법이 없죠. 빈틈이라는 게 없으니까 거기에 눌린 채로 질식해서 죽는 겁니다. 실제로 달팽이 괴수의 무게는 다른 개체들만큼 나가지 않을 텐데 부드러운 살덩이가 틈없이 눌러오니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채준형의 말을 듣고 야로슬라프가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이익헌도 달팽이 괴수를 2급 늪에서 만나본 기억은 없었다.
“달팽이 괴수라고 무시하시면 안 되는게. 입으로 물어서 씹으면 뼈가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라고 하더군요.”
“달팽이가 뼈를 씹는다고요?”
야로슬라프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괴수잖아요.”
채준형은 자기한테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로슬라프나 이익헌에게 긴장감이 크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꼭 공략에 성공을 해야 하는 건 아니고 이번 레이드의 목표는 무기 성능을 알아보자는 거라는 거 잊지 말고요. 둘이서 하는 게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나와요. 네?”
선아영은 이익헌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이익헌은 회사에 쫓아온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면 이런 기분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희한하게 그게 싫지만은 않아서 알았어, 알았어만 연발하고 있었다.
지연은 우두커니 있다가 누군가 야로슬라프에 대해서도 걱정해주는 척을 하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야로슬라프를 격려해주었다. 마침내 야로슬라프와 이익헌, 두 사람은 완전 무장을 하고 자신들의 무기와 바디 팩까지 챙겨들고서 늪 아래로 내려갔다.
채준형은 이익헌이 바디 팩을 들고 가는 것을 보고 웃었다.
“직업 의식이 정말 투철하신데요? 이 경우에는 애사심이 투철한 거라고 봐야 하나? 늪 아래로 내려가면서 직접 바디 팩을 들고가는 헌터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부적 같은 거예요. 반드시 죽여서 괴수를 저기에 담아오겠다는 의지같은 거죠. 기선제압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아마 저 사람들도 두려울 걸요? 남들보다 강하다고 해서 맞아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지연의 말에 채준형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늪 아래에 같이 내려가지 못하는 세 사람은 감응기 앞에 둘러섰다. 감응기에는 늪 아래의 상황이 상세하게 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 차크라가 보였고 헌터 차크라 두 개가 그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연두색이 블루 파이프예요. 여기 파란 색으로 표시되는 게 아비탄이 장전된 총이고요. 그리고 이게 단검 너클. 노란 색요.”
지연의 설명을 들으면서 채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무기에서도 이런 표시가 나타납니까?”
“아뇨. 제가 특별히 조작을 한 거죠. 감응기에 반응할 수 있게 발광 물질들을 발라놨어요. 평상시에는 감응기에 무기까지 나타나지는 않아요.”
“그렇군요.”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고 채준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네?”
“이익헌 부사장은 론 디어를 씁니까? 평상시에?”
그의 말에 지연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채준형이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지연은 채준형이, 동생을 묻지마 폭행 사건으로 잃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고 그 일이 이익헌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일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생각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여기에서 이런 식으로 질문을 받은 것이다.
“론 디어는 잘 안 써요. 부사장님은 대부분의 경우에 탱킹을 하죠.”
“탱킹요? 이 부사장님은 탱커가 아니던데요? 지연씨가 잘못 안 것 아닙니까?”
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머릿속에서 식은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지연은 제 실수를 깨달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명하는 게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재미있네요. 강지연씨같은 완벽한 사람이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게.”
채준형은 그것을 지연의 착각으로 생각한 듯했다. 그리고 그때 다행히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코모도 괴수의 독을 발라놓은 침을 블로우 파이프에 넣어서 그것을 불어 달팽이 괴수를 맞추는 일은 엄청나게 지루한 일이었다. 괴수의 독침을 맞으면 독침에 맞은 괴수가 마비를 일으킨다고 했지만 마비가 지속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익헌에게는 그게 의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블로우 파이프는 별로인 것 같아.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
이익헌이 말하자 야로슬라프가 반박을 했다.
“그건 상대적인 거죠. 어떤 헌터들에게는 그게 충분히 긴 시간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이익헌은 블로우 파이프를 일찌감치 던져버렸다. 입에 물고 힘껏 불어대는 것이 도무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나콘다 비늘로 만든 탄환은 그럭저럭 이익헌의 입맞에 맞았지만 원하는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것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야로슬라프는 그런 식으로 제품을 평가하면 안 되는 거라고 옆에서 잔소리를 했지만 이익헌은 어느새 단검이 박힌 너클을 손가락에 끼웠다.
“나는 처음부터 이게 제일 마음에 들었어. 론 디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에 다는 단검을 론 디어로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가면 제안을 해 봐야지.”
