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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채준형은 선아영을 처음 본 순간부터 선아영을 좋아했다. 이성으로 좋아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선아영의 눈을 보고 있으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선아영은 채준형이 자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지 어쩐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을 했다. 그렇게 며칠동안, 그 시간이 되면 자기는 다시 올 거라고 말을 하고서 다시 찾아갔다. 어차피 자기를 기다릴 것 같지도 않고 일, 이 분 정도 늦는다고 큰 일이 생길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꼭 같은 시간에 맞춰서 가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빙판길에서 혼자 넘어져서 절뚝거리느라 이 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채준형은 별 말이 없었지만 선아영은 꽤 신경이 쓰였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지만 내일은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못 오면 그러련 하고 계세요.”
그날, 그의 집에서 나서는데 채준형이 같이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주고 선아영을 병원으로 데려가 주었다. 정말로 재수가 없었는지 엉덩이뼈에 금이 가 있었다. 채준형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선아영의 옆에서 계속 보호자 노릇을 해 주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지금, 자신에게는 더이상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아영을 확 휘감아치는 바람에 선아영은 준비도 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질 뻔했다.
채준형도 선아영이 최근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옆을 묵묵히 지켜주었고 선아영의 치료가 끝났을 때는 익스트림 헌터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익스트림 헌터에서 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자기 작업실에서 하는 게 편해서 작업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익스트림 헌터로 거취를 옮겼다. 바디 펌과 클랜 A로부터 각종 희귀한 재료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괴수에게서 나오는 재료를 자기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일 매일, 더 많은 재료가 쏟아져 나왔고 만족을 모르는 까다로운 상사까지 있었다.
공격률을 400퍼센트로 올려주었을 때는 기뻐하는 것 같더니, 800퍼센트로 올려주었을 때는 왜 900퍼센트가 아닌지 아쉬워하는 것 같은 상사를 보면서 그는 점점 일하는 재미를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어두운 구덩이에 있을 때 서로를 잡아 올려주었다는 동지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선아영은 지금이 그 얘기를 꺼내기에 적당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야로슬라프와 이익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무기의 성능을 두 분이 알아봐줬으면 해요. 그리고 우리는 감응기로 늪 밖에서 두 분이 레이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전혀 문제 없죠. 좋은 생각이네요. 5급 늪 정도는 몇 분만에 혼자서 해치울 수 있으니까 시간을 들여가면서 신무기 성능을 알아보려면 3급 늪 정도가 괜찮을 것 같고요.”
야로슬라프의 말에 선아영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 할까요? 아짐?”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언제든 상관은 없지.”
이익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로슬라프는 선아영에게 눈짓을 했다. 오늘 아짐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 내려가서 매장 구경하고 있을래?”
이익헌이 갑자기 말하자 야로슬라프가 깜짝 반가워하며 정말 그래도 되느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작정이었는지 이익헌이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벌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물은 것이다.
이익헌과 선아영은 멍하니 야로슬라프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드디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봤으면 둘 중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겠어요.”
선아영이 말했다.
“그런 일 없어.”
“그럼. 왜 연락이 없었어요?”
“그냥. 좀. 여러 가지 일로.”
“여러 가지. 뭔데요? 혹시 갑자기 내가 너무 신경쓰이던가요?”
선아영은 말을 해 놓고 후회했다.
두 사람이 같이 하는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너무 바람을 드러내버린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직접 묻고 나니 괜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익헌은 말없이 선아영에게 다가갔다. 선아영은 그가 그냥 적당히 가까운 곳에 와서 앉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익헌은 거침없이 선아영에게 다가오더니 당연하게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는 물건을 뒤지듯이 선아영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왜 이래…요.”
선아영이 뒤로 버티면서 말했다. 이익헌은 선아영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선아영의 귀와 목과 턱 밑을 꼼꼼하게 살폈다. 브래지어를 치우고 그 아래의 맨 가슴도 샅샅이 살피고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사라졌네.”
“뭐하는 거예요? 혹시 내가 그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기라도 했을까봐 이러는 거예요?”
선아영이 화를 내면서 단추를 잠그려하자 이익헌이 선아영의 손을 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오해하는 건 싫어. 더군다나 이 사건에서는 내가 피해자라고.”
선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나는. 애초에 절제심이 없는 인간이야. 그리고 다분히 폭력적이고.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내 진실이랑은 많이 다를 거야.”
“…….”
“당신이 떠날 때. 봤어.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말을 듣고서야 선아영은 이익헌이 자신의 몸에서 뭘 찾았던 건지를 깨달았다.
“그걸 뭣하러 지금까지 신경써요. 나는 좋았다고 했잖아요. 좋았어요. 그게 내 진심이고요. 싫었으면 얘기했을 거예요. 처음에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당신이 나를 배려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너무 어리고.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나는 내가 다른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 내 과거가 깨끗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
이익헌은 선아영의 블라우스를 젖히고 가슴을 손등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선아영은 그런 이익헌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내가 뭘 걱정해야 하는 건지는 알게 된 것 같네요. 뭘 걱정해야 되는 건지도 모르고 혼란스럽기만 했을 때보다는 지금이 나은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내가 싫어진 건줄 알았어요. 그런 남자들도 많잖아요. 일단 여자를 정복하고나면 모든 관심을 다 잃어버리는 사람요. 나는 지금 내가 그런 상태인 건가 했어요.”
