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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선아영은 이익헌이 이별을 아쉬워해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를 하고, 곧 다시 올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라고 말을 했었다. 선아영이 작별 키스 같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익헌은 키스를 해 주지 못했다. 만남이 상처밖에 남기지 못한다면 이 만남을 일찍 정리해주는 게 나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내가 언제부터 남의 사정을 그렇게 챙겼다고. 나 이익헌이잖아. 내가 왜 이런 거에 신경써야 되는 거지?’
선아영이 돌아가고, 선아영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그 마음을 참았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라는 그 좆같은 말을 이해하게 돼 버리다니.
젠장, 젠장, 젠장!
끝도 없이 허공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런 익헌을 보면서 야로슬라프는 한국 단어 하나를 마스터하고 다음부터 그 단어를 애용했다.
“아짐! 젠장. 젠장. 젠장!”
시현이보다는 한국말을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말에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야로슬라프에게 이익헌은 그다지 좋은 스승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이익헌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선아영을 찾아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프 스톤 매각을 의뢰해야 한다는 특명이 떨어졌을 때 이익헌은 더 이상 선아영을 만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그때 제 기분이 좋은지 싫은지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선아영의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익헌은 그곳에서 채준형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호남형에 묘한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가 봐도 흐뭇해지는 마초적인 매력이 물씬 풍겼다.
채준형은 문을 잡고서 안에 있을 선아영에게 친밀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농담이 반응을 얻었는지, 이어서 크게 웃는 것도 보였다. 그 안에 있을 사람은 선아영일 텐데 이익헌은 한 남자가 선아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웃음을 지으면서, 농담을 걸면서 웃고 있는 장면이 제 가슴과 머리를 괴롭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짐. 어디 아파요?”
야로슬라프가 짧은 한국어 실력으로 물었다.
“아니. 왜? 나는 괜찮아.”
그런데 야로슬라프는 조금 후에 다시 그렇게 물었다.
“아짐.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다고. 아파보여?”
그렇게 되물으면 제대로 대답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야로슬라프는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아짐, 어디 아파요?”
이익헌은 ‘어디 아파요?’ 라는 질문이,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굉장히 나쁜 질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아프다. 이 개새끼야. 안 아프다고! 내가 아파보여? 머리가 어떻게 된 것처럼 보여? 다시는 그 따위 질문 하지 마, 알았어?!”
그 말을, ‘너 제 정신이냐?’라는 말로 받아들인 건 자기가 과민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야로슬라프야말로 굉장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디 아프냐?'는 말에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답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욕까지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 제 수첩에 재빨리 그 내용을 업데이트 했다.
‘'어디 아파요?'라는 질문을 사용할 때 주의할 것. 꼭 쓸 일이 생겨도 두 번까지만 쓸 것!! 완전 주의. 절대 잊어버리지 말 것. 특히 아짐한테 사용할 때는 정말로 주의할 것!!!’
느낌표 세 개에 별 표 세 개를 치고 주위에 동그라미를 세 겹으로 쳐 넣고도 안심이 안 돼서 별 표 하나를 더 그려 넣고야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준형이 먼저 걸어오다가 두 사람을 발견했고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익헌에게 인사를 하고 야로슬라프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익헌은 채준형이 자기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디 펌의 부사장이자 클랜 A의 클랜원인 이익헌을, 이제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이익헌이 선아영의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선아영은 심사가 뒤틀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가 건방지게 노크도 없이 문을 여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이 이익헌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튕겨오르듯이 일어났다. 그 뒤에 야로슬라프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선아영은 어정쩡한 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서 반갑기는 했지만 저 사람이 왜 이곳에 같이 나타난 건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신나게 같이 놀기로 한 파티에 동생을 데리고 나타난 친구를 봤을 때의 당혹감과 비슷했다.
야로슬라프는 자기가 어떤 의미로 선아영에게 비쳐졌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그래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었다.
“어서 오세요. 어쩐 일이세요? 온다는 말도 없이?”
선아영이 말하면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뭘로 드릴까요? 커피 괜찮으시겠어요?”
선아영이 말하자 이익헌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야로슬라프는 괜히 두 사람의 애정 문제에 끼어서 자기만 힘들게 됐다고 생각했다.
“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어요. 그런데 눈 색깔이 참 신기하네요. 그때는 완전히 회색빛인 것 같더니 저쪽에서 들어올 때는 녹색 같더니, 이렇게 보니까 또 푸른 빛도 도네요?”
선아영이 야로슬라프에게 말을 건네자 야로슬라프가 원래 그렇다고 대답했다.
“익스트림 헌터에는 처음이시죠? 그렇지 않아도 클랜 A가 한국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부탁드릴 일이 있었어요. 신무기가 개발됐는데 그걸 봐 주셨으면 하거든요.”