이익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달팽이 괴수를 향해 걸어갔다.
“야로. 내가 저 괴수한테 잡아먹혀도 놀라지 마.”
“왜 그래요, 아짐? 자신이 없어요? 잡아먹힐 것 같아서 그래요?”
야로가 놀라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의 목구멍에 들어가서 이걸로 찢고 나와보려고.”
“미쳤어요? 그러다가 잘못 되면요? 그렇게 극적인 연출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는데요? 달팽이 이빨이 2만개쯤 되는 거 알아요?”
“그래? 야로같은 헌터 2만명이 있는 것 만큼이나 안 무서운데?”
“아짐!”
“요즘엔 나를 보고 징징거리는 게 유행이야? 다들 왜 그러셔? 징징댈 필요없잖아.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네가 저 놈을 해치우고 나를 구할 수 있잖아.”
요며칠 아짐이 이상하게 울적해 보여서 야로슬라프는 걱정이 되었지만 자기를 믿고 그러는 거라는 뉘앙스의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익헌은 한 손에 론 디어를 들고, 한 손에는 단검들을 박은 너클을 끼운 채 달팽이 괴수를 향해 달려갔다. 야로슬라프도 동시에 달렸다.
야로슬라프는 달팽이 괴수가 이익헌을 향해 목을 길게 내뺐을 때를 노리고 있다가 제 검을 휘둘러댔다. 달팽이 괴수는 데미지를 입으면서도 상처를 빠른 속도로 회복했고 이익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익헌은 너클을 휘둘러 한꺼번에 조각을 냈다. 자기에게는 별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지우가 사용한다면 괴수에게 단번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팽이 괴수는 끈질기게 이익헌을 노렸고 이익헌은 순순히 달팽이 괴수의 입에 들어가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야로슬라프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야로슬라프의 놀라움은 밖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의 놀라움에 비하자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선아영은 그 자리에서 휘청이면서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지연이 선아영을 부축하면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채준형 역시 놀라서 화면을 보았다. 분명히 달팽이 괴수가 이익헌을 잡아 먹은 게 맞는 것 같았다. 잡어 먹었다는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달팽이 괴수의 입 속에 이익헌이 들어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닌 걸지도 몰라요. 여길 보면 야로슬라프는 계속 다른 곳을 공격하고 있잖아요. 만약에 부사장님이 공격을 당한 거라면 야로슬라프가 당장 부사장님한테 가서 부사장님을 구했겠죠. 두 사람한테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요?”
지연이 말했다.
선아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서 제대로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채준형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아영을 바라보았다. 선아영을 가까이에서 봐온 채준형은 선아영이 이익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선아영이 이익헌을 잃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다시 돌아온 아버지를 잃는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선아영은 지연의 말을 들으면서 일단 안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여길 보세요. 너클이 계속 움직이고 있어요. 부사장님은 이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공격을 하기로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지연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익헌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 더 했겠는가.
감응기로 늪 아래의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익헌의 몸이 달팽이의 목을 따라 천천히 넘겨지는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기절을 할 뻔했다.
하지만 사실은, 보여지는 것과 많이 달랐다. 달팽이 괴수야말로 덫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팽이 괴수는 제 목에 걸린 이익헌 때문에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고 괴로움과 답답함을 느끼면서 이익헌을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익헌을 뱉어낼 방법이 없었다.
이익헌은 달팽이 괴수의 안으로 들어가면서 계속해서 너클과 론 디어로 공격을 했다. 달팽이 괴수의 입에서 녹색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감응기에 달팽이 괴수의 몸에서 불안한 차크라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보여요. 부사장님한테가 아니라 달팽이 괴수한테요.”
지연이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달팽이 괴수는 모든 힘을 다해서 이익헌을 토해냈다. 이익헌은 얌전히 나오는 대신 론 디어로 달팽이 괴수의 살을 갈랐다.
아버지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갑옷을 입고 완전 무장을 한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나온 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등장이었다. 야로슬라프는 튀어나온 이익헌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재미있지 않으니까 이제 제대로 싸워요. 이렇게까지 싸웠는데 러프 스톤은 챙겨야죠.”
야로슬라프의 말이 부드럽게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익헌도 분위기를 눈치챘다.
"알았어. 알았어."
이익헌은 야로슬라프와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어가면서 달팽이 괴수를 해치웠다. 이익헌은 레이드를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수족과도 같아진 론 디어를 사용했다.
론 디어가 휘둘러질 때마다 정보창에 나타난 괴수의 체력이 후두두둑 떨어져나갔다. 채준형의 손을 거쳐서 공격 증폭률을 800퍼센트까지 올린 새 론 디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