"아니야. 그런 게 절대로 아니야. 당신은 휘트니스 센터에 배달된 탕수육만큼이나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달콤하고 여전히 유혹적인데. 내가 문제야. 내가."
이익헌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동안 나를 경배하는 사람들한테서 나를 찬양하는 창조적인 비유를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탕수육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그런데. 그 말이 가장 듣기 좋네요."
이익헌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선아영이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도 선아영이 이런 말을 해 줄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이익헌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늪으로 향했다.
채준형은 이익헌과 야로슬라프에게 자기가 만든 무기들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했고 이익헌과 야로슬라프는 강현에게서 들었던 내용들을 상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채준형은 너클에 단검을 부착한 무기를 보이면서 그것의 활용법에 대해서는 자기도 자신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이 괴수에게 데미지를 입히는데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이익헌은 그것을 중점적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채준형이 준비해준 무기들 이외에도 이익헌과 야로슬라프는 평소에 자기들이 애용하던 무기들을 챙겼다. 이익헌이 론 디어를 챙기는 것을 보고 채준형의 표정이 잠시 굳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가 잘못 생각한 거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연에게, 감응기가 어느 정도로 늪 아래의 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이익헌은 그런 채준형을 멀리에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걱정돼요, 아짐?”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이익헌은 어이가 없어서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걱정되냐고? 뭐가? 3급 괴수가? 장난하냐?"
"지금 아짐 표정이 그렇거든요. 남이 토해놓은 걸 먹어야 하는 표정 같아요."
"으으윽."
선아영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야로슬라프를 노려보자 야로슬라프는 한 건 했다는 듯이 으쓱해했다.
야로슬라프의 특수한 차크라가 감응기에 나타나지 않도록 지연이 몇 번이나 야로슬라프의 옷과 갑옷을 확인했기에 야로슬라프에 대해서는 따로 걱정할 일이 없을 듯했다.
“식물 괴수는 처음이예요. 저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식물 괴수가 나타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식물 괴수는 대체적으로 동물 괴수보다 약했고 하급 늪에서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클랜 A의 클랜원들에게는 오히려 그런 괴수가 낯설었다. 이익헌에게도 식물 괴수를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될 터였다.
괴수에게는 6장의 붉은 꽃잎과 6개의 기다란 수술이 달려 있고 그 기다란 여섯 개의 수술로 헌터를 공격한다고 했다.
“괴수 이름이 꽃무릇이라고 했어?”
이익헌이 선아영에게 물었다. 세상을 살다보니 그런 일도 다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에게 자기가 괴수에 대해서 묻고 있다니.
“내가 클랜 A 헌터한테 괴수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줬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걸요?”
“그럼 그런 얘기를 안 하면 되지.”
“꽃무릇 괴수는 정말 쉬울 거예요. 레이드를 시작하는 하급 헌터들이 가장 좋아하는 괴수로 알려져 있고 꽃무릇 괴수를 상대하면서 다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익스트림 헌터에서 가장 저렴한 무기를 사는 사람들은 꽃무릇 괴수를 공략하러 가는 하급 헌터들이예요. 하급 헌터들이 12시간 정도 붙어서 계속 공격을 하다보면 죽게 돼 있대요.”
선아영은 마침 자기가 잘 아는 괴수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서 술술 대답을 하며 뿌듯해했다.
“12시간이라. 그런 레이드에도 열 명이 붙는 거겠지?”
이익헌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죠.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렇죠.”
“그런데 왜 우리한테 꽃무릇 괴수를 맡긴 거야?”
“두 분이 싸우시려면 쉬운 개체가 나을 것 같아서요.”
“잠깐만. 이거 혹시5급이야?”
“네.”
“아, 진짜. 이런 건 구태여 무기를 쓸 필요도 없잖아. 그냥 손으로 투닥투닥 두드리기만 하면 죽을 것 같구만. 싸울 의욕이 드는 걸 붙여줘야 싸우지. 그래야 무기 성능도 제대로 볼 수 있고, 궁지에 몰려야 사람이 전력을 다 하게 되잖아. 그런 위급한 순간에 무기하고 호흡이 맞는지 그런 걸 봐야 하는 건데 5급 꽃이라니.”
이익헌이 말하자 채준형이 다가와서 자기도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고 말했다.
“우리 대표님은 혹시라도 부사장님이 다칠까봐 그 걱정밖에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가시죠. 봐둔 놈이 있습니다. 2급 괴수예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채준형이 워낙 자신만만해 해서 저절로 기대감이 상승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 늪에서 기다리고 있는 괴수가 달팽이 괴수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솔직히 맥이 빠졌다.
꽃을 피해서 왔더니 이제는 달팽이라니. 식물괴수에 비하면 그래도 이게 어디냐는 건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