“아, 정말요? 익스트림 헌터의 신무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아직 다른 나라에서는 공격 증폭률 450퍼센트를 넘는 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만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게 늘 궁금했어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그때까지도 이익헌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이 사람이 뭣때문엔가 화가 난 것 같기는 한데, 잘못을 해 놓은 건 자기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한 걸까 하는 생각만 선아영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엉켜들었다.
“아,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방금까지 무기 마스터께서 여기에 같이 계셨거든요. 채준형 무기 마스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게 익스트림 헌터의 최고의 행운이었죠.”
선아영이 말했다.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또 전혀 다른 말을 하려니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무기 마스터요?”
야로슬라프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네. 채준형 마스터님 동생이 헌터였어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채준형 마스터님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무기 마스터셨죠. 동생의 안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셨을 테니까 아마 더 열심히 하셨을 거예요. 애초에 능력도 있는 분이었고요.”
“그래요? 그 헌터가 누군데요? 아짐은 알 수 있지 않아요? 익스트림 헌터가 생긴지는 얼마나 됐는데요? 그 정도 기간동안 계속 레이드를 했으면 지금쯤 B급이나 C급은 돼 있을 것 같은데.”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이익헌도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네. 그 기간동안 계속 레이드를 했다면 분명히 B급까지는 올라갔을 거예요. 그런데 운이 좋지 않았어요.”
“운이 좋지 않았다고요?”
“내가 마스터님을 찾아갔을 때 마스터님은 다시는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동생을 잃은 상심이 커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계셨거든요.”
“동생을 잃다니요, 왜요?”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이익헌도 선아영을 바라보았다.
선아영은 그 날의 일을 기억해냈다.
처음에 선아영이 채준형을 찾아갔을 때, 선아영은 아버지를 잃은 상처로부터 전력으로 달아나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익스트림 헌터를 세우고 헌터들을 위한 무기와 장비, 보호구와 갑옷을 만들어서 헌터들의 안전을 조금이라도 보장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선아영은 자기를 젊고 사회경험 없는 여자가 아닌, 가능성을 가진 한 사람의 신인 사업가로 봐주고 지지해줄 동반자를 필요로 했다.
채준형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무기 마스터였다. 상당히 이름이 알려졌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고 독보적이라고 해야 옳았을 것이다.
채준형이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었다. 채준형은 자신의 동생이 헌터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그 동생이 죽은 것이다.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채준형은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동생이 쓰러진 사고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채준형은 자기가 그 자리에 동생 대신 있었어야 했다면서 절규했다. 동생이 아이스크림을 사다달라고 했는데 자기가 가지 않아서 동생이 나갔다가 그렇게 된 거라면서 채준형은 오열을 했다.
그 후에 그가 보인 행보는 꽤나 급작스러웠다. 동생의 몸을 자기가 꼭 봐야겠다면서 채준형은 검안실에 난입을 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들어간 과정은 거칠었어도 그 후에는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일만 조용히 마쳤다. 동생의 온 몸에 생겨난 상처들을 보고 무기 자국을 확인할 수 있으면 살인범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최고의 무기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반드시 자기가 동생을 죽인 사람을 찾아낼 거라고 다짐했다.
선아영은 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그러나 그 일은 채준형을 안에서부터 갉아먹기 시작했다. 채준형은 자기가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에서 진척을 보지 못했다. 차크라를 사용하는 헌터를 찾아야 하는데 론 디어를 사용하는 헌터를 찾기도 어려웠고 막상 찾더라도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식으로 론 디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자기가 아는 살인범은 팔을 휘두르고 깊이 찌르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지만 그가 만난 헌터들은 그러지 않았다.
채준형은 자기가 잡아야 하는 사람이 때로는 헌터이기도 하고 때로는 일반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결국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서 스스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선아영이 그를 찾아가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영영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시점에 선아영이 그를 찾아갔다. 처음 그를 찾아갔을 때 선아영은 채준형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눈을 보고 놀랐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눈 앞의 어떤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그 텅빈 눈을 보고 선아영은 이 사람의 영혼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방은 두꺼운 커튼으로 둘러쳐 있었다. 커튼이 필요없는 곳, 볕이 들 여지가 없는 벽에까지도 커튼이 달려 있었다. 그 안에서 채준형은 꿈쩍 않고 앉아 있었고 모르는 사람이 왔는데도 상처받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선아영이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찬 바람이 들어오게 하고서 방을 닦는데도 채준형은 침입자에게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먼지가 푸르르 일어나지 않게 가만히 눌러 모아가며 닦으면서 선아영은 자기가 누군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채준형이 어떻게 도와줬으면 하는지 그런 것들을 말했다.
선아영은 자기가 채준형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냥 가서 같이 앉아있기만 하다가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열 흘이 넘었을 때 채준형이 고개를 들어서 선아영을 바라보았다. 선아영이 그를 찾아간 이후로 그가 처음, 초점을 맞춰서 무언가를 집중해 바라본 순간인 것 같았다.